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흠칫. 사빈의 말에 정신을 차린 강헌이 얼른 그녀의 팔을 놓았다.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사빈은 팔을 몇 번 주물렀다.
마른세수를 한 강헌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혹시 오늘 만나기로 하셨나요?”
그가 즉각 대답했다.
“아닙니다. 재희가 이곳에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인 듯했다.
사빈은 두 사람이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제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재희 씨가 평소에 이곳에 왔었나요?”
강헌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다. 재희는 한 번 길을 들인 곳은 절대로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난 선영과 지금까지 함께 일했고, 소속사도 데뷔 이래로 바뀐 적이 없었다.
숍도, 병원도 처음 인연을 맺은 곳과 함께 가고 있는데 왜 오늘은 그녀의 집에서 먼 세인트마리아 호텔까지 왔을까.
그것도 하필 스파숍에.
저를 바라보던 재희의 눈빛이 떠오르자 심장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죄를 지은 기분.
아니, 오늘 자신의 행동은 재희에게 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빈을 놓아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제게서 멀어져 연진우에게 가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사빈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재희가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각하는 동안에도, 또한 자각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마음은 착실히 몸집을 부풀리고 있던 모양이다.
“강헌 씨.”
저를 부르는 사빈의 맑은 목소리에 강헌의 눈빛은 반대로 탁하게 가라앉았다.
이대로 사빈을 끌어안고 싶다. 그래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이만 가요.”
“……괜찮습니다.”
“강헌 씨 얼굴은 안 괜찮아 보여요. 저도 그냥 집에서 쉬고 싶고요.”
오늘은 사빈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돌아가요. 집으로.”
그나마 그녀와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강헌에게 위안이 되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근처에 서 있던 진우가 얼른 다가왔다.
“선배, 저희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진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불편했지.”
세인트마리아 호텔의 스파숍은 고품격 프라이빗 서비스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명인들이 자주 찾았다.
고객들은 함께 온 것이 아니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매우 드물었다. 지금까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진우가 그 명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재벌가 아들과 현직 국회의원 딸 부부와, 현재 대한민국 톱스타인 서재희를 맞닥뜨리게 하다니.
“아뇨, 괜찮아요.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요.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다음에 제대로 만회할게. 기회를 줘.”
진우가 강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호텔에서 불쾌한 경험을 안겨 드린 것,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음번에 방문해 주신다면 오늘의 일을 지워 버릴 만큼의 멋진 기억을 안겨 드리겠습니다.”
강헌의 굳은 표정은 재희 때문이었으나, 사정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선배, 이러지 마세요.”
저희는, 이라고 말하려던 사빈은 말을 고쳤다. 아무래도 강헌은 괜찮지 않겠지.
연인에게―비즈니스지만―어쨌든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들켜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응, 그래. 조심히 들어가.”
진우는 미안한 눈빛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
그는 사장 집무실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방금 전…… 서재희와 이강헌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나름 호텔에서 눈치를 키운 몸이다 보니 진우는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파악하는 데 능했다.
서로를 보자마자 굳어 버린 두 사람.
재희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빈과 강헌이 붙잡고 있던 손이었다. 자신과 스파숍 실장이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그녀의 시선은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강헌은 냉정하게 재희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어쩐지 자리를 피해 주려는 것 같은 사빈을 붙잡아 함께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뭘까. 혹시…… 이강헌이 사빈을 두고 서재희와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진우의 속에서 열이 뻗쳤다.
상대가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진우의 눈에는 재희보다 사빈이 훨씬 더 예쁘게 보였다.
제게는 몇 년 동안이나 마음에 품어 온 소중한 여자인데,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아 놓고 바람을 피우다니.
만약 사실이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진우는 자신의 생각이 그저 착각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사빈이 행복할 테니까.
그러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들킨다면, 그래서 사빈과 강헌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내게 기회가 올까?
***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은 채 각자 서재로 흩어졌다.
문을 닫으며 들어온 사빈은 책상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죄를 지은 기분이다. 재희의 표정을 떠올리던 그녀는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오렌지색 일기장을 꺼냈다.
남편의 연인에게.
난 정말로 당신이 호텔 스파에 오는 줄 몰랐어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요. 우린 연극을 하고 있는 거니까. 1년만 지나면 우리는 남이 될 예정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내 속을 읽는다면 나쁘다고 말할 것 같기는 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가지 않고 나와 상담실로 갔을 때…… 솔직히 기뻤거든요.
……미안해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 알 것 같다.
그러나 결론을 내 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답답해진다.
노트를 덮어 서랍 안에 넣은 사빈은 창가로 향했다.
강헌이 재희를 뒤로하고 자신의 어깨를 감쌌을 때.
설렜다. 참 뻔뻔하게도.
강헌에게 끌리는 마음을 인지하고 말아 버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겠지.
***
달칵.
서재로 들어오자마자 선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받아야겠지.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강헌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강헌입니다.”
- 본부장님, 저 박선영입니다. 재희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왔거든요.
……또.
강헌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릴 뻔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 아까보다는 많이 안정되었어요. 저희 오늘 세인트마리아 호텔 스파에 갔었거든요. 전 주차 마치고 뒤늦게 올라왔는데 재희가 호텔에서 쓰러졌어요. 한 4시 반쯤?
자신과 사빈이 상담실로 들어간 직후 쓰러진 모양이다.
강헌은 스스로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희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 때문에.
- 본부장님?
“예, 듣고 있습니다.”
- 언제쯤 오실 수 있으세요? 요즘 재희가 많이 힘들어해요. 본부장님께서 옆에 계셔 주셨으면 좋겠어요.
강헌은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풀어 내렸다.
재희에게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온다.
- 바쁘신 건 알지만 그래도 이번엔 와 주셨으면 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강헌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선영의 목소리가 조금 높이 올라간다.
- 두 분 다정하게 데이트하는 기사 뜬 날, 재희 한숨도 못 자고 울었어요.
“…….”
- 우리 재희, 본부장님이 곁에 계셔 주지 않으면 정말 위험해요. 그 애 세상에는 본부장님뿐이에요.
안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숨이 막힌다.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이다지도 무겁고 버거운 일이다.
한데…… 왜 사빈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은 것일까.
강헌은 커다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당분간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니 기회를 봐서 찾아가겠습니다.”
- 본부장님.
“그리고 오늘 스파에서 벌어진 일,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십시오. 무슨 말이 나돌지 모르니.”
나돌게 될 말들이 사빈을 상처 입힐지도 모르니까.
- ……알겠습니다. 자주 연락 주세요. 찾아와 주심 더 좋고요. 재희는 선물보다 본부장님 방문을 더 기다린답니다.
“……예. 그럼.”
전화를 끊은 강헌은 커다란 가죽 회전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숨이 막힌다. 머리가 갑갑하다.
사빈을 끌어안고 싶다.
“……후.”
사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솟아난 피가 혈관을 뜨겁게 데우는 기분이 들었다.
강헌은 자신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았다.
일전에 함께 백화점에 가서 골랐던 웨딩밴드다.
사빈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백금에 핑크 다이아가 박힌 반지.
꼭 자기 같은 것만 고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기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만.
강헌은 반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꼭 사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사빈이 보고 싶다.
맞은편 서재에 그녀가 있다.
그러나 그는 방을 나서지 못했다. 사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재희와 저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려던 그녀를 떠올리자 심장에 통증이 인다.
지하 주차장에서 키스를 나눌 때만 해도 서로의 마음이 조금은 통했다고 여겼는데.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강헌은 한동안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시간을 돌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
눈을 뜨자 여전히 지옥이었다.
재희의 세상은 소리도, 향기도 없는 컴컴한 암흑 속이었다.
“재희야, 일어났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걱정스러운 표정의 선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입원해서 한숨 자고 싶다니. 이유도 설명 안 해 주고, 놀랐잖아.”
“……오빠는?”
병원에서 깨어난 재희의 첫마디는 늘 같았다.
“오빠는…… 어디에 있어?”
입술을 한 번 안으로 말았다 놓은 선영이 달래듯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본부장님은 요즘 아주 바쁘신가 봐. 어떻게든 오려고 하셨는데 일정 조율이 안 된 모양이야.”
“내가 쓰러졌다고 말했는데도?”
“으응…….”
재희의 표정에 선영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늘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와 있던 강헌이, 없다.
그는 오지 않았다. 자신이 쓰러졌는데도.
“그리고 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이 살벌하게 감시하는 모양이더라고. 당분간은 자유롭게 못 움직이실 거라고 하셨어.”
아니, 거짓말이다.
회장님이 보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여자 때문이다.
오빠의 아내. 이름이 천사빈이라고 했던가.
“지금 오빠한테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