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53)화 (53/90)

제53화

사빈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러시는지…….”

“대화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해야 하니까요.”

대화하고 싶단 말을 뭐 저렇게 설레게 하는지.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얼굴, 안 보여 줄 겁니까?”

그의 음성이 점점 짙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싫다고 말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넘어올 기세였다.

그녀의 심장이 쿵, 쿵, 세차게 박동했다.

작게 숨을 들이마신 사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처럼 보여서, 그녀는 덮고 있는 이불을 꼭 쥐었다.

“내가 기분 나쁘게 했습니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아서.”

“…….”

“그런 게 있다면 바로 말해 줘요. 고칠 테니.”

강헌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함께하는 동안은 얼굴 붉히지 말고 편한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사빈 씨 말에 동의합니다, 나도.”

그의 말에 기뻐해야 하는데.

하지만 사빈은 도저히 솔직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서재희 씨한테 케이크를 사다 주면서 내 것까지 사 온 것에 기분이 나빠서요,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유가 없지 않나.

강헌이 재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왜 섭섭하고 서운한, 심지어 원망스럽기까지 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강헌은 어떨지.

“그냥. 갑자기 부담이 돼서요.”

“뭐가 말입니까?”

“출근해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강헌 씨를 보니까 어머님이 떠오르고, 미술관이 생각나서요.”

엄한 이유를 대며 사빈은 제 마음을 숨기려 했다.

“정말 그런 이유입니까?”

“……네.”

사빈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선을 피하면 그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채 진짜 이유를 캐물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에 일하던 갤러리에서 낙하산이었거든요. 제대로 일해 본 적이 없어서요. 부끄럽지만.”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강헌의 눈가가 조금 누그러진다.

“정말 그런 이유라면 됐습니다. 내게 기분 나쁜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호흡을 맞춰 가야 하니까.”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호흡을 맞춰 가자는 그의 말이 야릇하게 들려서다.

‘내가 정말 미쳤나 보다.’

“사빈 씨.”

이제는 그가 자신의 이름만 불러도 기분이 이상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역시, 아까 서재에서의 여파가 큰 모양이다.

“네, 그럴게요. 그럼 이만 자도 될까요?”

“안아도 됩니까?”

오늘, 강헌은 제 심장을 짓이기려 작정을 했나 보다.

짙어진 시선으로, 그윽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불안하다기에.”

“…….”

“걱정하는 것 같아서.”

사빈은 입술 안쪽 연한 살을 씹었다.

‘거절해야 하는데.’

아까 서재에서처럼, 사빈은 이번에도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괜찮다고, 됐다고 해야 하는데.’

일기장에도 쓰지 않았는가.

자신은 제 주제를 알고 있다고.

그러나 저 너른 품에 안기면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한지 알아 버린 몸은 사빈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럼 아주 조금만.”

강헌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 품에 안긴 사빈이 이 소리를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천천히 팔을 벌렸다.

“……이쪽으로.”

사빈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꼼지락꼼지락 느리게 다가갔다.

몸이 맞닿기 직전.

그녀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강헌은 얼른 사빈의 목 뒤로 손을 넣어 팔베개를 해 주고는 그녀의 몸을 휙, 끌어와 감싸 안았다.

싱그러운 향기가 훅 끼쳐 오자 비로소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이 사라졌다.

이 여자는 왜 이토록 향기로울까.

안으면, 분명 심장은 빨리 뛰는데 왜 이토록 따뜻하고 평온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강헌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한편, 그의 품에 안긴 사빈 역시 긴장과 평온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떨려 미치겠는데 안심이 된다.

사빈은 강하게 울리는 강헌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그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사빈이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그러자 강헌이 더 강하게 안아 온다.

“사빈 씨는 잘할 겁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낮은 음성이 다정하다.

“……고마워요.”

품에 안긴 사빈이 입술을 움직이자 가슴이 간지러웠다. 꼭 작은 새가 포르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강헌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호흡했다.

어쩜 이토록 사랑스러운가.

시간이 조금 흐르자, 굳어 있던 사빈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고 호흡이 편안해졌다.

그녀가 제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아, 강헌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나른하게 풀어진 분위기.

문득 강헌은 지금이라면 사빈이 어떤 질문에도 선선히 대답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빈 씨.”

“……네.”

“미국에서는 즐거웠습니까?”

흠칫. 사빈의 몸에 다시 힘이 잔뜩 들어가자 강헌은 달래듯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듣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던 시기를.”

사빈은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설렘이 불안으로 바뀌어 가슴을 쿵, 쿵, 때렸다.

“그게 왜 궁금하신 건지…….”

“가장 아팠던 시기라니까 신경이 쓰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시기는 맞다. 엄마 아빠를 잃은 직후 천문호의 집으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지금도 몸이 안 좋은 겁니까? 의원님께서 여전히 걱정하시던데.”

걱정이라.

사빈은 속으로 비웃었다. 천문호가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걱정은 걱정일 테다. 다만 강헌이 생각하는 대로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아니라, 투자 상품에 흠집이 나서 가치가 떨어지면 어쩌나 저어하는 것이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부모님이야 언제나 자식을 걱정하시지요.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강헌 씨를 걱정하시는 것처럼요.”

사빈의 등을 쓸어내리던 커다란 손이 순간 뚝 멎었다.

걱정이라…….

그래, 걱정은 할 것이다. 죽은 큰아들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면 어찌하나, 그래서 혹 다른 형제의 자식에게 경영권이라도 넘어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 것이다.

“……그렇군요.”

“……네.”

두 사람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답을 내놓으며 각자의 사정을 감추었다.

강헌은 다시 그녀의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누구와 있었습니까? 그 시기에 의원님 내외는 대선 때문에 무척 바빴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지 보모와 지냈어요.”

“무척 각별한 사이겠군요.”

“뭐, 당시에는……. 지금은 연락이 끊어져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요.”

천문호와 추연실은 이런 상황을 대비라도 한 것인지, 어린 사빈을 앉혀 놓고 몇 번이나 ‘미국 생활’에 대해서 주입시키곤 했다.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라’면서 마치 사빈이 진짜로 미국에서 지낸 것처럼 느껴지도록 말이다.

지금 와선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사빈은 알 수 없었다.

“아파서 외출은 못 했겠군요.”

“네, 집에만 있었어요. 워낙 염려하셨던 터라.”

미국 얘기가 계속될수록 사빈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때 얘긴 그만하면 안 될까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기거든요.”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만 놔주셔도 돼요.”

사빈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강헌은 다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 강헌 씨.”

“이대로 자면 안 됩니까?”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실은, 내가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안 좋은 일…… 서재희 씨에 관한 걸까?

“아직 진정이 안 된지라.”

“혹시.”

망설이던 사빈이 입을 다물었다.

재희의 이름을 꺼내면 그와 끌어안고 누워 있는 이 신기루 같은 시간이 와장창 깨질 것 같았다.

“사빈 씨?”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연인과의 트러블로 인한 불안을, 계약관계인 아내와의 포옹으로 풀다니.

역시 강헌은 이상한 사람이다.

아, 어쩌면 자신은 재희 대신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자신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누구와도 이토록 친밀한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사빈은 이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설령 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편의 품일지라도.

가슴이 아파 온다. 남편의 연인을 부러워하는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그녀는 외롭고 지칠 때면 이 품에 거리낌 없이 안겨 위로받겠지. 나처럼 어쭙잖은 핑계를 대지 않고도.

“사빈 씨.”

“……네.”

“오늘처럼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강헌은 여전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의 다정함은 사빈에게는 독이었다. 치명적이나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맹독.

“……강헌 씨도.”

내가 서재희 씨를 대신할 수 있다면.

“말씀하세요.”

언제든.

“우리는 파트너니까.”

사빈의 말이 강헌의 머리를 세게 울렸다.

그녀가 나를 받아 주는 이유는 단지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계약을 잘 이행하고 싶은 마음에.

1년 후 이혼을 위해서.

어둠 속에서 그는 쓰게 웃었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끌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신기루 속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타인과의 접촉, 특히 여성과의 접촉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며 살아온 지난날이 거짓말 같다.

그러나 신기루면 어떤가.

적어도 제 품에 안긴 그녀의 온기는 진짜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 따스함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고 강헌은 확신했다.

1년 후면 평생 신기루를 좇으며 살아갈지도 모르겠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파트너로서.”

그의 말에 사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잘 자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다정한 음성에 가슴이 시려서 그녀는 대답 없이 잠을 청했다.

해가 뜨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지금을 가슴에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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