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강헌이 눈을 고쳐 떴다.
“어디입니까?”
“서점에 가고 싶어요. 서재 책장이 많이 비어서요.”
“그러죠.”
강헌은 두말하지 않고 그녀와 서점으로 향했다.
사빈은 그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따뜻하다.
이 손을 잡고 있으면 어떤 위험이라도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기대하지 말자는 다짐이 무색하게 그녀는 자꾸만 강헌에게 끌렸다.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합니까?”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재미만 있으면.”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덜컹. 사빈은 제 심장이 흔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서점에는 주로 아이와 그림책을 보러 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았다.
“강헌 씨는 경영이나 경제 관련 서적만 읽을 줄 알았어요. 하긴, 회사를 운영하려면 다방면에 밝아야 하겠네요.”
사빈은 추리소설 코너를 흘깃 보았다.
천문호와 추연실은 추리소설 읽는 것을 금했다. 피와 시체, 살인 등이 나오는 것은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사빈은 학교 도서관에서 몰래몰래 읽었다.
“저쪽으로 가 보죠.”
웨딩밴드를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강헌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었다.
우연일까? 아님 배려일까.
어느 쪽이든 설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추리소설 코너에 나란히 서서 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추리소설 좋아하세요?”
“아직 읽어 본 적 없습니다. 사빈 씨가 추천하는 게 있다면 읽어 보죠.”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재밌게 읽은 책 있습니까?”
“아, 저는…… 아, 여기에 있다. 이걸 시작으로 입문했거든요. 워낙 스테디셀러라…….”
그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린 것도 잠시.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사빈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강헌은 그런 사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편 모음집이라 쉴 때 읽기 좋을 거예요.”
강헌은 책을 들고 있는 사빈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제목도 괜찮군요.”
그의 숨결과 음성이 귀에 닿자 몸이 움찔거리며 파르르 떨려서, 사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그의 엄지가 사빈이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아래로 살짝 내리며 벌렸다.
“깨물지 말아요. 상처 나니까.”
제대로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사빈은 대답 대신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손가락에 아쉬움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이것도 사죠.”
강헌이 사빈의 손에 들린 책을 빼내 와 제가 들고 있는 몇 권의 책 위에 올렸다.
자신이 고른 책 몇 권을 챙기는 그를 보니 사빈은 뿌듯해서 웃음이 다 났다.
같은 취향을 공유한다는 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구나.
간질거리는 떨림은 그래서겠지.
“일단 이 정도만 사죠.”
“네, 좋아요.”
“사빈 씨도 골라요.”
“음, 그럼 저는…….”
입가에 힘을 주고 진지하게 책을 고르는 사빈이 귀여워서 강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종종 서점에 함께 와야겠다.
사빈과 함께 고른 책으로 책장이 채워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그를 설레게 했다.
그들은 책 일곱 권을 계산하고 서점을 나섰다. 여전히 손은 꼭 잡은 채였다.
“또 하고 싶은 거 없습니까?”
“음…… 사실 있긴 있는데. 강헌 씨가 번거로울 것 같아서요.”
“말해 봐요.”
“저희 첫날밤에 한 건데…….”
순간 평화로웠던 분위기에 성적인 긴장감이 섞여 들었다.
아, 하고 눈을 고쳐 뜬 사빈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첫날밤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첫날밤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괜히 사빈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그, 이상한 뜻이 아니라요! 세인트마리아 호텔 스파를 받고 싶단 뜻이었어요.”
“스파 좋아합니까?”
“사실 그날 처음으로 스파를 받아 본 건데 참 좋더라고요. 아로마 향기도 좋고, 마사지도 시원하고.”
“그럼 갑시다.”
“지금요?”
사빈의 놀란 표정에도 강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좋아요. 강헌 씨 시간만 괜찮다면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은근히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사빈 씨와 보낼 생각이라.”
나른한 속삭임이 사빈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와 짜릿한 전류가 되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왜 속이 더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왜 야릇하게 들릴까.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헌은 무감한 한 손에는 책을 담은 봉투를, 한 손에는 사빈의 손을 붙잡은 채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가장 앞줄에 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부스 안에서는 가장 안쪽에 서게 되었다.
점점 밀려드는 사람들.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거리.
그러다 한 남자의 등이 사빈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강헌은 그녀의 손을 당겨 제 뒤에 서게 했다.
사빈을 다른 남자와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그녀의 심장은 다시금 떨려 왔다.
언제쯤이면 강헌의 행동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아마…… 이혼할 때쯤이 아닐까.’
강헌이 앞에 버티고 서 있어 준 덕분에 여유 공간이 생겨서 사빈은 비교적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든든하다. 뭔가…… 정말 남편 같은 느낌.
‘남의 편이 아니라 내 편.’
적어도 지금까지 강헌은 양가 부모님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히 감사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속 좁게 기분 상하지 말아야지. 서재희 씨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지켜 주겠다고 말한 건 나니까.’
재희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하게 메어 왔지만 사빈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1층에서 반이 빠져나가고 지하 1층에서 나머지 반이 빠져나갔다.
지하 4층까지 가는 사람은 사빈과 강헌뿐이었다.
공간은 널찍해졌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단둘이 남아 그의 너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빈은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
많이 가깝네. 하지만 지금 떨어지는 것도 좀 이상할 것 같고.
다행히 아주 어색해지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차로 향했다.
사빈은 뒷좌석에 책이 담긴 봉투를 싣는 강헌에게 말했다.
“이번엔 제가 운전할게요.”
“편하게 있어요.”
“너무 강헌 씨만 힘들게 한 것 같은데…….”
안전벨트를 착용하려던 강헌은 그대로 벨트를 놓고 몸을 돌려 사빈을 보았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어……?’
점점 다가오는 강헌을 보며 사빈은 눈을 꼭 감았다.
“지금 여기에서 사빈 씨와 몇 번이고 키스를 나누고 나서도.”
“…….”
“난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적어도 체력적인 면에서는.”
사빈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짙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제 얼굴 가까이에 와 있었다.
아주 조금만 턱을 치켜들어도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그녀는 숨을 죽였다.
“못 믿겠다면 확인해 보겠습니까.”
탁하게 가라앉은 강헌의 목소리가 무척…… 야하게 들린다.
갑자기 어제 서재에서의 시간이 머릿속에 펼쳐지자 아랫배에서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긴 박 여사님도 안 계시잖아요.”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사빈의 목소리에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엔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이 없다. 그러니 구태여 ‘확인’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물러설 생각이 들지 않는가.
검은 동공이 물고 늘어지듯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여긴 아무도 없지.”
목을 긁는 듯한 낮고 굵은 음성에 사빈의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왜…… 아쉽다는 생각이 들까.
“진짜처럼 보이려면.”
스륵. 입술을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그녀의 눈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진짜처럼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장이 쿵쿵 뛴다.
키스를 하기 직전 강헌의 눈빛은 늘 저렇게 내려앉곤 했다.
“제가…… 싫다면요?”
움찔. 잘게 흔들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사빈이 입술을 열었다.
“그럼 하지 않으실 건가요?”
“……당연히.”
입가에 힘을 꾹 주던 강헌이 옅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사빈 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굳이 약속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표정과 눈빛으로 충분했다.
어둑한 차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실수할 뻔했군.’
그리 생각한 강헌이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사빈에게 매어 주었다.
달칵, 하고 버클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빈이 말했다.
“하지만 동의해요. 강헌 씨 생각에.”
사빈이 조금 발갛게 물든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완벽함은 디테일에서 나온다고 어디서 들었거든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한 순간.
강헌은 사빈의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다.
확신하는 순간.
강헌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채웠던 안전벨트의 버클을 풀면서 그대로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벌어져 곧바로 맞물린 입술 사이로 매끈한 혀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갔다.
유연하게 휘감기는 축축한 근육은 줄곧 서로를 기다렸다는 듯이 깊게 얽혔다.
“으응…….”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신음 소리에 강헌의 단단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더욱 딱딱해졌다.
그는 손으로 사빈의 뺨을 감싸며 그녀의 턱을 조금 더 아래로 벌렸다.
“하아…….”
집어삼킬 듯 깊숙이 다가오는 강헌에게 압도된 그녀는 그의 옷깃을 붙잡은 채 그의 움직임에 간신히 응했다.
잠시 숨을 쉬기 위해 틈을 벌리고 떨어지면 강헌은 무섭게 따라붙으며 제 숨결을 앗았다.
뺨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길고 흰 목덜미로 내려갔다. 엄지로 그곳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길에서 야릇한 의미가 묻어났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사빈의 가슴이 더욱 가쁘게 오르내렸다.
“강헌 씨…….”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애타게 저를 부르는 사빈을 보니 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던 강헌은 다시 깊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기다란 은사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를 이었다.
“가죠.”
붉게 달아오른 사빈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강헌이 나직이 말했다.
“호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