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이 회장과 대화를 나눈 후, 수안구 자택에서 상자를 챙겨 나온 사빈은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대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호텔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랐는지 잠깐 침묵하던 진우.
- 일단 우리 호텔 근처까지 와. 사거리에서 정문으로 곧장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 공원 품고 돌면 빈 공터가 있을 거야. 거기에서 기다려.
“……고마워요, 선배.”
- 다 오면 연락해.
“네, 그럴게요.”
- 운전 조심하고.
전화를 끊은 사빈은 진우가 말한 경로대로 이동했다.
진우는 공터에 미리 와 있었다.
“키 안에다 두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알아서 주차할 거야. 이쪽으로.”
사빈은 진우의 뒤를 따랐다.
차를 세워 둔 곳에서 약 100미터가량 떨어진 낡은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니 낡은 철문이 나왔다.
진우가 가지고 온 열쇠로 자물쇠를 딴 다음 안으로 들어서자 긴 복도 같은 공간이 나왔다.
“오너 일가만 드나드는 통로야.”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이 호텔은 외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지으셨는데, 당시 첩보영화에 빠져 있었다나 봐. 그래서 이런 공간을 만드셨대.”
“정말요?”
“엄마랑 이모가 늘 말씀하셨거든. 그분께선 괴짜였다고. 재밌는 분이셨다네.”
“정말 재미있는 분이셨나 봐요.”
“아무도 생각 못 할 거야. 낡은 건물 밑에 호텔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을 줄은.”
가족에 대해 얘기하는 진우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선배.”
사빈은 앞서가는 진우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후배님 얼굴에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쓰여 있어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담긴 배려가 고마워서 사빈은 속삭이듯 작게 읊조렸다.
“……늘 고마워요, 선배.”
“알면 됐다. 천사빈 인생 잘 살았네. 이런 선배도 있고.”
“그러게요. 완전히 잘못 산 건 아니었나 봐요.”
앞서가던 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잘못 살지 않았어, 너. 지금까지 아주 잘 살아왔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멈춰 있던 사빈이 낮게 웃었다.
“고마워요.”
“자세한 걸 물으면 안 되겠지? 근데 솔직히 말하면, 알고 싶다.”
“…….”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지 않아? 난 너한테 이렇게 비밀 통로도 공개했잖아. 기업 기밀 새어 나갔다는 거 알면 엄마나 이모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그의 능청에 사빈은 힘없이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게서 웃음을 이끌어 내는 진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선배를 많이 좋아했지. 따뜻하고, 재치 있고, 배려심까지 깊어서.
하지만…… 진우에게 자신의 사정을 완전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나 기조그룹과 천문호의 집안이 얽혀 있는 일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자세한 얘기는 못 해 줘요. 더 이상 선배한테 폐를 끼치기 싫어요.”
단호한 말에 담긴 미안함이 느껴졌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시라도 들어 줄 사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귀 크게 열고 듣고 있을게.”
“……고마워요.”
긴 복도를 걸어서 호텔 내부에 도착한 그들은 오너 일가 전용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누를 수 있는 버튼은 많지 않았다. 일반 객실, 디럭스룸, 세미 스위트룸, 스위트룸이 위치한 층의 버튼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우리 외증조할아버지 진짜 특이하시지? 여기에서 내리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각 층에 마련한 오너 일가 전용 객실 문 앞에 내릴 수 있어.”
사빈은 입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누구도 세인트마리아 호텔에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그들은 사빈의 뜻에 따라 일반 객실이 위치한 층에 내려 바로 보이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
“스위트룸이 부담스러우면 그 바로 밑으로 다운그레이드해 줄 수도 있어.”
“아뇨, 그냥 일반 객실이 좋아요. 고마워요, 선배.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진우는 사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단 오늘 일 때문만이 아니라, 전부터 널 보면서 생각했어. 저 작은 게 얼마나 큰 걸 끌어안고 있기에 저런 눈빛을 하는 걸까, 하고.”
부족함 없이 자랐을 사빈은 아주 가끔씩, 쓸쓸함을 넘어서 공허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기도 했고, 또 이유에 대해 가볍게 물어서는 안 된다고 진우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넌 대답해 주지 않겠지.”
사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걱정하지 마. 더 캐물을 생각 없으니까. 네 부탁대로, 혹 남편분께 연락이 오면 모른다고 대답할게. 그리고 외삼촌한테도 바로 말해 놓을 거니까 걱정 마.”
“정말 고마워요. 부탁 들어줘서.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네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천문호가 아무리 자신의 인간관계를 통제해도 진우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던 것처럼.
사빈은 그가 설계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고마워요, 선배.”
“고맙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지? 한 번만 더 하면 귀에 딱지 앉을 것 같아. 나 손님들 말 잘 들어야 한단 말이야.”
그의 너스레에 사빈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진우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이 방은 내가 전담 마크할 테니까.”
“네, 고맙…….”
사빈이 입을 안으로 말았다.
픽 웃은 진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그럼 가 볼게. 편히 쉬어.”
진우가 나간 뒤.
사빈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희고 깨끗한 천장 위로 강헌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래도 그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자. 깨끗하게. 할 수 있어.’
이혼하면 곧바로 해외로 떠날 것이다. 떠나서,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지난 기억과 감정은 모두 이곳에 묻어 두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흐윽…….”
몸을 옆으로 굴린 사빈은 이불자락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바다 좋아합니까? 이제부터 많이 가 보면 되겠군요.]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사빈 씨는 그래도 됩니다. 그러려고 한 결혼이니까.]
“엄마, 나 강헌 씨가 좋아…… 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반듯했던 시트에 깊은 주름이 질 만큼 사빈은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꼭 부여잡으며 끅끅 울었다.
“아빠…… 나 이강헌 씨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오늘처럼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강헌의 다정한 눈빛과 음성, 부드러운 손길과 따뜻한 품이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와 헤어지면 영영 볼 수 없겠지.
그는 행복을 찾아갈 것이고 자신은 평생 그를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또 혼자 남게 되는구나.’
지금만큼은 실컷 울고 싶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사빈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마음껏 울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안에 남은 감정과 미련을 모두 빼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진우는 지하에 있는 스파숍으로 내려가 실장에게 입단속을 부탁했다.
“이모 지시가 떨어져서요. 물론 실장님께서 잘 하시겠지만, 그래도 기밀 새어 나가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라고 하셔서.”
“물론 우리 스파숍 직원들 입단속은 단단히 하고 있지. 근데 다른 파트 직원도 본 모양이야.”
“뭐를요?”
“서재희 씨랑 이강헌 씨 말이야. 예전에 우리 호텔에 둘이 온 적이 있는 것 같아.”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이서요?”
“진우 네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인데. 두 분 결혼하기 전에 우리 호텔 로비 카페에서 선을 봤거든?”
실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날 백오피스 소속 직원이 먼저 도착한 이강헌 씨를 봤다나 봐. 그런데 카페가 아니라 비상계단으로 갔다지 뭐야?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호텔에는 배우 서재희도 있었다.
일본에서 온 영화 관계자들과의 미팅이 있었기 때문인데, 재희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그녀 역시 슬그머니 이강헌이 사라졌던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잠깐 전화를 받으러 가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섣불리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호텔의 생명은 보안 유지이기도 했고, 또 둘의 관계가 진짜든 가짜든 허위 사실 유포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높았으니까.
헌데 지금 와서 보니…… 아무래도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지난번 방문 때 서재희 씨 완전 이상했잖아. 그래서 그거랑 엮어서 말이 돌고 있어.”
“이거 새어 나가게 되면 호텔 망신이에요. 이모도 가만두지 않으실 거고요. 실장님이 잘 단속해 주세요.”
“그럼,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오늘 단도리 제대로 할 참이야. 사장님께 말씀이나 잘 드려 줘.”
“그럴게요.”
스파숍에서 나온 진우는 해남에도 리조트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외삼촌에게 걸었다.
지금 내려가니 가장 좋은 방 하나를 내어 달라는 말에 외삼촌은 별말 없이 그러마, 했다. 진우가 원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사고를 쳐 놓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어쨌든 통화를 마친 그는 사빈을 데리러 객실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사빈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사, 너 얼굴이……?”
사빈이 손으로 괜히 얼굴을 쓸며 시선을 피했다.
“울었어?”
“……아뇨.”
거짓말이라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붉게 부푼 눈가와 맹맹한 목소리는 누가 봐도 울고 난 사람이었다.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네, 가요.”
사빈은 곧장, 가방과 상자를 들고 나왔다.
***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 해남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천사. 해남에 있는 우리 외삼촌 호텔에서 푹 쉬어. 마음껏, 지겨워 죽을 때까지 있어.”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말만 하는 거 아니고 진심이야. 그걸로 네가 받은 상처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빈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진우에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자신의 곁에서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강헌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 남자는 그만 생각하자.’
과거의 한 장면으로 접어 두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머릿속 의지와 마음은 반대로 놀았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강헌의 얼굴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그의 체취, 음성, 눈빛.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와 사빈을 감쌌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등을 감쌀 때의 온기와.
그의 품에 안기면 들리는 낮은 심장 박동 소리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했던 시간이.
서서히 굴려져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래진 눈 뭉치처럼, 강헌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