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일요일은 박 여사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그 말은 두 사람이 아침마다 벌이는 연극을 쉬어도 되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행이면서도 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같은 마음을 품은 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에 갈 건가요?”
사빈의 물음에 강헌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바쁘실 텐데 저 혼자 가는 것도 괜찮아요.”
커피를 마시려 컵으로 뻗어 가던 강헌의 손이 멈칫거렸다.
“다른 것도 먹어 보고 싶어서요. 어제는 마들렌밖에 못 먹어 봤으니까.”
“…….”
“진우 선배가 다른 것도 맛있다고 했거든요. 참, 어제 호텔에서 선배를 봤다면서요?”
“그 사람과 연락했습니까?”
토스트에 블루베리 잼을 바르며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메시지가 왔거든요. 마들렌이랑 초코 케이크 맛있지 않냐고.”
초코 케이크라는 단어에 강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라즈베리 케이크 사 온 거, 진우 선배 때문이죠? 절 두고 베리공주라고 놀리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친밀함이 묻어나는 사빈의 목소리와 표정이 강헌은 거슬렸다.
그러나 재희에게 사다 준 초코 케이크가 걸려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서재희 씨 사다 주려고 갔을 텐데 나까지 생각해 줘서.”
흰 머그컵을 쥔 강헌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평소라면 향기롭다 여겼을 커피의 향기와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부턴 안 그러셔도 돼요. 번거롭잖아요.”
하나도 번거롭지 않다, 하나도.
오히려 재희에게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일이 번거로웠다 말하면…… 사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같이 가죠, 호텔.”
“네? 괜찮으시겠어요?”
“어제 함께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귀찮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볼 생각이거든요. 좀 지루할 거예요.”
강헌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왜 자꾸 혼자서 호텔에 가려는 것일까.
심장이 욱신거린다.
자신은 그녀를 필요로 하는데, 그녀는 자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여.
하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강헌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싫었다.
“먼저 옷 갈아입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먹고 일어나요.”
다이닝룸을 나가는 강헌의 너른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빈은 눈을 깜빡거렸다.
‘같이 가겠다는 건가?’
어젯밤, 우리의 사이는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는 걸까.
그러다 그의 말을 떠올린 사빈이 피식,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힘없이 웃었다.
일전에 강헌은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에서 진우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차갑게 말했었다.
[격 떨어지는 짓 하지 말아요. 천사빈 씨가 하는 모든 행동에 기조그룹의 위신이 달려 있다는 것, 앞으로는 절대 잊지 말라는 소리야.]
진우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안 되기 때문이겠지.
‘기대하지 말자.’
한때 사빈은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기대를 했었다.
내가 말을 잘 들으면, 공부를 잘하면, 착하게 굴면 언젠가 정말로 나를 사랑해 줄지도 몰라.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깨달았다.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세상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부모님뿐이었다는 것을.
사빈이 배운 것은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강헌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여기서 그만두어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사빈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때마침 옷을 다 갈아입은 강헌이 나오고 있었다.
“아침은 다 먹었습니까?”
“네.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거실에 있겠습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사빈은 옷을 골랐고, 강헌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의 눈에 이사 온 첫날, 사빈이 관심을 보이던 조형물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미술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사빈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 낼 것 같았다.
작품을 볼 때의 그녀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열린 마음으로 열심히 배울 준비가 된 사람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어떠한 틀에 가둬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의 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발휘하지 않도록 단단히 막을 두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막은……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가장 단단하게 세워지는 것 같다.
왜일까. 사빈이 어릴 적 아팠기 때문에 정신적·금전적으로 힘들었던 걸까. 그래서 잠시 그녀를 소홀히 대한 적이 있었을까.
월요일이면 비서가 천문호의 가족관계에 대해 보고를 올릴 것이다.
특히 과거와 관련된 것은 아주 상세히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기에 뭔가 윤곽이 잡힐 것만 같았다.
만약 사빈이 과거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강헌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녀의 아픔을 죄다 알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사빈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녀는 도무지 제게 기댈 것 같지 않다.
……연진우라면 그녀가 기댈 수 있었을까.
진우가 사빈에 대해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빈은 어떨까.
그녀 역시 연진우를 마음에 품고 있을까. 대학 시절,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선배에게.
강헌의 표정이 점점 굳어질 무렵.
문이 열리고 연하늘색의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크림색 스커트를 입은 사빈이 밖으로 나왔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죠.”
두 사람은 차고로 향했다.
“제가 운전할게요. 휴일에 외출하니까 강헌 씨 피곤할 것 같아서요.”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강헌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녀가 타기를 기다렸다.
‘내가 열어도 되는데.’
속에서 간지러운 감정이 올라와 입을 안으로 만 사빈이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탁. 문을 닫아 준 강헌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서서히 올라가는 차고의 문 아래로 검은색 세단이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점심 먹은 후에 디저트를 사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겠어요? 피곤할 텐데.”
강헌은 앞을 주시하는 채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약하게 보입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억지로 무언가를 하면 피곤을 느낄 테니까요.”
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억지로 나가는 것 같습니까?”
“……적어도 기꺼울 것 같지는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침묵했다.
차창 밖을 바라보던 사빈의 눈에 호텔의 건물이 보일 무렵.
“천사빈 씨는 내가 무섭습니까?”
이 질문이 뭐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담.
“내가…… 두렵습니까?”
어쩐지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린 것처럼 들리는데. 기분 탓이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신 사빈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맞잡았다.
“계약이 깨질까 봐 두려워요.”
“…….”
“전 이 계약이 원만히 유지되다가 원만히 해지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어제는 한 걸음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우리 둘 사이에 깊은 바다가 놓인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고 짙은 바다가.
검은 세단은 매끄럽게 호텔로 들어섰다. 직원에게 키를 넘기고 주차를 마친 두 사람은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선 순간.
강헌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사빈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행동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원만히 계약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아…… 네, 그러네요.”
사빈도 살짝,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마디마디에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손깍지를 껴 왔다.
“부부니까.”
그의 말에 사빈의 볼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들은 손을 잡은 채 베이커리로 향했다.
“종류별로 다 사요.”
“그럼 너무 많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사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먹고 싶을 때마다 사러 오는 게 좋을 듯해요.”
강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남자를 이곳에 자주 만나러 오겠다는 뜻인가?
혹 사빈이 자신의 뜻을 간파한 것일까.
“아무래도 집에서 보관했다가 꺼내 먹으면 맛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꼭 제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사빈이 덧붙이는 말에 그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이제 강헌의 기분은 사빈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그러죠.”
“같이 오시게요?”
……펴지기가 무섭게 그의 마음이 다시 구겨졌다.
“바쁘시잖아요.”
“아내와 보낼 시간은 낼 수 있습니다.”
손쓸 틈도 없이 사빈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진열되어 있는 빵을 고르는 척했다.
‘가, 갑자기 훅 들어오고 그래.’
역시 연애를 오래 한 사람은 노련하구나.
자신처럼 연애를 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고차원에 있는 사람이었다, 강헌은.
사빈은 베리 계열이 들어간 것을 전부 고르고, 치즈 케이크를 골랐다.
잠시 초코 케이크에 눈이 갔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직은 먹고 싶지 않다.
1년 후라면 또 모를까.
강헌은 포장을 마친 직원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보기와 달리 무겁습니다.”
강헌은 그녀의 손을 고쳐 쥐며 계속해서 봉투를 들었다.
하나도 안 무거워 보이는데.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이런 작은 매너에도 마음이 술렁거린다.
‘연애 세포 면역력이 너무 없는 탓이야.’
휴. 어떻게든 천문호와 추연실의 눈을 피해 연애를 해 봤어야 했는데.
잘생긴 남자와 많이 연애를 해 봤다면 강헌에게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의 옆모습을 흘깃 바라본 사빈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어떤 남자를 만나 왔더라도 강헌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나라 톱 배우인 서재희의 곁에 있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니.
‘참 잘난 사람이야.’
저 외모에, 저 능력에, 저 배경에.
이런 사람과 잠시나마 부부로 살았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지. 씁쓸하게 되새겼다.
“점심 먹고 가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강헌에 놀란 사빈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빈 씨?”
“아, 미, 미안해요.”
“뭐가 말입니까?”
강헌 씨를 훔쳐보고 있었거든요.
“아, 그게…… 너무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애써 둘러댄 사빈의 말에 강헌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자신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인가 보다.
그 생각을 바꿔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난 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어디요?”
“백화점.”
***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서경백화점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이용하는 YW백화점은 이곳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뭐 살 거라도 있나 봐요.”
“계약을 잘 이어 가려면 서로의 취향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취향? 사빈은 곧 강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의류, 가전, 가구, 보석 등 층층마다 들르며 사빈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고르라고 했다.
하지만 사빈은 섣불리 고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에도 없습니까?”
“하지만 집에 다 있는걸요.”
그녀의 말마따나 그들의 신혼집에는 없는 게 없었다.
최신형 고급 가전과 가구, 색깔·계절·소재별로 부족함 없이 걸려 있는 드레스룸의 옷들과 보석, 시계들.
입주하기 전 그의 지시로 채워 놓은 것들이었다.
“내가 고른 것이니 사빈 씨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뇨, 전 다 마음에 들었어요.”
신기할 만큼 강헌이 채워 놓은 물건들은 사빈의 마음에 쏙 들었다.
흰색의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공주풍을 좋아하는 추연실과는 다르게, 강헌이 고른 것들은 심플하면서도 포인트가 확실했다.
“그럼, 저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