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 회장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서훈 회장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잡아채는 목줄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곤 했다.
예전엔 재희였고, 이제는 사빈을 움직이려 할 것이다.
그러니 만나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사빈을 도구로 삼지 못하도록.
“가죠.”
강헌의 말에 사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가, 강헌 씨.”
“괜찮아. 내 옆에만 있어.”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검은 세단에 탑승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려서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조직폭력배 같은 행동 좀 안 할 수 없나. 기조그룹 이미지 쇄신을 위해 몇 억을 들이고 있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김진후 실장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시정하겠습니다.”
김 실장이 고갯짓을 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각자 차에 올랐다.
모두 탑승한 후에야 김 실장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강헌은 사빈의 어깨를 감싸 안에 타게 한 뒤, 자신도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다신 당신 다치게 놔두지 않아.”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강헌을 믿었다.
그들은 김 실장이 문을 열어 준 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는 내내 강헌은 사빈의 손을 꼭 쥐고 그녀가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도록 살폈다.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되어 있던 사빈은 그런 그의 보살핌에 서서히, 조금씩 몸에서 힘이 풀렸고 어느새 그의 어깨를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피곤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때 앞차가 끼어드는 바람에 차체가 조금 흔들렸다.
“운전. 더 조심히 하십시오.”
그녀가 깨지 않도록 강헌이 낮게 읊조렸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죄송합니다.”
차는 더욱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그들은 한남동 저택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사빈을 깨운 강헌이 그녀와 손을 붙잡고 가사 도우미의 안내에 따라 이 회장의 서재로 향했다. 그들의 뒤를 김진후 실장이 따랐다.
강헌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흘려들어. 그리고 날 믿어 줘.”
“그럴게요.”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빈이 작게 심호흡하자 강헌이 손깍지를 끼었다.
시선을 나눈 두 사람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
이서훈 회장은 드물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불쾌함과 언짢음, 분노였다.
“감히 그따위 말을 내뱉고 연락을 끊어!”
서훈의 눈동자가 강헌의 곁에 서 있는 사빈에게로 굴러갔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기는 했지만 며느리였던 아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서훈은 어쩐지 ‘며느리였다’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빈 씨와 이혼하지 않겠습니다.”
“네 처는 생각이 다르던데.”
사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강헌 씨와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 결연하게 말하더니. 왜, 뛰쳐나가 보니 기조그룹 며느리 자리가 꽤 괜찮던?”
“기조그룹 며느리 자리가 아니라, 강헌 씨 아내 자리를 놓을 수 없었습니다.”
강헌이 손을 더 꽉 잡아 오자, 사빈은 용기가 생겼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용기를 갖기가 무섭게 그것을 꺾어 버렸다.
“넌 더 이상 국회의원 천문호의 고명딸이 아니다. 그저 곧 추락할 의원의 조카일 뿐이지. 아무런 힘도, 지위도, 심지어 부모도 없는.”
“회장님!”
사빈이 괜찮다는 듯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얼굴을 구긴 강헌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이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했다.
“제 아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현 상태로서는 그 딴따라보다 사정이 더 안 좋지. 아무런 배경도, 연줄도, 돈도 없으니.”
서글프게도 이 회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빈은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버텨 내려 했다.
“어디서든 가장 위에서 군림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러기 위해서는 처가의 원조도 필요한 법이다. 무기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좋으니까.”
“뭐든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라지 않으셨습니까. 쓸데없는 것 여러 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것 하나만 가지면 된다고.”
분명 제가 한 말이므로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이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천문호 의원과 기조그룹을 한데 엮어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회장님만 엮어서.”
이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뭐라고?”
“회장님께서는 기조그룹의 이미지 쇄신을 원하시죠. 역대 가장 젊은 수장이 그룹을 이끌어 간다는 기사를 발표하면 어떻습니까. 가장 확실하게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을 겁니다.”
강헌의 말은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이 회장이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가늘게 떨었다.
“감히……!”
“주주들의 1/3은 저를 지지할 겁니다. 발언권이 강력한 몇몇을 포함해서. 그럼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받겠죠.”
“이강헌!”
“낡은 것보다 새롭고 젊은 것을 선택하는 법이라고, 그러니 혁신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것은 회장님입니다. 지난번 캐나다 VCC사와 장비 장기 공급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제 능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강헌이 가볍게 말을 내뱉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정말로 제 목을 물어뜯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날카롭던 강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
“조부님과 조모님의 사치스러운 취미와 지나친 엘리트주의로 인해 여론이 악화된 이후로 지금까지 기조그룹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왔습니다.”
“으음…….”
“비리로 얼룩진 국회의원을 잘라 내고, 그들에게 학대당하고 피해를 입은 이를 여전히 며느리로 받아들이며 보듬는다면 기조그룹과 회장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번에 달라질 겁니다.”
강헌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학대를 당했다느니, 피해를 입었다느니 하는 가벼운 표현으로 사빈을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장을 설득하려면 직설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해야 한다.
부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믿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업의 고정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한들 성과는 미미하고,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어 있죠.”
맞는 말이었기에 이 회장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강헌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빈 씨를 받아들임으로써 회장님께서 얻게 되는 이익은 무척 클 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이 회장은 안하무인이라는 기존의 기조그룹 이미지를 탈피하고 친근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바꾸기를 원했다.
하지만 몇 년째 사회 활동과 복지 재단을 통한 후원, 광고에 공을 들여도 결과가 미미했고, 번번이 이미지가 좋은 라이벌 그룹에 밀려 계약을 따내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라이벌사인 UM그룹의 총수는 검사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리를 저지른 거물 정치인을 가차 없이 탈탈 털어 결국 감옥으로 보낸 후.
경영 일선에 서게 된 그는 청렴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로 기업 이미지와 가치를 몇 배나 끌어올렸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기술은 기조전자보다 약하지만 이미지가 좋다는 이유로 정부가 주관하는 프로젝트의 시행사로 임명이 되었다.
후계자 시절부터 UM의 총수와 비견되던 이 회장으로서는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천문호는 UM의 회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 의원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진다면 분명 UM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기조그룹 이미지는 올라갈 겁니다.”
“네 처를 받아들인다면, 말이지.”
“……그렇습니다.”
톡. 톡. 톡. 검지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길어진다. 고뇌에 빠졌다는 뜻이다.
톡. 마지막으로 테이블에 닿은 검지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이 끝났단 신호다.
“세인트마리아 호텔 오너 일가와 친분이 있다지.”
이 회장의 시선이 사빈에게 향했다.
“……네,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입니다.”
‘친하게 지내던’이라는 말이 강헌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그 호텔은 가치와 의의가 무척 높다. 첫 번째로 지어진 호텔이 얼마 전 폐업했으니 이젠 세인트마리아가 가장 오래되었다 할 수 있지. 난 그곳을 기조그룹 산하에 두고 싶다.”
사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경영진과 직원들은 그대로 둘 거다. 그저 그 호텔의 이미지를 기조그룹에 흡수하고 싶을 뿐이야. 네가 거기서 큰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면 내 너를 인정하마.”
“저, 저는…….”
“못 하겠니?”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 너무 갑작스러운…….”
“해 보겠습니다.”
사빈의 대답에 이 회장이 호오, 하며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
“사빈 씨.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강헌 씨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못 할 게 없어요.”
결심한 듯한 그녀의 얼굴에 강헌의 가슴이 찡, 하고 크게 울렸다.
“다만 약속해 주세요, 회장님. 경영진과 직원들은 그대로 두겠다는 말씀, 꼭 지켜 주세요. 그럼 해 보겠습니다.”
“건방지구나. 이런 상황에서 내게 딜을 걸다니.”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던 이 회장과 사빈.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듯 곁에 서서 손을 붙잡고 있는 강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된 분위기가 얼마간 이어졌다.
강헌과 맞잡고 있는 사빈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천문호 의원이 몰락해도 얼마든지 복권할 수 있다. 기조그룹이 돕는다면.”
“그, 그게 무슨…….”
이 회장은 사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조그룹의 힘은 강하다. 정상에 있는 것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반대로 바닥을 기던 걸 정상으로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지.”
이 회장이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리고 손깍지를 꼈다.
“대표적인 예가 서재희, 그 물건이다.”
이 회장은 강헌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계속해서 목줄이 필요했고, 그게 재희든 사빈이든 별 차이 없었다.
“그것을 늘 잊지 말거라.”
그 말은, 사실상 사빈을 받아들이겠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사빈의 호칭에도 이 회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 나가 봐라. 나머진 김 실장 통해 전달하지.”
서재의 문을 열고 사빈이 먼저 나갔다. 뒤따라가려던 강헌이 멈칫하더니 다시 이 회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일전에 사빈 씨와 수안구 자택에서 이혼에 대해 얘기를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 어떤 의미입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재희를 만나 보았냐고 물으시고는 ‘이번에도 잘 속인 모양이다.’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이 회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깥에 서 있던 김진후 실장과 사빈마저 흠칫하며 놀랄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글쎄. 그거야 그 물건에게 물어볼 일이지.”
만면에 웃음을 띤 이 회장이 강헌에게 말했다.
“이강헌. 너는 이제 네가 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혈육은 저 하나뿐이니 손대지 못할 것이고, 이제 경영 실무도 어느 정도 익혔으니까.”
굳이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강헌은 정말로 그렇게 여기고 있던 모양이다.
건방진 놈. 이런 면까지 저를 빼다 박았다.
“잊지 마라. 난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