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잔뜩 구겨지는 이 회장의 얼굴을 보고도 사빈은 여전히 이혼하겠다는 뜻을 물리지 않았다.
“내 말이 공갈인 줄 아는구나.”
“아뇨, 잘 이해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속인 대가로 저희 집안을 무너뜨리겠다고 하셨잖아요.”
사실 자유보다 더 얻고 싶었던 것은 천문호의 몰락이었다. 하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에게서 벗어나는 쪽을 택했던 건데…….
그와의 이혼의 대가로 사빈은 자신이 가장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강헌은 결국 헤어져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제가 저지른 일에 대가를 치러야지요.”
차분하다 못해 태연하기까지 한 사빈의 모습에 이 회장은 화가 나면서도 의아했다.
“두렵지 않은 게냐? 고명한 국회의원 딸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다. 지금까지 네가 누려 온 것들 모두 놓아야 할 거야.”
그 말에 고개를 숙인 사빈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바라는 바다.
‘천문호의 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집안사람들이 무너지는 꼴을 볼 수만 있다면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
끝까지 이혼을 택하는 며느리를 보며 이 회장은 허,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어째 아들과 엮이는 여자들은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하나는 강헌을 차지하려 안달이 났고, 하나는 강헌에게서 벗어나려, 제 집안을 무너뜨리겠다는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미 전부터 각오가 되어 있었던 사람 같구나.”
이 회장의 말대로 사빈은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덟 살, 천문호의 집에 거둬진 후부터 강헌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오늘까지.
“기조그룹의 며느리 자리를 포기한 대가는 쓰릴 거다.”
이 회장의 말에 사빈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혼 허락해 주신다면 천문호를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네 아버지 이름을……?”
어차피 이 회장도 곧 알게 될 사실이니, 차라리 지금 말하고 어서 이혼을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저는 천문호의 친딸이 아닙니다.”
이 회장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천문호의 죽은 남동생의 딸이고, 여덟 살에 입적된 이후로 학대와 방치 속에서 지냈습니다.”
“허…….”
“그들의 이미지 메이킹 도구로 키워져서 기조그룹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회장님을, 그리고 세상을 속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이 회장은 으음,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천문호를 무너뜨리는 것과, 강헌에게 붙을 이혼이란 꼬리표가 저울에 올랐다.
그 모습이 강헌과 닮아 있어서 사빈의 가슴에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한참의 침묵 후.
“……그랬군.”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천문호 의원은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될 거다.”
속고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부터는 상대를 우습게 보며 더욱 간 큰 짓을 벌이려 드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그까짓 이혼이란 꼬리표는 재혼을 하고 나면 사라진다.
사빈은 맞잡은 제 두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 회장님.”
호칭의 정정에, 이 회장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이달 내로 정리될 거다. 이쪽 요청에 네가 협조만 잘 해 준다면.”
아직 주식 지분을 나누어 갖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를 할 만큼 충분한 결혼 생활을 한 것은 아니기에 이혼은 수월할 것이다.
‘이제 정말 그와는 끝이구나.’
심장이 아프다. 쓰리고, 시리다.
“내일부터 나올 필요 없다. 더 이상 식구도 아닌 이에게 내부 정보를 보일 수는 없지.”
“……네,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마.”
이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이닝룸에 있던 박 여사가 얼른 나와서 배웅했다.
사빈도 그녀의 곁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살펴 가십시오, 회장님.”
“박 여사, 조만간 여기 정리할 거니까 준비해 놔.”
박 여사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순응했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사빈을 몇 초간 내려다보던 이 회장.
“그것을 만났느냐?”
“……네?”
“서재희 말이다.”
“아…… 네…….”
“보아하니 이번에도 잘 속인 모양이군.
그러더니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일까. 잠시 생각하던 사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숙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 간단히 짐 챙겨서 나갈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은사모님.”
입가에 힘을 주어 밀어 올린 사빈이 가방을 들고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베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종이 상자를 안고 나가려는데, 문득 강헌과 통화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찍힌 부재중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휴대폰을 꺼낸 사빈.
그런데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너무 많이 와 있었다.
강헌에게서 온 것뿐만이 아니라, 미술관 등 주변 사람들, 심지어는 대학을 졸업한 후 연락 한 번 한 적 없는 동기, 선배들로부터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은 죄다 연락을 한 것 같았다.
“뭐지……?”
그러다 사빈은 진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클릭했다.
[천사, 괜찮은 거야? 기사 보고 걱정돼서 연락해 본다.]
기사라니. 대체 무슨 말이지?
사빈은 미술관에서 자신의 비서를 맡고 있는 직원의 메시지를 열었다.
[부서장님, 현재 미술관 홍보팀과 기조그룹 본사 홍보팀, 이강헌 본부장님의 홍보팀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고 있습니다. 심려 끼치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해당 기사를 비롯하여 모든 사이트에서 게재 중단 요청 중입니다.]
밑에는 기사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클릭하면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사 타이틀을 보는 순간.
사빈의 심장이 이상한 리듬으로 뛰다가 이내 뚝 멎었다.
[배우 서재희와 기조그룹 이강헌의 관계는? 1분 만에 삭제된 사진 화제.]
밑바닥에 깔린 아주 얕고 옅은 희망마저 완전히 증발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제 숨기지 않을 작정이구나.
나와 이혼하면 이강헌 씨는 이제 그의 연인과…….
그녀의 안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작은 불빛이 툭, 꺼졌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를 보고 싶었다.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강헌에게 꼴사납게 매달릴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됐다.
다행이다.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서.
그녀는 힘없이 픽 웃었다.
안녕, 이강헌 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잠시나마…… 행복했어.
사빈은 그에게 닿지 못할 작별 인사를 남겼다.
***
마지막으로 그녀의 위치가 확인된 곳은 수안구의 자택이었다.
‘회장님과 대화를 나눈 후 침실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가셨다’는 박 여사의 말에 강헌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가 떠난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연락도 되지 않고, 자택을 끝으로 휴대폰 위치 추적도 되지 않았다.
사빈은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람이 없었다. 이전에 일했던 갤러리에서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고, 기조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학창 시절 친구도 없었다.
강헌이 아는 사빈의 지인이라고는 연진우뿐이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라서 그는 세인트마리아 호텔로 차를 몰며 곧장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연진우입니다.
“이강헌입니다. 혹시 사빈 씨와 함께 있습니까?”
-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남편은 이강헌 씨 아닙니까?
차갑게 되묻는 진우의 말이 뼈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시비를 받아 줄 틈이 없었다.
“……부탁합니다. 사빈 씨가 잘 있는지만 말해 주십시오.”
- 그러게 다른 여자와 스캔들 날 행동 하기 전에 아내에게 잘 하지 그랬습니까.
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진우의 말이 맞다.
자신이 다 잘못했다.
재희가 사빈에게 연락을 하지 않도록 진작 관계를 청산해야 했다.
자신의 마음을 더 빨리 전해야 했다.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적어도 이 회장과 사빈이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텐데.
심장이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빈 씨, 그쪽에 있습니까? 제발 말해 주십시오.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의 절박한 음성에 진우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휴대폰 너머로도 그의 고뇌가 느껴져서, 강헌은 숨을 죽였다.
- 서재희 씨와는 정말 그런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강헌은 즉답했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정이 있습니다. 맹세코 재희와는 사빈 씨 보기에 부끄러운 짓,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 연인이라고 보도가 되던데.
“허위 보도일 뿐입니다. 현재 홍보실에서 정정 보도 요청 중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빈 씨뿐입니다.”
그의 진심이 가닿았는지 진우가 어렵게 입을 뗐다.
-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강헌 씨에게 연락이 오더라도 모른 척해 달라고 했습니다.
‘……!’
휴대폰을 쥔 강헌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 전 사빈이와의 약속을 지킬 겁니다.
“연진우 씨!”
진우가 전화를 끊으려는 듯하여 그의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다.
“그럼 이 말만 전해 주십시오.”
- ……뭡니까?
“해남에 간 적이 있다고. 그곳에서 한 부부의 사진과 글귀를 본 적이 있다고. 그들이 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알고 있다고.”
진우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그저 그렇게만 전해 주면 알아들을 겁니다. 부탁합니다.”
강헌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에 뜸을 들이던 진우가 그러죠, 하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저 멀리 세인트마리아 호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
강헌과 통화 후. 진우는 그가 지금 얼마나 애가 타고 절실한지 잘 알 수 있었다.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남자는 이미 사빈의 남편이니까.
마음 깊이 간직하던 첫사랑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를 질투하며 견제했었으나.
이제 이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어야지, 싶다.
오늘 사빈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진우는 깨달았다.
그녀를 이토록 흔들 수 있는 것도 강헌뿐이고, 또한 풀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남편뿐이라는 것을.
또한 그들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해서 사빈이 자신에게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복도에서 통화를 끝낸 그는 한 객실 안으로 카드키를 찍고 들어갔다.
“통화 끝났어요?”
“응. 외삼촌이 말이 좀 길어서.”
그를 보자마자 사빈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가는 건가요?”
“응. 나가자.”
함께 방을 나선 사빈과 진우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반 고객용이 아니라, 호텔 오너 일가만이 사용하는 전용 승강기가 있는 곳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선배.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