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56)화 (56/90)

제56화

오늘, 강헌의 모든 말이 야릇하게 들린다.

호텔로 스파를 받으러 가자는 말일 텐데…….

자신을 바라보는 진한 눈빛과 탁하게 내려앉은 음성이 자꾸만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던 사빈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또 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강헌의 속을 더 뜨겁게 덥히는 것도 모르고.

출발하기 전.

강헌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싼 뒤 이번에는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은 뒤 차를 출발했다.

‘연기를…… 너무 잘하는 것 같아…….’

누가 보면 그가 정말로 자신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하는 행동 모두 진짜 아내를 대하는 듯 다정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빈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은 왜일까.

***

세인트마리아 호텔로 다시 돌아온 두 사람.

[스파가 유명한 다른 호텔도 있습니다.]

[어쩐지 거기가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그리고 저희에게는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는 내심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저희’라는 말로 그녀와 한데 묶인 것이 기꺼워서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설마 또 연진우와 만나겠나.

오늘 아침, 강헌은 비서에게 연진우에 대해 가벼운 조사를 지시했다.

메신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하면 그는 세인트마리아 호텔 사장의 조카라고 했다. 이따금 사고를 칠 때면 호텔에서 직원으로서 짧으면 하루, 길면 사나흘간 노동을 한다고.

지금은 그 기간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만나고 있는 사람 없음. 혼담이 오가는 집안도 아직 없음.]

마지막 문단이 강헌의 마음에 걸렸다. 꼭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빈만을 바라본 것 같아서.

그들이 헤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빈을 낚아챌 것만 같아서.

오늘은 마주치지 않기를, 더는 사빈의 머릿속에 남지 않기를 강헌은 바랐다.

“사빈아.”

그러나 강헌의 바람이 무색하게 로비에 서 있던 진우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선배?”

강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남자가 왜 아직도 여기에.

“안녕하십니까.”

“……예.”

두 남자는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왜 여기에 서 있어요?”

그러다 진우가 사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헌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서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교육받는 중이야. 호텔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래요? 아예 진로를 정한 거예요?”

“응. 일해 보니 나와 맞을 것 같아서. 그리고 네가 우리 호텔 단골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사빈은 씩 웃는 진우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오전에도 들렀단 얘기는 들었어. 연락하지 그랬어.”

사빈이 호텔을 방문하면 곧바로 제게 얘기해 달라고 직원들, 특히 베이커리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얘기를 해 놓은 터라 진우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필 그녀가 방문한 시간에 진우는 이모와 면담 중이었다.

“강헌 씨랑 잠깐 들른 거예요.”

천문호 의원의 딸이 남편과 함께 베이커리에 들렀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반가우면서도, 슬펐다.

그리고 지금 손을 붙잡고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통증이 인다.

“베이커리에 다시 가려고?”

“아니요, 스파 받으러 왔어요. 결혼한 날에 받았던 기억이 좋아서요.”

결혼한 날. 그 단어가 기어이 진우의 심장을 세차게 들이박고야 말았다.

“……내가 얘기해 놓을게. 마음껏 쉬다 가.”

“고마워요, 선배. 잘됐죠, 강헌 씨?”

그녀가 올려다보며 동의를 구하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사빈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네요. 당신 쉬고 싶어 했으니까.”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서 다정함과 은근한 유혹이 느릿하게 묻어났다.

그것을, 사빈과 진우 모두 느꼈다.

그녀의 볼이 달아올랐고,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맙군요. 아내가 이 호텔의 스파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강헌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진우에게 말했다.

“안내는 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알고 있으니.”

진우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럴 수는 없죠. 두 분이 직접 오셨는데요. 제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에서 전류가 튀었다.

그러다 이내 강헌의 입꼬리가 위로 슬며시 올라갔다.

“그럼 부탁할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갑자기 생각을 바꾼 강헌이 미심쩍었으나 진우는 사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쪽으로.”

진우가 그들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스파룸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다.

사빈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강헌의 손이 스르륵 내려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당겼다.

‘……!’

사빈이 놀란 표정으로 강헌을 올려다보자 그가 눈썹을 한 번 올렸다 내리더니, 이내 허리를 위아래로 살살 쓰다듬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야릇한 감각이 솔솔 피어올라서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강헌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자 그가 손깍지를 껴 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사빈의 시선에 강헌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더니 이내 진우를 보았다.

“…….”

역시나.

강헌의 예상대로 진우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접촉과 야릇한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었다.

애써 숫자가 올라가는 전광판을 올려다보고는 있지만 온 신경이 이리로 쏠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그는 손깍지를 낀 사빈의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감히 자신의 아내를 넘보려 하다니.

계약으로 맺어졌다고는 하나, 어쨌든 우리는 부부다.

작은 승리감에 도취했던 강헌은 문이 열리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재희가 서 있었다.

‘맞다, 서재희……!’

진우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사빈과 강헌을 신경 쓰느라 배우 서재희가 이 시간에 예약을 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서재희의 소속사 측에서 어제저녁 스파 예약 문의를 해 왔고, 호텔 측은 기꺼이 프라이빗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답했다.

그게 지금 이 시간이었는데…….

‘젠장, 이모한테 무지 깨지겠다.’

“잠시만 여기서 대기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사빈과 강헌에게 양해를 구한 진우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실장과 재희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을 착각해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쪽에 서 계신 분들께서는 서재희 씨께서 이곳에 방문하셨다는 것을 발설하실 분들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스파숍 실장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재희는 진우와 직원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서서 강헌과 사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맞잡고 있는 손이었다.

나와는 닿는 것도 꺼려하면서.

어쩌다 손을 잡으면 몇 초 만에 슬그머니 놓아 버렸으면서.

그런데 저 여자와는 손깍지를 끼고 있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마치 늘 잡았던 것처럼.

“저, 고객님?”

“…….”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

한편, 재희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빈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 몇 번이고 꼽히는 여자는 넋이 나간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강헌과 맞잡은 손이었다.

‘아……!’

그제야 인지한 사빈이 얼른 그의 손에서 제 손을 휙 빼냈다.

재희만큼이나 굳어 있던 강헌은 그런 사빈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고쳐 떴다.

“저, 저는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얘기 나누세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사빈이 진우에게 다가가려 했다.

강헌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 버렸다.

“가, 강헌 씨?”

사빈의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벌어진 재희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강헌 씨…….

오빠의 이름을 부르는구나.

재희는 이를 꽉 악물었다. 주먹을 쥔 손부터 시작한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느라 입가에 힘을 주니, 비틀린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

주차를 마친 선영이 올라온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린 순간.

재희는 보았다.

강헌의 눈에 어린 다정함을.

그의 입가에 서린 나른한 미소를.

자신이 그토록 원했으나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눈빛과 표정이었다.

분명 해가 떠 있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버려진 기분이었다.

강헌이 엘리베이터 안에서처럼 사빈을 제 뒤로 세웠다.

“강헌 씨, 이거 놔주셔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가 그녀의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빈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강헌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좀…… 아파 오는데…….

“사빈 씨가 이대로 혼자 들어가면 분명 우리에 대해 말이 나올 겁니다.”

사빈을 바라보고 있는 강헌은 이쪽으로 꽂히는 재희의 시선을 느꼈지만 결국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강헌이 진우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 저쪽으로…….”

진우는 실장에게 눈짓을 한 뒤에 사빈과 강헌을 안으로 안내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이니…….”

“저 사람들은.”

“네?”

사빈과 강헌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채로 재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다.

“자주 오나요?”

“아, 두 분께서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셔서요. 그날 아주 만족하시고는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혹시 두 분을 아시는지……? 결혼하실 당시 기사가 크게 나갔었거든요.”

재희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서 실장이 쫓아오며 연신 사과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빠가 그 여자의 어깨를 감쌌어.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어.

그 여자한테 웃어 줬어.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았는데…….

머리에서 윙윙,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선영이 나왔다.

“재희야, 왜 아직도 여기에 서 있어?”

선영의 물음에도 재희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은 이만 갈래.”

“응? 왜? 여기 오고 싶다고 했잖아. 끝나고 디저트도 먹을 거라면서.”

“병원으로 갈 거야.”

***

진우는 그들을 상담실로 안내했다.

무드 있는 조명 아래 은은한 향기가 맴도는 고급스러운 공간에는 간단한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상담 직원이 따라붙었다.

“이곳에서 천천히 프로그램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여기 직원이 상세히 설명을 해 줄 겁니다.”

강헌을 흘깃 올려다본 사빈이 진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선배. 10분만 저희끼리 있어도 될까요?”

“아…… 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줘. 근처에 있을게.”

“네, 고마워요.”

“고맙긴…… 미안하다. 내가 아직 미숙해서.”

“괜찮아요.”

사빈을 바라보던 진우는 무어라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진우와 상담 직원이 문을 닫으며 나간 뒤.

“강헌 씨.”

“…….”

“강헌 씨,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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