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강헌은 온몸을 떨며 우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세 사람을 보았다.
“담을 것.”
섬뜩할 정도로 시린 음성에 그들은 얼어붙었다.
“담을 것을 가져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문 여사가 창고로 쓰고 있는 옆방에서 얼른 종이 상자를 가져왔다.
해외 브랜드 로고가 찍혀 있는 작은 박스를 본 강헌이 미간을 찌푸리자, 문 여사가 고개를 숙였다.
“다, 다른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말없이 상자를 낚아챘다.
더는 이 집에 사빈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 낸 뒤,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유리 조각과 흰 가루를 조심스럽게 쓸어 담기 시작했다.
“…….”
기조그룹 후계자가 몸을 낮춘 채, 그들 집의 지하에서 손으로 직접 뼛가루를 모아서 상자에 담고 있다니.
그것도 그들이 그리도 무시했던 사빈 친부모의 유골을.
그들의 기준에서 아주 높은 존재인 강헌이, 가장 낮은 존재인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왔다.
사빈이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들켜 버렸다.
게다가 학대하는 순간을 그가 직접 보아 버렸기 때문에 발뺌도 못 하게 생겼다.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탁. 강헌이 뚜껑을 닫아 상자를 사빈에게 건네주었다.
초점 없이 바닥 어딘가를 보고 있던 사빈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끌어안았다.
강헌은 사빈의 두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이, 이 서방.”
“다시는 그 더러운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나도, 내 아내도.”
“자, 잠깐만, 매제! 오해야. 응? 사빈이가 가끔 정신이 나가서 이상해질 때가 있는데, 이렇게 잡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를…… 커억!”
강헌은 한 손으로 무진의 멱살을 붙잡았다.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커어억, 이, 이거 놓고…….”
“아이고, 무진아! 이거 못 놔! 감히 귀한 내 아들 멱살을!”
추연실이 강헌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문 여사가 그녀를 붙잡고 황급히 말렸다.
지금 말리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 여사의 판단은 정확했다.
강헌은 더럽다는 듯 잡은 멱살을 거칠게 놓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무진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남은 생은 죽은 듯이 엎드려 살아.”
그는 사빈의 어깨를 감싸 부축하며 어둡고 습한 공간을 나왔다.
벌어진 소동에 사용인들이 몰려왔지만 흉흉한 강헌의 기색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잠시 멈춰 선 강헌은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방관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사람들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또 모르지. 저들의 만행에 대한 증거를 가져온다면 참작이 될지도.”
그 말을 남긴 채, 강헌은 사빈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을 뒤로하고, 검은 세단은 미련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
집으로 돌아온 사빈은 침대에 앉아 상자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강헌이 말을 걸어 보아도, 물을 가져와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텅 빈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은 비치지 않는다.
덜컥 겁이 난 강헌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어떻게든 눈을 맞추려 했다.
“사빈 씨.”
“…….”
“날 봐요. 응?”
“…….”
“사빈 씨가 이렇게 있으면 부모님께서 가슴 아프실 겁니다.”
부모님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부모님께서는 분명 사빈 씨가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편하게 쉬셔야죠. 여기 바로 옆에 내려놓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안고 있으면 엄마 아빠가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
강헌의 말에 사빈은 상자를 안고 있던 팔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사빈 씨도 쉬는 게 좋겠습니다. 눈을 감으면 오늘 하루는 지나갈 거고,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사빈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강헌과 눈을 맞추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에 가슴에 뜨거운 것이 번져 간다.
“내가 옆에 있겠습니다. 사빈 씨가 잠들어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안심이 된다.
적어도 오늘은, 오늘만은 혼자 있고 싶지 않다.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헌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잠시 먹먹해졌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마음을 열어 준 듯해서였다.
그렇게 예쁘게 웃는 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힘들었을까.
감싸 주고 싶었다.
사빈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지켜 주고 싶었다.
강헌은 그녀가 눕는 것을 도와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앞으로는.”
추연실의 집에서와는 다르게 잔잔하고 낮은 음성이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의 말에 순간 사빈은 울컥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약까지 챙겨 주는 사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보살핌을 받아 본 지가 도대체 몇 년 만이던가.
자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심스러워하는 그를 보니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내가 지켜 줄 겁니다.”
“…….”
사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상처 납니다.”
강헌의 길고 뜨거운 손가락이 그곳에 닿았다.
문질.
“아프지 말아요. 아프게 하지도 말고.”
그러다 그녀의 뺨을 살며시 감싸며 눈을 맞추었다.
“위로, 필요합니까?”
다정한 눈빛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사빈은 고개를 돌리고는 아까처럼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옆에 누운 강헌은 팔베개를 해 주고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혼자서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내게 말해요. 우리는 부부니까.”
부부라는 말이 사빈의 머릿속을 크게 울렸다.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쿵. 쿵. 쿵. 쿵.
사빈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강헌의 몸을 강하게 들이받고 있다고 여겼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온 침실이 뒤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 말해요. 내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도울 겁니다.”
강헌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는 등을 천천히 도닥거렸다.
“지금은 눈 감고 편히 쉬어요.”
사빈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눈을 감고 뜨면 오늘이 지나갈 것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테지.
짙은 우디 향을 들이마시며 사빈은 그에게 몸을 더욱 기대었다.
***
사빈은 며칠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되도록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종이 상자를 품에 계속 안고 있었다.
강헌은 그녀가 쉴 수 있도록 몸살에 걸렸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집안에서는 주치의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제가 잘 돌보면 될 것 같습니다.]
[기조그룹 며느리가 몸살이 났는데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니?]
[다른 사람이 아내를 만지게 하는 게 싫습니다.]
강헌의 말에 이 회장과 유 여사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진료를 받는 게…… 그럼 여자 의사를 보내마.]
[괜찮습니다.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소 단호하게 부모님을 막은 강헌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여 사빈의 곁을 지켰다.
박 여사에게는 사빈이 쉬는 동안 절대로 귀찮게 굴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를 했다.
그는 직접 식사를 침실로 가져와 챙겼고, 얼음으로 눈가와 볼을 찜질해 주었으며, 밤에는 품에 꼭 안아서 등을 다독였다.
덕분에 사빈은 서서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오늘은 상태가 회복되어 평소처럼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 테이블을 확인한 사빈은 상자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면 혹 모든 것이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강헌이 얼음주머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깼어요?”
“……네.”
“컨디션은 좀 어떻습니까?”
사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찮아요.”
밤새 강헌에게 안겨 있던 덕분인 듯했다. 따뜻한 온기에 그녀는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더 쉬고 싶으면 쉬어도 됩니다.”
“아뇨. 출근할 거예요. 하고 싶어요.”
집에 혼자 있어 보았자 계속해서 그때의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강헌도 더 권하지 않았다.
“힘들면 참지 말고 언제든 말해요.”
“네, 그럴게요.”
잠시 생각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빈 씨가 원한다면 월차를 내겠습니다.”
강헌은 단 한 번도 지각을 하거나 월차, 연차를 내 본 적이 없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사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의 하루를 내어 줄 수도 있었다.
“강헌 씨가 없으면 곤란할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저도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고 나와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욕실로 향한 사빈은 거울을 보고는 눈을 고쳐 떴다.
밤새 강헌이 얼음찜질을 해 주고 연고를 발라 준 덕에 뺨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전 차가운 감촉에 놀라 처음 잠에서 깼을 때.
강헌은 ‘쉬이’ 하며 자신을 달래고는 조심조심 얼음을 대 주었다.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지쳐 있던 나머지 사빈은 금세 잠이 들었고, 그 후로는 얼음 마사지에도 깨지 않고 잘 수 있었다.
“…….”
가슴 가득 뭉클하고 뜨거운 감정이 느리게 퍼져 나갔다.
강헌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마 정신적으로 망가져서 지금처럼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위로는 생각보다 아주 강했다.
사빈은 강한 물줄기 아래에 서서 몸을 맡겼다.
‘그 악몽 같은 날은 지나갔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씻고 나온 그녀는 평소보다 화장에 공을 들였다. 이제 티가 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민감한 사람은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특히 피부에 신경을 썼고,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볼 터치도 아주 살짝 덧발랐다.
이러면 뺨이 좀 이상하게 보여도 볼 터치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드레스룸을 나선 사빈은 곧장 종이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빨리 다른 좋은 함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 사빈이 출근할게요. 그동안 편히 쉬고 있어요. 얼른 좋은 곳에 모실 수 있도록 할게요.”
강헌의 지시로 박 여사가 2층을 청소하는 동안, 두 사람은 비교적 편하게 아침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차고로 향한 두 사람.
“데려다주겠습니다.”
“괜찮아요. 강헌 씨 바쁘잖아요.”
“사빈 씨 데려다줄 시간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