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사빈이 눈을 떴을 때 강헌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본부장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단하실 거라면서요.”
박 여사의 말에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괜찮아. 원래 이런 사이인 게 맞으니까.’
혼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사빈은 기조미술관으로 출근했다.
거의 다 도착해서 벨소리가 울렸다.
강헌인가 싶어서 얼른 주차를 마친 사빈이 조수석에 놓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추연실이었다.
지금 받지 않으면 미술관으로 전화를 걸어서라도 저와 통화를 하려 들 것이고, 만나면 ‘왜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며 엄한 질책이 이어질 것이다.
목을 가다듬은 사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니.”
- 출근했니?
“네, 방금 막 주차 마쳤습니다.”
- 오후에 집에 좀 들르거라.
말을 듣는 순간, 숨통이 콱 막혀 온다.
- ……바로 대답 안 하니?
“요즘 일을 배우고 있어서 퇴근 시간이 불분명…….”
- 내가 사부인께 말씀드리마.
뚝. 전화가 끊겼다.
그 집에 방문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빈의 호흡이 가빠 왔다.
가기 싫어. 그 어둡고 사나운 곳으로는.
하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올 것이고, 강헌에게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천무진의 사업 때문인가.’
지난번 방문 때, 천문호와 추연실은 강헌이 그들의 큰아들인 무진의 사업을 돕기를 바랐고, 그 과정에서 사빈이 제 역할을 해내기를 원했다.
무진은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긴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직원들에게 임금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다. 때문에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늘 부모가 뒤처리를 해 주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호와 추연실은 제 아들들에게만은 관대해서 그들이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나무라지 않았다.
같은 집에 살았으나 숨 한 번 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사빈과는 완전히 다르게 키운 것이다.
‘이번에도 똑같을 텐데.’
보나 마나 무진의 사업은 또 망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그 뒤처리를 그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강헌이 도와야 할지도 모른다.
사돈인 기조그룹의 원조를 믿고, 이번 사업은 규모를 무리하게 확장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사빈은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강헌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
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러나 천무진의 사업을 부탁하는 순간.
강헌에게는 그녀와 천문호, 그리고 추연실이 한 세트로 묶여서 여겨질 것이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직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만약 우리 엄마 아빠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런 무리한 일을 벌이지도, 뻔뻔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텐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빈은 업무가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시어머니인 유정희 관장이 제게 일을 잔뜩 안겨 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미술관 안으로 향했다.
***
강헌은 출근하자마자 비서에게서 사빈의 집안에 관한 보고서를 받아 읽었다.
천문호와 추연실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국회의원 천문호는 신사적인 이미지로 유명했으며 추연실 역시 현모양처 스타일의 정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빈을 보면 그러한 이미지가 진짜처럼 보인다.
하나 위의 두 오빠의 행실을 보면 의문스러웠다.
큰아들인 천무진은 사업을 한답시고 여기저기에 손을 뻗었으나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자금을 융통하는 경로와 직원들에게 임금 지급을 제때 하지 않아 잡음이 많았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호탕한 성격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다혈질이라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남인 천무호는 소심하나 잔악한 성정으로 몇 번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길고양이를 해쳐서 신고를 당하거나 고등학교 땐 옆 학교의 장애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전적도 있었다.
하나 이들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천문호가 죄다 덮은 탓이다.
그러나 사빈은 지금껏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아홉 살 이후로 그녀의 삶은 모범 그 자체였다.
성적도 훌륭했고 부모의 속을 썩인 적도 없었다.
‘남매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검지로 테이블 위를 톡, 톡, 간헐적으로 두드리며 무감한 눈으로 훑어 내려가던 강헌의 시선이 머문 곳은 천문호의 결혼 전 가족관계였다.
천문호는 한학자인 천순만의 장자였고 아래로는 천진호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천진호는 사망한 상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마치 그의 행적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겠다는 듯 아주 깨끗했다.
“이상하군.”
강헌의 말에 앞에 서 있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천진호는 결혼 후 의절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김혜원으로 고아원 출신인데, 지역 유지였던 그의 집안은 김혜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눈썹을 한 번 움직인 강헌은 태블릿 화면을 왼쪽으로 쓸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보고서에는 천문호의 대외적 이미지와 실제 성격이 다르다는 것도 적혀 있었다.
국회의원실에서 단기 근로 직원으로 일했던 사람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천문호는 상당히 차갑고 까다로우며 계산적이라고 했다.
자신의 말이 절대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천문호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과의 인터뷰가 녹음 파일로 첨부되어 있었다.
- 천 선생님 댁 자제들? 알지. 우리 동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근데 형제 성격이 참 달라. 큰아들은 너무 차. 눈이 뱀 같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하고 말을 안 섞어.
- 근데 동생은 참 따뜻해. 인사도 잘 하고, 무거운 거 들고 가는 사람 있으면 얼른 가서 돕고. 친형제 맞나 싶은데, 생긴 게 워낙 닮아서…….
강헌은 녹음에 집중했다.
- 그 집이 서울로 이사한 이후로는 소식이 끊겼어. 그러다가 그 댁 큰아들이 정치인이 되었데? 티비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던데. 꼭 자기 동생처럼 잘 웃고 말이지.
문득 말소리가 줄어들더니 꺼림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근데 그 댁 막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데? 참 이상하지. 꼭 막내가 죽고 그 영혼이 형한테 씐 것처럼…….
의절 후 천문호와 천진호 간 교류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강헌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 뭔가 있다고.
“천진호 쪽을 더 조사하십시오.”
“네, 본부장님.”
***
퇴원 수속을 마친 재희가 선영의 도움을 받아 밴에 막 몸을 실었을 때였다.
“재희야.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선영의 말에 재희는 피가 식는 듯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녀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 김진후입니다. 회장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오후 8시에 진해각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회장이 만남을 요청하는 시간에 따라서 그녀의 할 일이 정해졌다.
오후 8시에 만남을 청한다는 것은…….
재희는 힘없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강헌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하나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재희는 사빈을 떠올렸다. 맑고 곱게 자란, 강헌의 아내가 된 여자를.
‘당신은 가진 것도 많잖아. 나한테는 오빠 하나뿐인데…… 왜 내 전부를 가져가려고 하는 거야!’
한데 뒤섞인 부러움과 원망은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
추연실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 서방과 얘기는 해 봤니?”
맞은편에 앉은 사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추연실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
“두 번 묻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강헌 씨가 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가서 아주 예민한 상태라서요.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역효과를 부를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청탁을 싫어하는…….”
“틀렸잖니.”
사빈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청탁이 아니라 부탁이지.”
“……죄송합니다, 어머니.”
“처가에 그 정도도 못 해 준다니? 기조그룹 외아들이?”
추연실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타닥,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다.
“아니지. 이 서방이 못 해 주는 게 아니라 아내인 네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스르륵. 소파에서 일어난 추연실이 사빈에게 다가갔다.
잔뜩 굳은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치 곧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딸.”
사빈의 옆에 앉은 추연실이 희고 말랑한 뺨을 감싸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엄마 아빠가 몇 번이고 말했잖니. 키워 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
“……네, 어머니.”
“그런데 결혼을 하더니 잠시 망각한 것 같구나. 왜, 기조그룹에 시집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니? 이강헌이 뒤에 숨으면 우리는 무시해도 될 것 같고 그래?”
추연실이 웃으며 속삭였다.
“천한 네 어미의 흔적을 지우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여전히 닮아 있구나. 아무래도 오랜만에 교정에 들어가야겠다.”
사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문 여사, 얼음이랑 연고 들고 대기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 딸 예절 가르치는 날이니까.”
“네, 사모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문 여사가 재깍 대답하며 어딘가로 향했다.
“참. 오늘 아버지 일찍 들어오신다고 하셨거든. 오랜만에 셋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