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60)화 (60/90)

제60화

지하실에는 빛이 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면 희미한 곰팡내 섞인 공기와 냉기가 느껴졌다.

어두운 복도 끝 방의 문 앞에 문 여사가 서 있었고, 안에서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네 부모 뼛가루마저 성치 못할 거다.”

소리 죽여 고통을 감내하던 사빈이 별안간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뼛가루……? 묻어 주셨다고 하셨잖아요……?”

흠칫한 추연실은 이내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입 다물어.”

“바른 곳에 잘 묻었다고 하셨잖아요. 안전하고 고요한 곳에…….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건방지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대답이야!”

“말씀해 주세요, 거짓말이었던 거냐고요!”

짜악.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감히 내 앞에서 큰 소리 내지 마라.”

사빈이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정말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

집으로 돌아온 강헌은 박 여사의 마중을 받으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내는 안 들어왔습니까?”

“친정에 들렀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친정이라는 말에 강헌은 순간 싸한 기분을 느꼈다.

“친정에? 아침에는 그런 말 없었는데.”

“네, 갑작스러운 부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은 댁에서 드시고 올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 준비하겠습니다.”

박 여사가 고개를 숙였다. 강헌은 찝찝한 기분으로 우선 침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브리프케이스를 잠시 문 앞에 내려놓은 강헌.

“…….”

재킷을 벗으려던 그는 다시 침실을 나섰다.

그가 나오는 소리에 다이닝룸으로 돌아갔던 숙희가 황급히 나왔다.

“본부장님, 출타하십니까?”

“아내 친정에 다녀오겠습니다. 적당히 정리하고 퇴근하십시오.”

곧장 차고로 향한 강헌은 서초동에 있는 천문호의 집으로 향했다.

천문호가 겉보기와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별안간 불려 간 친정.

석연찮은 천문호의 집안.

그래서 강헌은 부러 사빈에게 데리러 간다고 말하지 않고 무작정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빨리, 더 빨리.

할 수 있는 최대한 속력을 올린 강헌은 본래보다 빠르게 사빈의 친정에 도착했다.

대문 근처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때마침 반대편에서 천무진의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무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매제? 여긴 어쩐 일이야?”

무진이 아주 반갑다는 듯 그에게 다가왔다.

“혹시 나랑 얘기하러 온 건가?”

“사빈 씨가 친정에 있다고 해서 데리러 왔습니다.”

“천덕이가?”

강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덕?”

“아, 아니. 그냥 뭐…… 하하, 별명, 아니, 애, 애칭이지, 애칭. 천씨니까.”

그들 형제는 사빈을 천덕이라고 불렀다. ‘천덕꾸러기’의 줄임말이었다.

사빈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늘 천덕아, 천덕아, 불러 대곤 했는데 그게 버릇이 되어 그만 실수를 할 뻔했다.

무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헌의 어깨를 감쌌다.

“자, 여기서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고.”

“…….”

강헌이 무감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흠칫한 무진이 슬며시 손을 내렸다.

‘시X, 눈빛 한번 살벌하네.’

그래도 자신의 사업 얘기를 하러 온 것 같아서 무진은 대문을 열고 그를 안내했다.

한데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뭐야, 문 여사도 왜 안 나와 있지? 원래는 이러지 않거든. 주인이 돌아오면 재깍재깍 나와 있는데, 오늘은…… 아, 천덕, 아, 아니, 사빈이가 와 있는 날이구나.”

무진은 주인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오만하고 권위적이다.

아무리 봐도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다.

강헌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사빈 씨가 집에 있으면 왜 인사를 나오지 않는 겁니까?”

천문호나 추연실이 사빈을 ‘훈육방’으로 데리고 가면, 사용인들은 못 본 척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두 부부의 지시였다.

혹여 누군가 사빈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거나 혹 사빈이 도움을 청할까 봐 문 여사 말고는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다.

“응? 어, 그게…… 음…… 그냥 뭐, 방해하지 않는 거지. 편하게 있으라고. 하하.”

젠장, 간 떨려 뒤지겠네.

무진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 사빈이 방에 가 있을래, 매제? 거기에서 기다려. 내가 불러올게.”

순간 강헌의 눈이 번뜩였다.

무진은 사빈이 그녀의 방에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죠.”

“2층으로 올라가면 돼. 가장 첫 번째 방이야.”

강헌이 계단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무진은 얼른 지하로 내려갔다.

역시 ‘훈육방’ 문 앞에 문 여사가 서 있었다. 곧 훈육이 끝나 가는지 얼음 팩과 연고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문 여사, 천덕이 훈육 중이야?”

“네, 도련님.”

“지금 천덕이 남편이 와 있어.”

문 여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강헌 본부장 말씀이세요?”

“그래. 천덕이 데리러 왔다는데, 일단 2층으로 올려 보냈…….”

“보, 본부장님.”

문 여사가 무진의 뒤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강헌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매, 매제, 2층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왔어, 하하. 얼른 가자. 곧 천덕, 아니, 사빈이가…….”

강헌은 제 팔을 잡으려는 무진을 가볍게 뿌리치고는 문을 막고 있는 문 여사의 앞에 섰다.

“비키지.”

“보, 본부장님, 지금 아가씨께서는 사모님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문 여사의 동공.

강헌은 더 말하지 않고 문 여사를 옆으로 밀친 다음, 문을 열었다.

손에 무언가를 든 추연실이 뺨을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빈을 내려다보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당장 못 일어나! 고개 똑바로 들고 보라고! 감히 협박을 해?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으면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이년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제가 지르는 높은 목소리에 취한 추연실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빈을 쏘아붙였다.

“자, 봐라! 네가 그렇게 찾던 네 부모 유골, 여기에 있다. 그렇게 효녀인 척, 세상 가련한 딸인 척 연극을 하더니 지척에 있는 것도 못 알아보고. 넌 네 어미와 똑같아. 언젠가 네 남편도 죽일……!”

추연실이 사빈의 머리채를 휘어잡음과 동시에, 충격으로 얼어붙어 있던 강헌이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탁.

“뭐야, 누가 감히……!”

손목이 붙잡힌 추연실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이, 이 서방?”

“놓으십시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위협적인 목소리가 그의 목울대를 타고 울렸다.

추연실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버렸고, 강헌 역시 추연실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더 꽉 들어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프니까 당장 놓게!”

“놓으라고, 했습니다.”

살기 어린 시선에 흠칫한 추연실은 슬그머니 사빈의 머리채를 놓았다. 그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엇……!”

“엄마!”

“사모님!”

발을 헛디딘 추연실이 뒤로 넘어졌다. 콰당, 소리와 날카로운 파열음이 동시에 울렸다.

“아, 안 돼……!”

강헌의 팔을 뿌리친 사빈이 달려가 무릎을 꿇고 어지럽게 뒤섞인 깨진 조각과 하얀 가루를 미친 듯이 분리하기 시작했다.

조각의 날카로운 면에 베인 그녀의 손가락에 피가 맺혔지만 사빈은 멈추지 않았다.

“사빈 씨!”

강헌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저지했지만 사빈은 완강히 뿌리치며 계속해서 가루를 모으려 애를 썼다.

“안 돼! 엄마, 아빠……!”

눈물과 핏물이 가루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강헌은 그녀의 팔로 그녀의 몸을 강하게 감쌌다.

그러다 사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양 볼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오른쪽은 무언가에 긁히기라도 한 듯 더 심했다.

그사이, 문 여사와 천무진은 양쪽에서 추연실을 붙잡고 일으켰다.

“엄마, 괜찮아?”

“사모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저년 때문에…….”

악이 서린 눈으로 사빈을 노려보던 추연실은 강헌과 눈이 마주쳤다.

“감히.”

그는 화가 나면 도리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히 누구를 건드려.”

강헌은 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짓씹듯 읊조렸다.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곧 알게 될 겁니다.”

사빈을 노려보던 추연실은 살기등등한 그의 눈빛에 한풀 꺾여, 애써 변명했다.

“이, 이 서방, 오해하지 말게나. 이건 훈육을 위해서…….”

“훈육?”

되묻는 강헌의 차가운 눈빛과 음성에, 추연실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 집안의 가풍이 원래…….”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짐승이 포효하는 듯 크게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사빈의 몸이 비 맞은 새처럼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더욱 커져만 갔다.

“성인이 된 딸의 뺨을 때리면서 윽박지르는 게 훈육입니까?”

“그, 그게.”

“겉으로는 점잖은 척, 고결한 척해 대더니. 이 정도로 썩어 빠진 집안인 줄 몰랐군.”

그의 말에 추연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집안의 명예를 모욕하는 것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저런 하찮은 계집 때문에 이런 모욕을 듣다니!

‘저년이 어떤 년인지도 모르고.’

기조그룹 후계자 품 안에 안겨 비호받고 있는 사빈이 눈꼴시어 미칠 지경이었다.

“매, 매제,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도련님.”

문 여사의 저지에 무진이 입을 삐쭉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자네 말이 너무 심하네. 자식이 바르게 자라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 된 도리야.”

그때 사빈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부모……? 당신은 내 부모가 아니야! 내 부모님은 당신처럼 추악하고 흉악하지 않아!”

“뭐, 뭐라고? 저게 지금 뭐라는…….”

“당신들은 단 한 번도 내 가족인 적 없었어! 내 가족은 우리 엄마 아빠야. 천진호와 김혜원이라고! 당신들한테 모욕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존경스러운 분들이란 말이야!”

머리채를 붙잡히고도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사빈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것은 절규였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슴에 꾹꾹 쌓아 두었던 슬픔과 고통이었다.

[아…… 부모님이 워낙 청결하셔서요. 차 안에서 뭘 먹는 걸 싫어하셔서.]

[오빠들과는 서먹서먹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남들 눈이 안 보이는 곳에선 잘해 줘요.]

[가족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사빈은 미소를 지었었다.

미소를…… 말이다.

강헌은 속이 뜯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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