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툭. 투두둑.
눈물이 끝없이 떨어졌다.
누군가 물주머니가 차오를 때까지 꼭 붙잡고 있다가, 별안간 확 놓아 버린 것처럼.
“천사? 우, 울어?”
손등으로 아무리 눈가를 닦아 보아도 두 뺨은 계속 젖어 갔다.
당황한 진우는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서자마자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서 사빈에게 건네주었다.
“사빈아, 이걸로 눈물 닦아. 응?”
끅끅, 어린애처럼 울며 진우의 옷을 받아 얼굴을 묻은 사빈의 온몸이 잘게 떨렸다.
울지 마, 라고 위로하려던 진우는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마음껏 울어. 울고 싶은 만큼 실컷.”
그 말에 사빈의 울음소리와 떨림이 더욱 커졌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쩐지 진우는 이편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사빈이 해남에 도착한다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차에 탄 이후로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공허했다.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운전을 하는 도중에 계속 힐끔힐끔 그녀를 곁눈질했다.
혹여 눈을 떼는 사이에 사라지면 어쩌나 싶어서.
강헌도 지금 이런 마음일 것이다.
아니, 자신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애타고 미쳐 버릴 것 같겠지.
오죽하면 그 남자가 제게 먼저 전화를 걸어 부탁한다고 했을까.
그렇게 사빈의 울음소리를 품은 차는 계속해서 해남으로 내려갔다.
도착했을 땐 이미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처음 오는 장소이지만 애틋함과 안타까움, 아련한 감정이 몰려왔다.
엄마 아빠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곳.
바람은 부모님의 숨결처럼 느껴졌고 바다의 짠내는 그들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엄마. 아빠. 사빈이 왔어요.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우리 딸은 천사가 가져다준 열매야.]
[그게 모야?]
[아주 아주 사랑스럽다는 뜻이야.]
웃으며 엄마의 품에 안기면 백합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났었다.
그 향기를 자꾸만 맡고 싶어서 계속 안아 달라 투정을 부린 적도 많았는데.
그럼 아빠는 ‘엄마 힘드니까 아빠가 안아 줄게.’라며 자신을 받아 들었다.
아빠에게서는 햇빛과 나무의 냄새가 났는데,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아서 사빈은 순순히 아빠의 품으로 옮겨 갔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사빈은 해남 곳곳을 눈에 담았다.
“저기가 외삼촌이 운영하시는 리조트야.”
해남 파라다이스 리조트는 전 객실 오션뷰로 유명한 곳이라고 진우는 말했다.
“가장 높고 좋은 방으로 빼 달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있어.”
이곳에 오기 전, 호텔에서 사빈은 진우에게 해남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땅 끝 마을에는 왜 가냐며 진우는 놀라 물었고, 사빈은 이유는 다 말해 줄 수 없지만 도와 달라고 머리를 숙였다.
진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양쪽 집안의 감시 때문에 해남으로 오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부족해서 사빈은 속으로 다짐했다.
진우에게 입은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그가 제게 무엇을 부탁하든, 자신도 발 벗고 나서겠다고 말이다.
“어, 저기 삼촌 나와 계신다.”
리조트 정문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진우만큼 키가 커다랗고 산적처럼 강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외삼촌!”
“어이! 또 무슨 사고를 쳤기에 해남까지 내려왔어? 끽해야 남해더니.”
그때 태정의 눈동자가 진우의 옆에 서 있는 사빈에게로 굴러갔다.
그는 조카에게 속삭였다.
“설마 사고 친 거냐?”
“아, 삼촌! 그런 거 아니에요.”
진우가 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너 그런 거짓말은 곧 들통난다.”
“진짜 아닙니다. 이쪽은 제 대학 후배 천사빈이에요.”
천사빈? 방금보다 태정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천문호 의원 딸? 누나가 자기 호텔에서 결혼식 올렸다고 그렇게 자랑을 했던?”
진우는 사빈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천사빈입니다. 진우 선배 대학 후배입니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아, 예…….”
태정은 진우의 목에 팔을 휘감고 상체를 낮추며 속닥거렸다.
“너, 설마 기조그룹 며느리랑 눈 맞아서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거냐? 삼촌은 발 뺄란다. 너, 까딱하다간 집안 사업 다 말아먹을 수도 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 방 안내 좀 해 줘요, 삼촌. 천사 피곤할 거야.”
“너 이노무 시키, 천사라고 애칭까지 만들어 부르면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름이 천사빈이니까 별명이 천사. 오케이? 삼촌, 정문 넘어온 순간부터 손님은 왕이라면서. 왕을 이렇게 세워 둬도 되는 거야?”
크흠. 목을 가다듬은 태정이 다시 뒤를 돌아 사빈을 보았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우리 진우 손님이니까 내가 직접 안내하죠.”
“감사합니다.”
사빈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태정은 그들을 가장 높은 층, 가장 넓은 객실로 안내했다.
“여기서 원하는 만큼 지내다 가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그럼 편히 쉬어요.”
“쉬고 있어, 천사. 난 삼촌하고 얘기 좀 하고 올게.”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객실 밖으로 나왔다.
“삼촌. 엄마랑 이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아 줘. 부탁드릴게요.”
“흐음.”
“진짜 리조트에 피해 안 가도록 할게. 네? 급해서 그래요. 그럼 나도 삼촌이 술 마시고 이모네 호텔 비밀 통로 자물쇠 부순 거 계속 입 다물게.”
“이야, 내가 조카 하나 잘 뒀다, 응? 삼촌 협박까지 하고 말이야.”
진우가 태정에게 머리를 숙였다.
“부탁해, 삼촌. 저 애, 까딱하다간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이야.”
이거 참. 태정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대답한 줄 알게요. 난 사빈이랑 얘기 좀 하고 서울 올라갈 거야.”
“서울로 올라간다고?”
“그래야지.”
사빈이 자신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무슨 얘기가 나돌아 다닐지 모르므로 진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해야 했다.
“알았다.”
진우가 다시 사빈이 있는 객실 안으로 들어간 후.
태정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누님. 방금 애들 도착했는데.”
- 어디 못 가게 잘 잡아 놔. 나랑 통화한 거 눈치챈 건 아니지?
“누님도 참. 내 연기력 모르슈? 근데 기조그룹은 그렇다 치고. 천문호 의원 쪽하고 척져도 되는 거요? 당 대표 당선 유력하다면서.”
- 더 강한 놈이 나타나면 그리로 가서 붙는 게 권력이야. 이거 터지면 천 의원은 당 대표는 고사하고 의원직 이어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썩은 동아줄을 왜 신경 써?
“누님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럼 기조그룹 아들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 나랑 대화 나눈 뒤에 곧바로 내려갔어. 한두 시간 후에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꽉 붙잡아 놔.
“근데 우리 리조트도 기조그룹하고 제휴 맺는 거 맞지?”
- 네가 실수만 안 하면. 그럼 난 바쁘니까 끊는다. 너 실수해서 천 의원 딸 놓치면 다 물거품이니까 알아서 잘 하고.
전화를 끊은 태정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착하게 보이던데.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을 보면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도와줄 의리는 없다.
‘사업이 우선이지.’
그래서 태정은 누나에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조그룹 후계자에게 사빈의 위치를 팔아서 이득을 취하는 길을 택했다.
이제 한두 시간만 잘 붙들어 놓는 일만 남았다.
***
“사빈아, 일단 눈 좀 붙여. 어젯밤부터 한숨도 안 잤잖아.”
거기다 울기까지 했으니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괜찮아요.”
마음이 급한 사빈은 어서 빨리 부모님을 편한 곳에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진우는 쉬이 물러나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체력이 있어야 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일단 눈 좀 붙여. 한두 시간만이라도.”
자신이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혼자 돌아다닐 게 분명한 사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어쨌든 삼촌한테 단단히 말해 놓고 가야겠어.’
진우의 단호한 표정에 사빈은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진우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될까요? 혹시…… 누가 찾아내기라도 하면…….”
이미 이모인 세인트마리아 호텔 사장과 강헌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오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진우는 저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호텔에서는 정보 새어 나갈 일 없을 거야.”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은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어. 틈틈이 전화할…… 아, 휴대폰 하나 마련해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삼촌이나 직원이 가져다줄 거야.”
준비해야 할 일이 많구나. 빨리 움직여야겠다.
진우는 사빈에게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객실을 나섰다.
혼자 남게 된 사빈.
잠깐 객실을 휘둘러보다가 발코니로 향했다.
멀리 펼쳐진 해변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차 진정된다.
‘엄마 아빠도 저 해변을 봤을까.’
사라락. 바람이 머리카락 몇 올을 건드리며 지나간다.
꼭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인사처럼 느껴져서 사빈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울지 말자. 힘내서 돌아다녀야지.’
엄마 아빠가 편하게 잠들 곳을 찾아야 한다.
사빈은 가방에서 휴대폰, 그리고 어제 이 회장과 대화를 나눈 뒤 편의점에 들러 샀던 핀을 꺼냈다.
유심칩을 꺼내 망가뜨리고, 변기에 넣을 계획이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니 이러면 위치 추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괜찮겠지?’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전원을 켠 사빈.
부재중 통화 기록과 여러 개의 메시지가 와 있다.
어플 위에 떠오른 숫자를 바라보던 사빈.
휴대폰을 끄기 전, 채팅창 가장 위에 떠 있는 강헌으로부터 온 메시지 일부가 눈에 보였다.
[꼭 할 말이 있습…….]
이혼에 관한 얘기겠지.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망설였지만 끝끝내 보지 않고, 곧장 알람을 설정한 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손이, 눈이 자꾸만 휴대폰으로 향한다.
강헌이 보낸 메시지가 궁금해서.
부재중 기록에 그의 이름이 몇 번이나 떠 있을지 궁금해서.
그 횟수만큼 나를 생각했다고 믿고 싶어서.
“……후우.”
이따가 새 휴대폰을 받고 나면 미련 없이 버려 버리자.
그리 생각하며 사빈은 이따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외출할 수 있도록 샤워를 한 뒤 다시 옷을 입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하얀 시트의 촉감이 무척 좋아서 단잠을 잘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 강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