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또 마음이 말랑해져서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의 다정함은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이 강한 맹독이다.
결국 사빈은 강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그는 그녀가 안전벨트를 잘 착용했는지 확인한 후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오늘 몇 시에 끝납니까.”
“잘 모르겠어요. 별일 없으면 6시에 끝날 거예요.”
“데리러 가겠습니다.”
사빈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내가 안 괜찮습니다. 끝나고 전화해요.”
사빈은 단호하게 말하는 강헌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네?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해 놔요. 그때도 오늘처럼 적게 먹으면 안 됩니다.”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의 이런 막무가내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서초동 천문호의 자택에서 받은 상처가 조금 아물 만큼.
그리고 그만큼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재희 때문에.
며칠간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면서 강헌의 다정함이 자꾸만 욕심났다.
뻔뻔한 것을 알지만……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점심에.”
“네?”
“전화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신호에 차가 멈춰 섰다. 강헌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혼부부니까. 당연히 틈만 나면 연락하지 않겠습니까.”
“아…….”
“지난번 사빈 씨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듯 보여 다행이었다.
“12시 반쯤 전화하겠습니다.”
네, 하고 사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시의 빌딩숲을 지난 검은 세단이 기조미술관에 도착했다.
“고마워요. 데려다줘서.”
사빈을 바라보던 강헌이 그녀가 매고 있는 안전벨트의 잠금장치를 눌러 해제했다.
달칵, 스르륵.
“사빈 씨.”
자신을 바라보는 진한 눈빛에 긴장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
그러자 강헌의 검은 눈동자에 열기가 돌았다.
……그녀는 아직 아픈 사람이다. 참아야 한다.
“점심시간에 오겠습니다.”
“점심에요?”
“같이 먹죠. 점심도, 저녁도.”
스륵. 아래로 내려간 그의 동공이 사빈의 붉은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눈빛에 사빈의 몸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다.
“싫습니까?”
그 역시 긴장된 마음으로 사빈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할게요.”
그녀의 대답에 강헌의 눈가가 조금 유하게 풀어졌다.
“오늘 무리하지 말아요. 너무 아프면 언제든 연락하고. 데리러 갈 테니까.”
강헌은 천천히 손을 뻗어 사빈의 뺨을 감쌌다.
“열이 내려서 다행이군.”
엄지가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사빈은 그 행위에 담긴 은근한 뜻을 눈치챘다.
그러자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나누었던 키스가 떠올랐다.
거칠고, 달았다.
‘……하려나?’
긴장과 기대로 그녀의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하지만 사빈의 생각과는 다르게 커다란 손은 다시 거두어졌다.
“이따 보죠.”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숨을 작게 내쉰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 조심하세요. 그리고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다시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서 사빈은 서둘러 그의 차에서 내렸다.
그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강헌 씨 가는 거 보고 들어가야죠.”
“이러다 지각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빈은 하는 수 없이 미술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흘깃 뒤를 보니 그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망설이던 사빈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픽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간지러워.’
입술을 안으로 만 사빈이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세단은 그러고도 얼마간 더 머문 후에야 천천히 미술관을 빠져나갔다.
가볍고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사무실로 올라가려던 사빈.
드르륵, 울리는 진동 소리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강헌 씨일까?’
운전하는데 메시지를 보내도 괜찮을까, 생각하면서 화면을 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서재희입니다. 실례지만 오늘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급한 일이라서요.]
사빈은 눈을 크게 떴다.
서재희 씨가 나와 왜 통화를…….
주위를 살펴보던 사빈은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생각을 바꾸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무실까지 천천히 올라가면서 통화를 하기로 했다.
왜 마음이 이렇게 떨려 오는지 모를 일이다.
‘꼭……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
불륜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피가 식는 기분이다.
어쨌든 비상계단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빈은 최대한 작게 목소리를 내자고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서재희 씨는 목소리도 예쁘구나. 사빈의 가슴이 조금 저릿해졌다.
“……네, 안녕하세요. 천사빈입니다.”
-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그런데 무슨 일로…….”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꼭 만났으면 해요.
계단을 올라가던 발걸음이 그대로 뚝 멎었다.
“어떤…… 말인지…….”
- 오빠와 천사빈 씨 계약과 관련한 얘기예요.
아직 마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파도가 몰려왔다.
잠시 숨을 고른 사빈이 느리게 대답했다.
“……퇴근 후에 만나죠.”
- 제가 주소 보내 드릴게요. 오빠 이름으로 예약해 놓을 테니까, 와서 직원한테 얘기하면 안내해 줄 거예요.
“네, 그럼.”
- 천사빈 씨.
전화를 끊으려는데 재희가 그녀를 불렀다.
- 고마워요. 우리를 위해 방패가 되어 줘서.
“…….”
- 오빠가 전보다 다정해지지 않았나요?
순간 사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헤어지기 전까지 잘 대해 주라고 제가 말했어요. 천사빈 씨는 고마운 사람이니까.
그가 요즘 다정하게 군 이유가…… 서재희 씨 때문이라고?
- 꼭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오빠한테 말해 놓을게요. 사빈 씨한테 더 잘해 주라고. 그리고 사빈 씨도 저희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이따가 뵐게요.”
전화를 끊은 사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뛴 것도 아닌데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하아, 하…….”
가슴께를 움켜쥐고 상체를 숙인 채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은 사빈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올라가던 사빈은 문득 계단창에서 멈춰 섰다.
“다…… 연극이었구나.”
자신과는 달리, 강헌의 연극은 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재희를 위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여자와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서.
“하하…….”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웃던 사빈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손으로 벽을 짚던 사빈은 이내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흐윽…….”
강헌을 사랑하게 되자마자 헤어짐을 준비해야 했다.
***
강헌의 시선은 자꾸만 시계로 향했다.
사빈과 만날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녀도…… 나와 만날 시간을 기다릴까.
컨디션은 괜찮은지, 기분은 어떤지 신경이 쓰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을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드는 사빈의 모습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안아 주고 싶고 지켜 주고 싶은 여자.
강헌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Bali’라 쓰인 팻말을 든, 사빈을 닮은 마그네틱 신부 인형을 꺼냈다.
보자마자 웃음이 픽, 새어 나온다.
[어디가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니, 역시 닮았다. 늘 가지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점이.
“……확실히 너보다 더 예쁘긴 하다.”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 강헌은 검지로 인형의 코를 콕, 찍었다.
사빈은 신랑 마그네틱 인형을 어디에 두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점심을 먹을 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마그네틱을 다시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차갑고 딱딱하기로 유명한 이강헌 본부장의 가방 안에 귀여운 발리 기념품이 들어 있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잠시 웃던 강헌은 다시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역시, 사빈은 천문호의 딸이 아니었다.
천문호의 죽은 남동생인 천진호의 딸이었다.
비서는 내일까지 천진호 쪽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겠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받은 상처를 되갚아 줄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말씀하신 천문호 의원의 비리 정황입니다.”
그는 비서가 건네는 보고서를 받아 들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문호는 매우 치밀하여 자신의 방패가 될 이들을 깊이 사귀어 놓았고, 여기저기에 도망갈 구석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그가 저지른 비리가 많다는 뜻이었다.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진짜 그의 모습은 비열함 그 자체였다.
자식들은 제 힘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허위로 정보를 기재하거나 위조된 자격증을 만드는 것은 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처가는 천문호를 통해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로 신도시 개발 부지로 지정될 지방의 땅을 사들여 부동산을 몇 배로 불렸다.
명문가로 이름난 천문호의 집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차명 계좌에는 불법 은닉하거나 횡령한 자금이 그득했고, 심지어 갓 태어난 팔촌 조카의 앞으로 재산을 돌려 탈세를 노린 정황도 포착되었다.
기조그룹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뒷조사였다.
“……역겹군.”
그는 이를 갈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천문호가 사빈의 친부가 아님이 확실했다.
“또한 비서실로 오늘만 다섯 번의 연락이 왔습니다.”
사빈을 데려간 이후로 오늘까지, 천문호 일당은 매일 연락을 해 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으니 섣불리 이 회장에게 연락할 수는 없던 모양이었다.
강헌의 비서실과 사빈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남기며 다급한 속을 감추지 못했다.
[오해가 있는 듯하네. 다 설명할 테니 일단 연락 좀 받아 주시게.]
[이 서방, 그날 일에 대해서 내가 다 설명할게. 응? 내가 너무 과했어. 많이 놀랐을 이 서방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매제 오해 풀어 줘…… 사빈이가 워낙 모르는 게 많아서 가르쳐 주느라 그랬던 거야.]
끝까지 자기변명만 할 뿐, 이들은 사빈에 대한 미안함은 조금도 없었다.
그딴 더러운 놈들에게 사빈이 십여 년이 넘도록 학대를 당하고 고통을 겪어 왔다.
거센 불길이 그의 속을 태울 듯 끓어올랐다.
“천문호 집 고용인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 없습니까.”
“예, 아직까지는…….”
“천문호에게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럼에도 침묵하면 책임을 똑같이 나누어야 할 거라고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완전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사빈이 천문호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 회장은 당장 그녀를 내칠 것이다.
혹은 약점을 잡았다 생각하며 제멋대로 주무르려 할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생각만으로도…….
분노로 들끓는 그의 눈빛에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강헌.
어제 밤새 아픈 사빈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재희와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