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쿵. 재희의 심장이 떨어졌다. 절망이 그녀를 검게 물들였다.
이 회장도 알고 있는 것이다.
강헌의 마음이 사빈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아느냐? 집안? 학벌? 그 외 이력서에 줄줄이 늘어놓은 이력들? 아니다. 바로 눈빛이다.”
탁. 이 회장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물론 강헌이는 처음엔 널 보호하기 위해서 며느리와 다정한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빛은 속일 수 없지.”
재희의 머릿속이 윙윙, 어지럽게 울렸다.
“조만간 손주를 보게 될 것 같구나.”
“……!”
“축하해 주지 않으련? 그래도 한때나마 인연이 있었던 사이니.”
이 회장은 이미 자신을 지나간 인연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재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시 잔에 술을 따르는 이 회장을 보았다.
안 돼. 여기서 밀리면 끝이야.
“회장님께서는 까막눈 취급 받는 걸 가장 싫어하신다고 하셨죠.”
스륵. 술잔을 바라보던 이 회장의 검은 동공이 위로 올라갔다.
“며느님께서 제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쪼르르, 술을 따르는 소리가 뚝 멎었다.
“……뭐?”
“두 사람이 결혼을 할 때 계약을 한 모양이에요.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별채 안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사빈이가 저것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지금껏 그는 사빈이 강헌에게 첫눈에 반하여 결혼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 재희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강헌과 이혼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리라 판단했다.
해서, 두원그룹 차녀 대신 이득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천문호 의원의 딸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이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김진후 실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에 왼쪽 눈 옆에 길게 흉터가 나 있어서 웬만한 사람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그 흉포하기까지 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을 테지만, 지금 재희에게 김 실장의 경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천 의원 딸이 뭐가 부족해서.”
“자유를 원한다고 했어요.”
“자유?”
“두 사람, 곧 헤어질 거예요. 그 여자는 자유를 찾아 떠날 거고, 오빠는 제게 돌아온다고 했어요.”
긴 정적이 흘렀다.
“……허.”
낮은 실소를 흘린 이 회장이 별안간 재희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이…… 이혼이라도 할 거란 말이냐?”
재희는 두 사람의 이혼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인 것 같았어요.”
이 회장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감히 이혼을…… 이 이서훈이를 속여?’
쨍그랑-!
이 회장이 던진 술잔이 벽에 날아가 부딪쳐 원래의 모양을 잃고 산산조각 났다.
긴장으로 숨을 죽이고 있는 재희는 내심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이서훈 회장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을 무척 싫어했고, 결코 용서하지 않으며 반드시 응징했다.
지금껏 재희가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 회장이 ‘오늘 같은 자리’를 만들 때마다 그 자리에서 있던 대화를 한 톨도 빼 놓지 않고 이야기를 하여 나름대로 신뢰를 쌓은 상태였다.
“이혼. 내 며느리가 그런 깜찍한 생각을 했단 말이지.”
톡. 톡. 톡. 검지로 테이블 위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는 이서훈 회장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재희의 눈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그 말이 거짓일 경우. 네 인생은 진창으로 처박히게 될 거다.”
“지금껏 회장님께 거짓 보고를 드린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말 한 마디로 제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분이시니까요.”
재희의 장점은 자기 관리를 잘한다는 것과, 강헌에게 매달리는 것과는 별개로 제 위치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확실한 거냐.”
“네. 셋이서 만난 적도 있는걸요. 그 여자는 저희를 위해서 자리를 피해 주기도 했어요. 얘기를 나누라면서요.”
이 회장은 문득 과거에 강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해서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사빈 씨가 자신의 능력을 떨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기조그룹은 여타 재벌가와는 다른 진보적인 의식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그런 의미였군.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게다가 눈치 빠른 박 여사까지 제대로 속였다.
이 회장이 턱을 위로 젖히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재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차분히 대답했다.
“그 여자는 강헌 오빠의 약점이 될 수 없을 거예요.”
“…….”
“제가 더 확실한 목줄이 될게요. 오빠가 더는 회장님을 기만할 생각을 할 수 없도록.”
그 말에 이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전 오빠를 사랑해요. 괜히 회장님께 덤벼들었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재희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이 회장은 재희와는 다르게 사빈의 순진한 얼굴을 떠올렸다.
사빈의 그 무구한 눈빛과, 명문가로 이름이 드높은 그녀의 집안을 덜컥 믿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빈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늘 접대에는 실수가 없어야 할 거다.”
이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희도 따라 일어나 두 손을 모았고, 김진후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밑바닥에서 기어 본 것답게 제 살길은 참 잘도 찾아내는군.”
말을 마친 이 회장은 그대로 별채를 나섰고, 김진후 실장이 그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탁. 문이 닫힌 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당신도 한번 괴로워 봐. 그래 봤자 내 고통에는 절반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
재희가 찍어 준 주소는 삼청동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진해각.’
속으로 한정식집의 이름을 읽은 사빈은 한복을 입은 직원의 안내를 따라 별채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사빈은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는 결심했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앉아 있던 재희는 인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천사빈 씨.”
“……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식사는 알아서 시켜 놨어요. 여기 저녁 정식이 무지 맛있거든요.”
“……네.”
자리에 앉아 사빈과 마주한 재희가 싱긋 웃었다.
“꼭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감사 인사도 전할 겸.”
사빈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계약에 관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요.”
“아아, 네. 많이 바쁘시죠? 그럼 식사 나오기 전에 얘기할게요.”
머뭇거리던 재희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다 알아 버리셨어요. 오빠와 천사빈 씨의 결혼 계약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사빈이 충격으로 굳었다.
“아버님께서…… 다 아셨다고요?”
아버님이라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만간 보자고 하실 거예요.”
사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흔들리지 마세요.”
재희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회장님께 말리게 되면 사빈 씨는 평생 아이 낳는 기계 취급 당하면서 살게 될 거예요.”
아이 낳는 기계?
끔찍한 말에 사빈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쪽으로 슬쩍 눈길을 준 재희는 다시 사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되긴 싫잖아요. 자유를 원한다면서요. 그러니까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그럼 회장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시겠죠.”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데. 사빈은 입술을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오빠가 저를 지키려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요.”
그 순간.
사빈은 이 회장이 알아 버렸다는 말보다, 천문호가 알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말보다 방금 전 재희의 말에 더 깊게 찔렸다.
“천사빈 씨한테도 정말 미안해요. 괜히 우리 때문에 곤란해진 것 같아서.”
‘우리’라고 강헌과 자신을 엮는 재희의 말이 아프고 또 아프다.
저희. 우리. 이러한 말들로 묶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자신이 들어갈 틈 따위는 없었다.
사빈은 오늘 아침, 그의 위로에 설렜던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아니, 오늘 아침까지 갈 것도 없다.
아직도 미술관에 데려다주고 자신이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던 그를 떠올리면 심장이 아릴 정도로 좋았다.
출근할 때 전화를 통해 들은 말도 충격이지만.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곤란한 얼굴 어딘가 행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남편의 연인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희의 전화를 받고도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강헌을 제 마음속에서 몰아내려면 꽤나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 답답해졌다.
한편, 재희는 역시 강헌을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한 사빈의 눈빛에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대행인 주제에.’
그저 계약으로 맺어졌을 뿐인 비즈니스 관계인 주제에.
왜 저런 눈빛을 하는 거야.
“설마 오빠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죠?”
화살처럼 날아와 정곡을 찌르는 재희의 말.
순간 사빈은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잘 알고 있죠?”
“…….”
“우린 어릴 적부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어요. 세상에 오직 둘뿐인 것처럼. 나에 대한 오빠의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확신에 가득 찬 재희의 목소리가 사빈을 할퀴고, 찌르고, 베고, 뭉갰다.
“천사빈 씨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거예요. 그래도 귀한 집 따님인데 앞으로 남은 인생 제대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창백하게 질리는 사빈의 낯을 보며 재희는 만족스러웠다.
“오빠는 내가 상처받는 걸 가장 두려워해요. 날 보호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사람이에요. 그러니 마음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오빠가 천사빈 씨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른 시일 내에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진 말고요.”
숨이 잘 안 쉬어진다.
계속 이 방 안에 있다간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죄송하지만 식사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사빈은 비틀거리며 별채를 빠져나갔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재희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누구를 탐내는 거야.”
아름다운 배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광기와 집착으로 얼룩진 여자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남은 선물도 마저 주어야겠지.”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업로드 했다.
***
퇴근 시간.
강헌은 집에 늦게 올지도 모른다던 사빈의 말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업무를 더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중증이군.’
비서를 호출하여 사빈의 행방을 물어보려던 찰나,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보, 본부장님!”
하얗게 질린 비서실장의 얼굴에 강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사빈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서재희 씨와 본부장님의 기사가 떴습니다!”
비서실장은 황급히 강헌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청민당 천문호 의원의 사위 기조그룹 이강헌 본부장, 배우 서재희와 염문설.]
[서재희 비공개 SNS 유출 파문…… 유부남 재벌 2세와 밀애?]
[신비주의 톱스타 S양, 유부남 재벌 2세와 동거? 집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약 1분간 업로드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