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사빈아.”
엄마가 웃으며 자신을 부른다.
“우리 딸.”
그 옆에 선 아빠가 손을 흔든다.
반가움과 서러움에 사빈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굳어 버린 몸은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는다.
저리로 달려가야 하는데.
엄마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더는 이 춥고 사나운 세상에 홀로 있고 싶지 않은데.
“사랑해, 우리 천사.”
나도 사랑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눈물만 계속 흘러내린다.
“더 놀다 와. 즐겁고 행복하게. 우리는 나중에 만나자.”
싫어. 지금 만나고 싶단 말이야.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엄마 아빠한테 와.”
엄마 아빠가 점점 희미해진다.
“여기에서 우리 딸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사라져 버렸고 사빈은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또, 혼자 남겨졌어.
온몸을 격하게 떨며 울고 있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이 있었다.
그 손은 사빈의 몸을 감싸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크고 따뜻하다.
사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
그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쿵. 쿵. 쿵.
동시에 어디선가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지?’
스르륵.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빛이 안으로 쏟아졌다.
밖에서 누군가 객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직원이 온 모양이었다.
“……하아.”
눈가를 비비던 사빈은 손에 묻어나는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꿈에서 엄마 아빠를 봤다.
살아 계실 때처럼 부드럽게 웃고 계셨다. 괴롭지 않다는 듯이. 평안하다는 듯이.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이.
‘괜찮아. 난 괜찮아.’
짧게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한 사빈이 네, 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하아, 하…… 사빈 씨.”
강헌이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제 남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정말 남이 되어 버리고 말 남자가.
크게 벌어진 새까만 동공은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언제나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은 살짝 벌어진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는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다급하고 절박해 보였다.
제게 붙박인 검은 동공에선 간절함까지 느껴졌다.
사빈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착각을 할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갈구하는 것만 같다고.
“……여긴.”
잠에서 깨기도 했고, 또 잠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울었던 터라 사빈의 목소리는 아주 낮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자신의 속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
“이혼에 관한 건 회장님과 얘기 끝났어요. 앞으로는 대리인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으면 해요.”
“……사빈 씨.”
쿵. 그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만큼이나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가슴이 저며 왔다.
사빈은 입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이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야.
나와 이혼한 뒤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할 남자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사랑합니다.”
사고가 멈추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사빈은 고개를 홱 돌려 강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눈을 뗀 적 없던 것처럼.
“뭐……라고요?”
잠긴 사빈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뭐라고 했어요, 방금?”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눈동자 색이 순간 더 짙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
어이없다는 듯 짧은 조소를 터뜨린 사빈이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우스워요?”
눈에 눈물이 고이려고 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런 말 몇 마디 해 주면 껌뻑 넘어갈 것 같았어요?”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 잘 해 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보였어요?”
속에서 자꾸만 울컥울컥 눈물이 올라와서 목이 메었다.
“가진 것 없이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이니 조금 다정하게 대해 주면 당신 맘대로 움직여 줄 것 같았어요?”
“사빈 씨.”
“착각하지 말아요!”
감정이 격해졌다. 그를 노려보는 사빈의 눈 흰자위에 붉은 실핏줄이 올라왔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끝에만 살짝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가 되어 줄 생각이 없으니까.”
결국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번 터진 둑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이번엔 또 뭐가 필요해서 이러는데요? 서재희 씨와의 스캔들을 덮으려면 아직 사이좋은 부부인 척해야 해서 이래요? 기조그룹 이미지 때문에?”
만약 그런 거라면, 너무 잔인하잖아.
재희의 말이 떠올랐다.
[오빠는 내가 상처받는 걸 가장 두려워해요. 날 보호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사람이에요.]
제 연인을 위해서라면, 이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다.
감정을 속이는 것도, 연인이 아닌 여자에게 밀어를 속삭이는 것도.
사빈은 눈물을 뚝뚝 흘려 대면서도 강헌을 노려보는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여린 몸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는 그녀가 안타까워서.
저를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찬 눈빛이 아프고 쓰려서.
“……당신을 보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부정하고 싶었고, 부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강헌은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앞에 섰다.
붙잡고 있던 문을 놓자 쿵, 하고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요.”
사빈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고요!”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 목을 긁으며 내뱉는 것처럼 경계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안타깝고, 애달팠다.
강헌은 심장에 이는 격렬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사빈은 평생 이 통증을 느끼며 살아왔겠지.
그리 생각하자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왜 진작 사빈에게 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뼈아픈 후회가 일었다.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다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을 보게 된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사빈의 동공과 마음이 동시에 흔들렸다.
넘어가지 마, 넘어가면 안 돼.
이강헌 씨는 사업가고,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야.
강헌에게마저도 이용당하고 버려지면…… 더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강헌 씨가 이럴 때마다 미칠 것 같아요.”
그가 흠칫하며 얼어붙었다.
“돌아 버릴 것 같다구요…….”
사빈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제발 가세요.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 보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누군가 심장을 쥐어 터뜨리는 것만 같은 격한 고통이 일었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요.”
강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사빈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으니까.
“그동안 고마웠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뒤돌아선 그녀가 침실로 향하려 한 걸음을 막 뗀 순간.
강헌이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사빈의 발이 뚝 멈췄다. 가야 하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천사빈, 당신뿐이야.”
그녀가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남자는 끝까지 잔인하다.
이렇게 제 머리에, 가슴에 기어이 스스로를 깊이 새겨 버린다.
그의 단단한 품과 다소 높은 몸의 온도, 진한 우디 향에 감싸이자 마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제 나는 어떡하라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흑…….”
참고 또 참아 봤지만 기어이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만다.
강헌은 그녀를 더더욱 힘주어 안았다.
“당신을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귓가로 스며드는 그의 음성에 가슴속 어딘가가 저릿하게 울렸다.
“후회했습니다. 더 일찍 말할걸. 그랬다면 당신의 슬픔을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하고.”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너무, 너무…….
“……늦었어요.”
“사빈 씨.”
“그럼 서재희 씨는요? 이강헌 씨 연인은 어쩌고요!”
“재희와는 단 한 번도 키스도, 섹스도 한 적 없습니다.”
사빈의 젖은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애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희가 원하는 대로 연인 행세를 했던 거고. 그 애와 나는 단 한 번도 연인이었던 적 없었습니다.”
“……거짓말.”
사빈이 제 몸을 포박하듯 감싼 그의 팔을 뿌리치고 뒤를 돌았다.
“이제 와서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어 줘요. 맹세코 사빈 씨에게 떳떳하지 못한 짓 한 적 없습니다.”
평소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에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는 정말로 잔인하다.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누가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서재희 씨는 이강헌 씨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다고 했어요. 자신에 대한 오빠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빈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강헌 씨를 못 믿겠어요.”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특히 이 남자에게는.
“돌아가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믿겠습니까.”
“…….”
“다 포기하고 당신에게 가면 됩니까?”
“뭐, 뭐라고요?”
“아까 기조그룹 이미지 때문에 이러느냐고 물었지.”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제가 가지고 누렸던 모든 것, 내놓겠습니다.”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상대편은 바로 이서훈 회장이었다. 사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빈 씨와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 아시고 처리해 주십시오.”
- 이강……!
강헌은 제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곧바로 끊임없이 벨이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고 오직 사빈만 바라보았다.
“이강헌 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기조그룹 이미지 지키자고 이러는 것도,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천사빈 옆에 있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납니다.”
저벅저벅 다가간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절절한 음성에 저항하려던 사빈의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사랑해. 내 모든 걸 다 내버릴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