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물론 지금처럼 배우 서재희를 지원할 것이다.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조그룹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보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하고 뒤틀린 연인 관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빈과 마음이 완전히 통한 것은 아니다. 하나 강헌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온 신경이, 머릿속이, 마음이 온통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었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었고, 닿고 있으면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재희에게 더욱 미안했다. 그 애 역시 자신을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테니.
그래도 더는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
재희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애는 자신의 변화에는 놀랍도록 예민하니까.
하나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애써 부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부쩍 제게 매달리는 것이겠지.
재희에게 자신은 죽을 때까지 죄인이다.
그때도, 지금도.
재희에게 또다시 죄를 짓게 되었지만 결정을 돌릴 수는 없었다.
평생 속죄하며 살리라.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본부장님, 천진호와 김혜원의 사망지가 해남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습니다.”
“해남…….”
해남이라. 그곳은 강헌에게도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스물셋, 후계자 교육에 지쳤던 강헌의 도피처이자,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곳.
어쩐지 제주도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붙잡힐 것 같아서 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닷새간 머무르며 강헌은 심적으로 위로를 받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경관을 보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고,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가만히 있어도 되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카페를 방문한 것이었다.
가는 길이 쉽지 않고 규모가 작아서 현지인만 아는 숨은 명소였다.
그 카페 안쪽 귀퉁이에는 사진과 글귀들이 붙어 있었다.
몇 년 전에 무명의 사진작가와 여행작가 부부가 해남으로 놀러 왔다가 남긴 것들이라고 했다.
강헌의 눈길을 강하게 잡아채는 것은 노을 지는 바닷가를 찍은 사진이었다.
한참 그것을 감상하다가 옆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메모지를 보았다.
이 낙조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분명 태양이 떠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환하게 밝혀서 다른 사람마저도 따뜻하게 비추는 태양이.
입적된 이후로 그는 스스로가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느껴서도 안 되는, 그저 승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글귀를 보는 순간 강헌의 마음에 뜨거운 빛이 떨어졌다. 제 안에서 응어리진 것들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르며 그는 사진과 글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지막 사진은 이름 모를 작고 흰 꽃을 찍은 사진이었다.
For my baby, angel bean
그들의 아기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사진이었나 보다.
이런 사람을 부모로 둔 그 아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페 주인이 말했다.
[사진이랑 글이 참 좋죠?]
[……예. 정말 좋습니다.]
[조금 더 살아 있었다면 유명해졌을지도 모르는데.]
카페 주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10년도 더 됐지 아마? 타지 사람들인데 여기로 뭘 취재하러 왔었나 봐요. 우리 카페에 들러서 저 사진이랑 글귀를 써 주고 가는데, 둘이 어찌나 인물도 좋고 선하던지.]
카페 주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데 다음 날 교통사고로 즉사했다지 뭐예요. 하루밖에 못 봤지만 내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그래서 사진이랑 글귀를 전시하기로 한 거예요.]
아.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구나.
그럼 두 사람의 아이는…… 고아가 된 건가.
그런 생각부터 들었고, 이내 얼굴도 모르는 그 애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신은 친부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 신기하게도 그날 하루 본 그이들 얼굴이 아직도 선명해. 그렇게 맑게 웃는 사람들은 처음 봤거든. 어쨌든 진지하게 감상해 줘서 고마워요.]
카페를 나온 강헌은 숙소까지 걸어가면서 내내 이름 모를 부부의 사진과 글귀를 떠올렸다.
일부러,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다 또 지쳐서 견딜 수 없어진 어느 날, 찾아가서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려온 지 닷새째 되는 날.
그의 짧은 휴식은 악몽으로 막을 내렸다.
이 회장이 보낸 사람이 자신을 찾아냈고, 재희의 동영상을 보여 준 날이었다.
그렇게 강헌은 지금까지 줄곧 마음을 죽인 채 살아왔다.
그러다 사빈을 만나 그녀와 함께 지내게 된 요즘, 마치 그날 사진과 글귀를 감상했던 때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오름과 동시에 위안을 받았다.
사빈과 해남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녀와 자신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숫자와 인과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이강헌이 ‘운명’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앞에 서 있는 비서가 제 머릿속을 읽는다면 기함할 것이다.
그러다 그는 멈칫했다.
부부의 사망지 해남.
10여 년 전 사망한 사진작가와 여행작가 부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강헌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혹시…….’
“본부장님?”
표정이 굳어지는 강헌을 보며 비서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해남 쪽을 면밀히 조사하세요. 그리고 그쪽에 가면 카페가 하나 있을 겁니다. 이름은 트라몬토. 카페 주인에게 물어보면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부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비서가 나간 뒤, 자리에서 일어난 강헌은 창가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사망지가 흔한 곳은 아니다. 물론 기막힌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카페 사장이 말한 부부가 천진호와 김혜원이라면 그들이 메시지에 남긴 아이는 바로 사빈이었다.
아이…… 그 작고 흰 꽃 옆에 쓰여 있던 메모가 정확히 뭐였더라.
‘For my baby, angel’ 뒤에 뭐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엔젤이라는 단어에 곧바로 사빈이 떠올랐다.
그는 아까보다도 더, 한시라도 빨리 사빈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강헌의 기대는 무너졌다.
[점심시간에 일이 있어서 시간을 못 낼 것 같아요. 저녁에도 약속이 잡혔고요.]
그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 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신경에 거슬린다.
왜일까. 안정을 되찾았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사빈 씨. 약속이 생겼습니까?”
- 네. 좀 늦을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세요.
“무슨 약속입니까? 데리러 가겠습니다.”
- 괜찮아요. 저,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요. 이만 끊을게요.
뚝. 통화가 끊겼다.
강헌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왜……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더 연락을 하면 사빈은 자신이 그녀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 갑자기 약속이 생길 수도 있지.
별것 아닐 것이다. 며칠간 쉬었으니 그만큼 채워야 할 터이므로 바쁠 것이다.
‘집에서 얘기하면 돼.’
그렇게 그는 애써 불안감을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혹여 천문호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사빈과 만나기 전날 저녁 재희는 이 회장과 만남을 가졌다.
삼청동에 위치한 오래된 한식 레스토랑은 유명인, 특히 정치인들의 회동 장소로 널리 알려진 ‘진해각’이었다.
후문에 미끄러지듯 정차한 검은 세단에서 선글라스를 낀 재희가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익숙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를 후문 안으로 이끌었다.
손님 중에서도 격이 높은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 별채로 안내된 재희.
‘……후.’
숨을 작게 내쉰 그녀는 직원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서 홀로 약주를 들이켜는 이서훈 회장과, 그의 뒤에서 말없이 서 있는 김진후 비서실장은 그녀의 등장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재희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는 이서훈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강헌이 결혼한 날 이후로 처음이군.”
흘깃 재희를 본 이 회장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강헌과 닮아 있어서 재희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쓰러졌다지.”
재희는 놀라지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에서 기조그룹 이서훈 회장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특히나 자신에 관한 소식은 즉시 그에게 보고가 되었을 것이다.
“……네.”
“이번엔 강헌이를 부르지 않았더구나. 너도 나이를 먹으면서 개념이라는 게 생기는 모양이지.”
이 회장은 강헌의 마음을 붙잡아 놓을 고삐로 재희를 이용하는 주제에, 막상 그녀가 강헌을 부르는 것을 무척이나 언짢아했다.
감히 고아 출신 배우 따위가 기조그룹의 후계자가 될 남자를 오라 가라 하다니.
하지만 언짢은 기분을 느끼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강헌이 사빈에게 마음이 생긴 이상, 재희는 별 쓸모가 없어졌다.
다시 한번 약주를 입에 털어 넣은 이 회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재희를 살폈다.
‘흐음.’
고아원 출신의 여자애를 연예계 정상의 자리까지 밀어 올린 시간이 좀 아깝게 느껴진다.
그래도 자기 관리 하나는 뛰어난 아이니, 앞으로 몇 년간 ‘오늘처럼’ 써먹어도 될 듯하다.
“오늘 잘 하거라.”
“…….”
“머리가 많이 컸구나. 예전엔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더니.”
“회장님.”
용기를 내어 부른 것이 무색하게 이 회장과 눈이 마주친 재희는 움찔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렵다. 무섭다.
그래도 입을 열어야 해. 그래야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
“저, 앞으로도 잘하겠습니다.”
“…….”
“제 쓸모를 다하겠습니다. 회장님이 기대하시는 것 이상으로 해낼 자신, 있습니다.”
“없을 것 같은데.”
재희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뭔가 부탁이 있는 모양이다만. 글쎄다.”
“회, 회장님.”
“강헌이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내 며느리인 듯싶다.”
며느리라는 단어에 재희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눈치채지 못한 게냐? 강헌이의 마음을.”
“……연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회장이 껄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널 내게서 보호하려고 말이냐?”
그의 반응에 이를 악문 재희의 턱 끝이 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내 아들이 너보다 더 훌륭한 배우인 듯하구나. 네가 아직 그리 생각하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