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는 재희를 보며 선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재희야, 지금 저녁이야. 본부장님 집에 계실 텐데, 어딜 가려고 그래. 응?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지금 갈 거야. 지금 오빠 안 보면 미쳐 버릴 것 같아.”
재희는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붙잡아 거칠게 빼냈다. 붉은 핏줄기가 피부를 타고 흘렀다.
“재희야, 진정해, 응? 너 이대로 나가면 사진 찍히고 얘기 나돌 거란 말이야.”
재희가 처음 자살 시도를 했을 때,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온 그녀를 찍은 사람들이 있었다.
과로로 인해 쓰러졌다는 핑계를 둘러댔지만 ‘서재희의 자살 시도’라는 지라시가 널리 퍼져서 애를 먹었다.
이번에도 들킨다면 새어 나가는 말들을 막기는 힘들 것이다.
연예인의 생명은 이미지다.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배우 서재희의 이미지가 깨진다면 광고와 섭외에 난항을 겪게 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스태프들에게 향하게 된다.
또한 가장 큰 피해는 재희가 입게 될 것이다.
현재 재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강헌과 연기뿐이다. 둘 중 하나라도 무너진다면 재희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망가질 것이라고 선영은 확신했다.
“재희야.”
“스파숍에서 오빠를 봤어.”
“응? 뭐라고? 본부장님을?”
선영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까 강헌과 통화할 땐 분명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랑 손잡고 왔더라. 강헌 오빠가 여자랑 손을 잡았다고, 선영아. 이게 말이 되니? 응? 하하, 하하하…….”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재희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너도 알지? 오빠, 내 손끝만 닿아도 움찔거리면서 피하는 거. 내가 안기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 말이야.”
“재희야, 일단 일어나. 일어나서 침대에 누워 봐, 응?”
선영이 재희를 일으키려 애를 썼다.
“오빠 손을 끌어와서 내 어깨를 감싼 적이 있었어. 그때 오빠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날 밀쳤어. 확 밀쳐 냈다고!”
재희가 선영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꺄악, 재희야!”
“넘어진 날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는데, 차마 손은 못 뻗더라? 근데 오늘은 어땠는지 아니? 먼저 그 여자 어깨를 감쌌어. 감싸서, 안으로 데리고 갔어.”
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치 나한테서 그 여자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말이야…….”
강헌은 제게 들키고 말았다.
그 여자를 향한 감정을.
그 차갑고 딱딱하던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된 여자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더러워서 그런 걸까? 그래서 나한테는 손도 대지 못하는 걸까?”
“재희야, 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그 여자는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서, 더럽지 않고 깨끗해서, 그래서 좋아하게 되어 버린 걸까? 응?”
스르르 선영의 어깨를 놓은 재희가 바닥에 엎어진 채 울었다.
“선영아…… 오빠가 날 떠나면 난 죽을지도 몰라…….”
“재희야…….”
“오빠를 미워해야 하는데……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아…… 그 여자가 미워. 깨끗하고 맑은 그 여자가 밉고, 부러워…….”
그녀가 불쌍하고 가련해서 선영도 따라 울며 재희를 끌어안았다.
“난 절대 오빠 못 보내, 절대로…….”
“본부장님은 너한테 돌아오실 거야, 나도 옆에서 어떻게든 도울게, 응?”
“도와줘. 누구든 도와줘, 제발…….”
재희는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사랑해, 날 떠나지 마, 오빠.
오빠가 떠나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
각자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밤이 되자 침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강헌보다 먼저 침실로 향한 사빈이 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옴과 동시에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전 먼저 씻었어요.”
“예. 그럼 씻고 나오겠습니다.”
“네.”
어색한 대화를 마친 뒤 강헌은 욕실로, 사빈은 침대로 향했다.
‘먼저 자도 되나?’
고민이 되었다. 욕실 쪽을 흘깃 바라본 그녀는 일단 이불을 덮고 누웠다.
‘서재에서 서재희 씨와 통화를 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까는 연극이었다고, 그러니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뿐이라고…… 그런 말을 했을까?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해서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을 테지. 달래 주고 사랑을 속삭여 주었을 거야. 두 사람은 연인이니까.
“그렇지. 두 사람은 연인이지, 연인…….”
그러니까 내가 끼어들면 안 되지. 안 되는데…….
가슴에 강한 통증이 인다.
불에 타는 듯 뜨겁고, 찢기는 듯 아프다.
아니라고, 그저 순간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부정하면 할수록 그를 향한 감정은 더욱 또렷해졌다. 참 슬프게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면 정말 안 되는데.
사빈은 결국 강헌에 대한 제 마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더욱 선명히 다가오는 감정의 자락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스라한 그것은 태양처럼 붉고 별처럼 아련했다.
안 되는데. 이러면 행복해질 수 없는데. 엄마 아빠의 유언을 들어 드릴 수가 없는데…….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고 있는 사이 강헌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안 돼, 이 감정을 들키지 말아야 해.
그가 제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자신이 계약 사항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희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그들의 사이를 지켜 주려고 하기에 자신을 가까이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주제를 알자, 천사빈.’
강헌에 대한 마음을 알아차린 날.
사빈은 그와 거리를 두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
‘잡니까?’ 따위의 말도 없이 침대로 다가온 강헌이 그녀의 옆에 눕고는 스탠드를 껐다.
등을 돌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긴 채 두 사람은 애써 잠을 청했다.
***
월요일 아침.
박 여사의 출근 시간이 다가왔다.
샤워를 하는 사빈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도 연극을 하게 되는 걸까?’
어젯밤 인사도 없이 잠든 후.
아침에 일어난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틈이 벌어져 있었다.
먼저 일어난 강헌이 씻고 나와 옷을 입는 동안, 사빈은 욕실에 들어왔다.
‘어색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사빈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강헌 씨를 향한 마음을 들켜서는 안 돼.’
연극은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하자.
욕실 밖으로 나온 사빈은 머리를 말린 뒤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을 나섰다.
“서재에 있겠습니다. 천천히 나와요.”
이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강헌은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방을 나서려 했다.
“가, 강헌 씨!”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 세운 사빈.
강헌이 왜 그러느냐는 듯 무감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오, 오늘은 연극 안 해도 되나요?”
강헌이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차갑게 등을 돌렸다.
“하루쯤은 괜찮을 겁니다. 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간 것을 회장님도 알고 계시니까.”
그 말을 남긴 채 강헌은 침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사빈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아.’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자마자 그런 질문이라니.
방금 전 그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해져서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서재희 씨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연인이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호텔 스파에 나타난 걸 직접 목격했으니, 충격이 클 것이다.
강헌은 제게 이따금 보여 주는 것의 몇 배는 더 다정한 모습으로 재희를 달랬을 테고.
서로를 향한 믿음이 깊어진 두 사람 사이에 틈은 없을 것이다.
‘짝사랑은 힘든 거구나.’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은 사빈은 서재로 가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왠지 지금의 강헌은 자신과 같은 층에 있는 것조차도 싫어할 듯해서다.
“침대에서 빈둥거리자. 이것도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잖아.”
오늘의 연극을 대비하여 샤워를 하고 나서도 잠옷을 입은 사빈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참 커다란 침대구나.
강헌과 같이 누워 있을 땐 보통의 크기처럼 느껴졌는데.
‘이런, 또 이강헌 씨 생각을.’
도리질을 친 사빈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30분만 더 자자. 민망한 행동 안 해서 좋지, 뭐.
아쉬움을 숨긴 채 사빈은 강헌의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가 들어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
오늘은 방문에 귀를 대고 있어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더 집중하던 박 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도는데, 2층에서 강헌이 내려오고 있었다.
“출근하셨습니까.”
“아, 보, 본부장님. 2층에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드물게 당황한 박 여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출근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 그러셨습니까.”
“아내는 아직 자고 있습니다. 새벽에 잠든지라.”
그의 말이 내포한 의미를 깨달은 박 여사가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더 자게 놔두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아침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박 여사의 뒷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헌이 침실로 들어섰다.
탁. 문을 닫은 그가 멈칫했다.
침대 위에서 사빈이 자고 있었다. 제 베개를 끌어안고서.
“…….”
그는 조용히 다가가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쌔근쌔근. 아이처럼 잘도 잔다.
왜 자신의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무의식중에 한 행동일 터지만 강헌은 제멋대로 해석을 내리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러한 것이라고.
[오, 오늘은 연극 안 해도 되나요?]
그 말에 하마터면 그대로 사빈을 끌어안을 뻔했다.
그녀도 자신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미한 기대가 피어올라서.
그러나 어제 자신의 연인으로 알고 있는 재희를 본 사빈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래서 도망치듯 서재로 향했다.
그대로 사빈을 보고 있다간 더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손을 뻗은 그가 이마 위로 내려온 사빈의 머리카락을 뒤로 살짝 넘겨 주었다.
“으응…….”
멈칫.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다행히 사빈은 미간을 몇 번 좁히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강헌은 잠든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재에서 일을 할 때도 자꾸만 사빈이 생각이 나서 결국 이렇게 내려오게 되었다.
사빈은 잠든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바라보고 있고만 싶었다.
그녀의 평화 속에 자신도 함께하기를 바랐다.
“천사빈 씨.”
“…….”
작게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헌.
“……사빈아.”
아주 낮고 희미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언젠가 이렇게 부를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큰 욕심일 터.
그러니, 그녀가 잠든 사이에만 이렇게 몰래 훔쳐 부르는 수밖에는 없다.
“1년 후면.”
자유를 손에 넣게 된 당신은 날 잊을까.
“몇 년이 지나도.”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빈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에서 애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꿈을 품고 말았다.
당신의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