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73)화 (73/90)

제73화

재희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피부와 몸매를 신경 써서기도 했지만, 혹,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술김에 내뱉어 버릴까 두려운 탓이었다.

특히 가슴속에 오래도록 숨겨 왔던 일을.

그러나 강헌이 관계를 정리하자고 한 날은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받아 모셔 놨던 독한 양주들을 그대로 들이부었다.

선영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만취한 후였다.

“어머, 재희야! 이게 무슨 일이야. 모레 화보 촬영 있는 거 잊었어?!”

“아니, 선영아. 나는 하나도 안 잊었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일단 침대로 가자, 응? 바닥에서 이러면 안 돼!”

재희는 저를 부축하려는 선영을 붙잡고 늘어졌다.

“선영아, 나 어쩌지? 어떡하지? 강헌 오빠가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어…… 우리 사이를 말이야…….”

“뭐, 뭐라고?!”

놀란 선영이 재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정말이야? 스캔들 때문에 그래? 합의 없이 터뜨려서?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어떤 짓을 당했는데……!”

“당했다…… 내가 당했지, 그래…… 당했어, 내가…….”

선영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재벌이면 다야? 한 여자의 인생을 이토록 망쳐 놓고……!

“그것 때문에 오빠가 날 싫어하게 되어 버린 걸까? 손을 잡는 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말 하지 마, 응? 무조건 가해자 잘못이야. 피해자가 이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오빠는 날 사랑했을까?”

“재희야…….”

선영이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깊이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그럼 오빠는 날 사랑해 줄까……?”

“응?”

“그런 일 없었다고…… 다 연기였다고…… 난 더럽혀진 적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 오빠가 다시 나한테 올까?”

이게 무슨 소리야?

놀라 눈을 크게 뜬 선영이 재희의 팔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재희야, 그게 무슨 뜻이야?”

재희가 아주 오래 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아 버린 사람처럼 허무하게 웃었다.

“그건 내 생애 최초의 연기였어.”

저를 찾아온 이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건네던 그 날이, 여전히 선명하다.

“회장님이 권했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그는 강헌을 붙잡아 맬 목줄이, 자신은 강헌을 붙잡아 둘 수갑이 필요했다.

“우리 둘 다 강헌 오빠를 필요로 했어. 그래서…… 그런 걸 찍었던 거야.”

김진후 비서실장이 내 머리채를 붙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상처를 입히고, 옷을 너덜거리게 만드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진짜 연기 판에 뛰어들면 이렇겠구나, 실감할 정도였어.

“그럼 오빠가 영원히 내 것이 될 줄 알았어.”

그러나 그 순간부터 강헌의 마음은 닫혀 버렸고 재희는 그 문을 다시는 열 수 없었다.

“죄책감이 사랑으로 변할 거라고 굳게 믿었어. 그랬는데…….”

다른 여자가 열어 버릴 줄은 정말로 몰랐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오빠를 속이지 않을 텐데. 그럼…….”

오빠는 내게 왔을까.

그 말을 끝으로 재희는 선영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

강헌과 재희의 스캔들 관련 기사는 모두 내려갔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향한 여론은 좋지 않았고, 특히 얼마 전 결혼한 강헌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런 여론을 볼 때마다 선영은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꼭 뵈었으면 한다는 선영의 메시지에 잠시 생각하던 강헌은 응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후원에 관해서도 그렇고 재희와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 애의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느니 차라리 선영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들은 진우가 안내해 준 세인트마리아 호텔 총수 일가 전용 객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본부장님.”

먼저 도착해 있던 선영이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호텔은 보는 눈이 많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하죠.”

차가운 그의 눈빛에 숨을 삼킨 선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본부장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선영이 답답했다.

흘깃 시계를 본 강헌이 입을 떼려던 찰나.

“전 재희를 정말로 사랑해요. 그 애가 가진 배우로서의 재능도 그렇고, 연약하고 순수한 면모도 그렇고. 그 애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친언니 같은 마음으로요.”

뜬금없이 서재희를 향한 마음 고백이라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의견이 정리되면 연락 주십시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는 도저히 그 애 옆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거짓말?”

“……예전에 재희의 그 동영상…… 말인데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진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날카로운 칼날에 붉은 실금이 그어질 것처럼 차고 시리다.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은 강헌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겁니까.”

“지, 지난번 본부장님께서 재희에게 관계를 정리하자고 하셨던 날에…… 재희가 술을 마셨어요.”

재희가 술을 마시다니.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었는데.

그만큼 자신의 말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털어놨어요.”

강헌은 이어지는 선영의 말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다 연기였다고.”

……연기? 뭐가?

‘그 모든 것’이 뭔데?

“회장님과 모종의 거래를 했대요. 본부장님을 옆에 두고 싶어서……. 그렇게 하면 본부장님이 자기를 사랑해 줄 것 같았대요. 떠나지 않을 것 같더래요…….”

결국 선영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훌쩍였다.

“처음엔 재희를 이해해 보려고 했어요. 애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얼마나 본부장님 옆에 있고 싶으면 그랬을까. 근데, 시간이 흐를수록 재희가…… 괴물처럼 느껴졌어요. 무서웠어요.”

선영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어 댔다.

하나 강헌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사고가 정지했다.

너무 놀라면, 지나친 충격을 받으면 몸이 굳어 버린다.

그것을, 강헌은 확실히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거짓말? 그 모든 것이 전부?

자신의 감정을 파괴하고, 정서를 파괴하고, 인생을 파괴해 왔던 그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씨앗이…… 거짓이었다고?

지어낸 것이었다고?

날 곁에 두기 위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도무지 옆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 애가 무슨 생각을 할까,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내내 긴장하며 경계하는 제 자신도 싫고, 본부장님도 너무 딱하고 안쓰러워서…….”

선영은 자신이 기조그룹 후계자를 딱하고 안쓰럽다고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의 죄책감이 당연하다 여겼고, 평생 재희에게 납작 엎드려 속죄해도 모자라다 여겼다.

속으로 저주를 하고 악담을 퍼부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그가 피해자였다니.

그간 재희가 제 몸에 닿기만 하면 희게 질린 낯으로 미안하다고 되뇌었던 강헌이 그토록 불쌍할 수가 없었다.

“사람 된 도리로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었어요.”

“……하.”

그가 밭은 숨을 내뱉자, 선영이 고개를 더더욱 깊이 숙였다.

“그간 정말 죄송했습니다. 흐윽, 그런데 더 미치겠는 건, 그렇다 해도 재희가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 겠는, 흐윽, 제 마음이에요…….”

선영은 인간 서재희가 무섭고 두려웠으나 배우 서재희가 추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적어도 연기를 향한 그 애의 열정은 진짜였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둘이서 의지하며 투지를 불태웠던 시간들을 부질없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이 양가감정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선영은 그저 울기만 했다.

강헌은 넋이 나간 채로 허공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서서히 분노가 깃들었다.

아니, 분노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기만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재희는 이 회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도구로 생각했을 뿐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 줄 도구.

자신을 정상으로 올려 줄 도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은 물론, 사빈까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흐윽, 지, 지금까지 술을 안 마신 이유가, 이런 얘기를 해 버릴까 봐 그랬대요. 재희는 자기가 말한 거, 기억 못 하는 눈치고요…….”

그때 선영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재, 재희예요. 제가 재희한테는 말 안 하고 에이전시에 사직서를 내고 왔거든요.”

강헌이 무감한 얼굴로 손을 내밀자, 망설이던 선영이 휴대폰을 건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재희의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박선영! 너 지금 어디야? 그만둔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 선영아, 갑자기 왜 이래. 응? 내가 뭐 섭섭하게 한 거 있어? 아님 페이가 너무 적어서 그래? 내가 요즘 오빠 때문에 너무 징징거렸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 응?

“…….”

- 선영아, 오빠도 나 배신하고 떠나서 힘든데 너까지 왜 이래. 응? 제발……. 버려지는 건 이제 못 견디겠단 말이야…….

“내가 뭘 배신했는데.”

갑자기 들려온 강헌의 목소리에 놀란 재희가 숨을 헉, 들이켰다.

- 오, 오빠? 강헌 오빠야? 왜 선영이 핸드폰을…… 왜 둘이 같이 있어? 아, 아냐, 일단 장소 알려 줘. 나 지금 갈게.

“지금까지 네가 날 속여 왔던 거. 그게 배신이겠지.”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가증스럽게 들린다.

“회장님과 거래를 했다면서.”

말문이 막힌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숨을 들이마셨다.

“그 동영상, 다 거짓이었다면서.”

- 오…….

“네 생애 최초의 연기였다면서, 그게.”

- 회, 회장님이 그러셨어? 오빠, 오해하지 마. 난 그저 회장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오빠가 다칠 것 같아서 그랬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회장님이…….

사실이었구나, 정말로.

자신이 아는 재희는 이토록 가증스럽고, 비열하고, 비겁하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도 순수하고 솔직한 애였는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강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재희를 향한 연민과 죄책감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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