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강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차분히, 그리고 괴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사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강헌 씨가 그렇게…….”
“재희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그 애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덧붙이는 말에 사빈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그건 강헌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는 말없이 사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내가 전화만 받았어도 그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강헌 씨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아무도 강헌 씨를 비난할 수 없어요.”
사빈은 참 신기한 사람이다.
그녀의 말에, 그간 그를 아프게 찌르던 재희를 향한 죄책감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의 칼끝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혼자서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죠.”
“…….”
“이젠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그간 힘들었던 시간들 모두 사빈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나 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다독이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사빈이라는 것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강헌은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사빈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던 사빈은 아, 하고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고쳐 떴다.
“해남으로 오기 전 아버님께서 집에 오셨었어요. 가시기 전에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는데.”
“어떤?”
“서재희 씨를 만났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하니까 ‘이번에도 잘 속인 모양이군.’이라고 하셨어요.”
무슨 뜻일까? 이번에도 잘 속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강헌도 마찬가지였다.
쉬이 넘길 말은 아니었으나, 우선 지금 이 순간만은 서로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줘.”
그들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길고, 뜨겁고, 깊은 키스였다.
강헌은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가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사빈은 방금보다는 덜 아파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또 한 번 이어진 열락의 끝에 두 사람은 깜빡 잠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단잠을 자는 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
사빈이 강헌과 함께 카페 ‘트라몬토’로 향한 건 늦은 오후였다.
가장 안쪽 벽에 붙어 있는 엄마 아빠의 사진과 글씨를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아빠가 찍은 흰 꽃과 엄마가 적은 글귀에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 느껴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부모님이라면 사고로 인한 고통보다, 어린 딸을 혼자 두고 가는 것에 대한 고통이 더욱 컸을 것이다.
‘엄마. 아빠.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
사빈은 손으로 사진을 쓸어 보았다. 그것이 부모님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살게. 엄마 아빠 몫까지 행복하게, 즐겁게 살게. 그러니까 나중에 만나면 칭찬해 줘. 잘 살았다고. 장하다고. 꼭 웃으면서 반겨 줘.’
사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슬픔이라기보다는 기쁨과 후련함이 더 컸다.
드디어 부모님의 흔적을 찾았다.
제게 남긴 것은 그저 기억뿐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카페 주인의 말을 들어 본바,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부모님은 무척이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로 됐다.
그것만 기억할 것이다. 엄마 아빠는 마지막에 행복했었다고.
눈물을 닦은 사빈은 뒤에 서서 가만히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는 남편에게로 향했다.
“얘기는 끝났습니까?”
“네에…….”
사빈은 다시 되돌아간 존댓말에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강헌이 목을 가다듬었다.
“부모님 앞이니까.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싶어서.”
그녀의 시선에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놓을 때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아버님, 어머님.”
멋쩍은 표정을 짓는 강헌을 바라보던 사빈이 풋, 하고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강헌 씨. 참 귀여워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사빈 씨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저밖에 없어야지요.”
그 말에, 사빈을 빤히 바라보던 강헌이 마른세수를 했다.
“왜 그래요?”
“잠시 생각을 좀.”
“어떤 생각인데요?”
“……부모님 앞에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 강헌 씨!”
“묻기에 대답한 것뿐입니다.”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싼 강헌이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빈 씨를 제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스물셋의 저를 위로해 주신 것도.
진호와 혜원의 사진과 글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좀 더 위태로웠을 것이고 한 점 빛도 없는 흑백이었을 것이다.
‘나아갈 힘을 주셔서, 그리하여 사빈이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평생 사랑하며 아끼겠습니다.’
눈을 감고 사빈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전한 강헌.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사빈은 뭉클한 얼굴이었다.
[사빈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전자는 이루었으니 후자를 이룰 차례였다.
‘엄마 아빠, 저희 잘 살게요. 지켜봐 주세요.’
두 사람은 사진과 글귀를 떼어 내 주인이 준비해 준 봉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자, 바깥 테이블에 앉아 있던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전, 강헌이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두어 시간 동안 카페를 대관할 수 있겠냐고 양해를 구하자 주인은 흔쾌히 허락하며 아예 그들이 방문한 순간부터 영업을 종료해 버렸다.
“간직해 주셔서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사빈이 고개를 깊이 숙이자 카페 주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날 하루 본 것뿐인데 이상하게 아직도 눈에 선해요. 따님 보니까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네. 이렇게 예쁜 딸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자식이 있는 입장이라 그런지 주인은 마치 이웃처럼, 친구처럼 슬퍼해 주었다.
“사진하고 글은 잘 가지고 나왔죠?”
“네. 정말 감사합니다.”
“대화하는 중간중간 딸 얘기를 그렇게 했었어요. 우리 아기 잘 있을까, 우리 천사 재밌게 놀고 있을까, 하면서.”
어깨를 붙이고 가까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분의 모습이 그려져서 목이 메어 왔다.
강헌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팔을 쓰다듬었다.
그의 위로에, 사빈은 눈물을 꾹 참고 웃어 보였다.
‘이제 그만 울고 웃을 거야. 엄마 아빠랑 약속했으니까.’
“앞으로는 행복하게 살아요. 부모님이 잘 돌봐 주실 거예요.”
“……네. 종종 오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둘이서도 오고, 나중에 아이 손 붙잡고도 와요. 생과일주스 맛있게 갈아 줄게.”
주인의 말에 사빈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강헌의 눈가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두 사람은 주인이 대접하는 커피를 마시며 노을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옆 테이블에 부모님이 앉아서 함께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헌이 손을 꼭 잡아 왔다.
***
다음 날도 두 사람은 카페 트라몬토로 향했다.
부모님은 카페 주인의 소개로 알게 된, 약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납골당에 모시기로 했다.
카페 주인이 그곳 사장과 막역한 사이라 곧바로 안치될 수 있도록 신속히 조치를 취했다.
전문가의 손길에 의해 조각과 뼛가루가 섬세하게 분리되어 희고 깨끗한 유골함에 담겼다.
“아휴, 어떻게 이렇게 관리를……. 두 사람 분골을 섞어 놓은 건 또 처음 봐요.”
큰아버지 댁에서 간신히 손에 넣었다는 정도의 설명만 하자, 관계자가 혀를 찼다.
“자식한테 바로 넘겨주지도 않고 분골도 섞어 놓고. 모르긴 몰라도 그 집 자식들 신수가 앞으로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러게나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천벌을 받아도 모자라지.”
사빈이 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엄마 아빠도 더 편히 쉴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자식이 이리 좋은 곳에 모셨으니 앞으로는 마음 편히 잠드실 거예요. 우리 고객님도 잘 되실 거고.”
카페 사장이 사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여기 우리 시댁 어른들도 모신 곳이에요. 내가 들를 때마다 인사하고 잘 살펴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해남에 사는 친척이다, 생각하고. 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을 맞잡은 사빈과 카페 주인을 바라보는 강헌의 표정은 노을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조만간 다시 해남에 내려올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올라가고. 응?”
배웅을 받은 두 사람은 파라다이스 리조트로 향했다.
정문에는 검은 세단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강헌의 차가 들어서자마자 차 안에서 누군가 내리더니 그들에게 다가왔다.
김진후 비서실장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사빈은 숨을 흡, 들이켰고 강헌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감쌌다.
차창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본부장님.”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회장님께서 두 분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들의 차 뒤에 검은 세단 한 대가 가로막듯 서 있었다.
‘도망은 꿈도 꾸지 말란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