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65)화 (65/90)

제65화

사진? 자신이 재희와 찍은 사진이 있던가?

기억을 돌이켜 봤지만 단 한 번도 없었다.

강헌이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사를 클릭하자 사진이 크게 나타났다.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강헌을 대각선 뒤에서 찍은 각도였고, 벽에는 재희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

대체 언제 찍은 거지.

셔터음을 들은 적도 없는데, 대체 언제.

강헌이 낮게 욕설을 내뱉자 비서실장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조치 취하십시오.”

그가 이를 으득 갈며 낮게 읊조리자, 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비서진과 홍보실 전원 비상대기였다.

강헌은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재희가 아니라 사빈에게.

기사를 보았을까.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의 진심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 ……다음에 다시 걸어 주십…….

하나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두어 번 더 걸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혹 기사 봤다면 무시하십시오. 그리고 전화 줘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강헌은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빈과는 달리 그 애의 목소리는 곧장 들려왔다.

- 오빠!

높게 튀어 오르는 목소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아서 강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재희. 너 그 사진 뭐야.”

- 아아, 그거…… 오빠 모르게 찍었지. 헤헤.

“웃어? 너 지금 웃음이 나와?”

- 못 웃을 이유는 또 뭐야?

하. 강헌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 어차피 회장님도 알고 계셔. 오빠랑 그 여자가 눈속임으로 결혼한 거 말이야.

“……뭐?”

- 어차피 언젠간 아셨을 거잖아.

“네가 말했단 말이야?”

- 응.

“서재희!”

포효에 가까운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재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해맑은 척을 벗어던지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데? 그럼 그 여자랑 오래오래 함께 살 작정이기라도 했어?

강헌이 통화를 종료하려던 찰나.

- 그 여자는 오빠 안중에도 없더라. 떠날 궁리만 하고 있던데.

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했어. 매일 사람들 눈 속이는 것도 지친다면서.

“사빈 씨와…… 만나기라도 한 거야?”

- 뭐라고? 오빠 초점은 거기에 맞춰지는 거야? 왜, 도대체 왜!

“말해, 만났냐고!”

- 그래, 만났어. 만나서 고맙다고 했어. 우리 사랑 지켜 줘서 고맙다고. 고생이 많다고.

“…….”

- 그러니까 그 여자, 웃더라. 별말을 다 한다고. 그러려고 계약한 거라면서.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유유자적 여행이나 하면서 살 거라고 했어.

흥분으로 새하얗게 바래진 머릿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이라.

재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빈이 재희에게 부모님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다.

- 그 여자는 오빠를 전혀……!

“재희야.”

거짓말처럼, 악을 쓰던 재희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이제 그만하자.”

- 뭘…… 그만하자는 거야?

“우리 관계가 끝나더라도 배우 서재희가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기조그룹은 계속해서 널 후원할 거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 오, 오빠. 미안해, 내가 피곤해서 그랬어. 그냥 순간 오빠 빼앗기는 느낌에…….

“이게 널 위한 길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오빠! 일단, 일단 만나. 응? 만나서 얘기하자.

다급하고 절절한 재희의 목소리에도 강헌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확고함을 읽어 낸 재희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 ……내 핑계 대지 마! 그 여자랑 있고 싶은 거잖아! 그때 오빠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난 아직도 지옥에서 사는데…… 오빠만 혼자 벗어나겠다고? 날 내버리고?

스물셋의 강헌이 해남으로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재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무 힘들다고. 만나서 위로받고 싶다고.

당시 강헌도 무척 지쳐 있었기에 미안하지만 재희의 연락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 회장은 ‘네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 회장의 충복인 김진후 비서실장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고 했다.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회장님께선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도련님.]

그렇게 말하며, 김진후 비서실장은 칼로 자신의 눈 옆을 그어서 이 회장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따금 마주치는 김진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강헌은 그날이 떠올라 구역질이 치밀었다.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특히나 이성이라는 이유로 재희는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죄책감 때문에 강헌은 재희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것이 이 애를 더 망치는 길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 나한텐 오빠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이대로는 우리 둘 다 지옥에서 살 뿐이야. 그리고…… 나도 사빈 씨가 없으면 안 돼.”

- 오빠, 제발…… 그만…….

“그 사람이 날 싫어한대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니까.”

- …….

“끊을게.”

여전히 재희를 향한 죄책감은 남아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은 홀가분했다.

동시에 사빈이 더더욱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계약 따위는 지워 버리고 자신과 진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온전히 그녀의 편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가족관계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누구의 딸이든 존중하고 사랑하며 아껴 줄 자신이 있다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녀를 향한 마음과 말이 넘쳐흘러서.

***

진해각을 나온 사빈은 직원에게 콜택시를 부탁했다. 

연계되어 있는 곳이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문으로 택시가 도착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도무지 그 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여덟 살부터 결혼 전까지 살았던 천문호의 자택을 집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 강헌과 살고 있는 그 고급스러운 단독주택을 집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 어느 곳도 사빈의 집이 될 수 없었다.

강헌으로 인해 간신히 치료되는가 싶던 절망감이 다시 사빈을 덮쳤다.

“수안동이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있던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수안구의 신혼집으로 향했다.

해남으로 내려갈 것이다.

엄마 아빠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곳에 뿌릴 생각이었다.

유골과, 그리고 오렌지색 일기장을 가져와야 했다.

그 집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개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강헌의 소유다.

수십 벌의 옷과 가방, 신발, 액세서리, 화장품도 죄다 그의 지시로 채워진 것들이었다.

부족한 것은 그때그때 사면 된다.

사빈은 떠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몇 달 후면 그와 이혼하기로 되어 있으니, 시기를 앞당기는 것뿐이다.

“…….”

강헌과 헤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콱 메어 왔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곧 이 통증도 익숙해질 것이다.

……그럴 수 있겠지.

수안구 자택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세 대의 검은 세단이 대문과 차고의 문을 막고 서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사빈이 다가가자, 가운데 차 조수석에서 눈가에 상처가 길게 난 김진후 실장이 내렸다.

“회장님께서 안에 계십니다.”

“아…….”

“들어가 보시지요.”

그는 찌를 듯한 눈으로 사빈을 보았다. 하나 이미 천문호를 견뎌 낸 적 있는 그녀는 그의 시선이 그리 버겁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들어가면 말씀하실 겁니다.”

김 실장을 지나친 사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박 여사가 그녀를 맞았다.

“작은사모님, 회장님께서 와 계십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이 회장의 머리가 보였다.

사빈은 가방을 든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오셨어요.”

“아가 왔구나. 앉거라.”

머리를 숙여 인사한 사빈이 이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며느리가 보고 싶지 뭐냐.”

이 회장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허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

“사빈아.”

“……네, 아버님.”

“난 말이다. 속아 넘어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이 회장은 박 여사가 내온 찻잔을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았을 때. 인생의 오점이 남겨지고 말았다.”

이 회장은 강헌의 얼굴에 남아 있는 그의 친모를 떠올렸다.

“최악이었지. 난 어떻게든 그 오점을 없애야 했다. 그리고 결국 내 뜻대로 이루었단다.”

유정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을 잃었지만 어쨌든 이 회장은 자신의 오점을 그룹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 지지부진한 과정을 겪고 나니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알게 되었지.”

“…….”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서. 서재희 말이다.”

사빈이 고개를 푹 숙이자 이 회장이 헛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탁. 그가 거실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강헌이와 이혼이라도 할 생각이냐?”

사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혼은 절대로 안 된다. 난 또다시 오점을 남길 생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도 사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너희 집안이 무너져도 좋단 말이냐?”

순간 이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찰나였으나 그는 분명히 보았다.

사빈의 눈동자에서 번뜩인 불꽃을.

“저희 집안을…… 무너뜨리겠다고 하셨어요?”

“그래. 내가 못 할 것 같니? 정치인의 권력이란 사람과 돈에서 나온단다. 기조그룹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래도 아가 너는 잘 모르는…….”

그때였다.

사빈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웃는 게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 하하…….”

말과는 다르게 사빈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꼭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사람 같았다.

짐짓 다정한 체하던 이 회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 죄송, 죄송합니다.”

사빈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강헌 씨와 이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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