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파티시에한테 부탁해 볼게.]
[고마워요, 선배. 내일 남편이랑 케이크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그때 다른 거 먹어 볼게요.]
이번엔 답장이 방금 전보다 몇 분 늦게 왔다.
[그래…… 오면 연락해. 맛있게 먹고.]
[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선배.]
휴대폰을 내려놓은 사빈은 다시 창가로 향했다.
바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서재희 씨에게 다녀온 모양이구나.
그럼 그렇지.
강헌이 자신을 위해서 세인트마리아 호텔에 들러 디저트를 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감동했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중얼거려 보았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서재희 씨는 초코 쉬폰 케이크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어쩐지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의 초코 쉬폰 케이크는 한동안 먹지 않게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진우와 메시지를 주고받기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강헌이 반갑거나 설레지 않았다.
“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강헌은 물과 컵을 담은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감사해요.”
낮게 가라앉은 사빈을 보며 강헌이 입을 열려던 찰나.
“박 여사님은 퇴근하셨나요?”
“예.”
“그렇군요. 그럼 전 다시 하던 거 마저 할게요.”
사빈과 계속 같이 있으려고 생각했던 강헌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주춤거리던 새, 그녀는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요.”
“네.”
사빈은 그에게 시선도 던지지 않고 즉답한 뒤 태블릿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강헌.
“내가 실수했습니까?”
움찔. 사빈은 눈에 힘을 주며 짐짓 태연하게 답했다.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혹 아팠다면 미안합니다.”
사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그녀가 작게 심호흡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강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방금 전까지는 분명 그녀도 자신을 잘 받아들였는데.
갑자기 냉랭해진 사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강헌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빈의 모습을 눈에 담은 강헌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
혼자 남은 사빈은 태블릿을 내려 두고 열쇠로 서랍의 문을 연 뒤, 오렌지색 일기장을 꺼내어 펼쳤다.
또, 남편의 연인에게.
펜을 쥔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초코 케이크를 좋아하나 봐요. 강헌
멈칫한 사빈이 강헌의 이름 위에 줄을 쫙쫙 긋고는 다시 이어 썼다.
그 사람이 사다 준 것 같은데. 그쪽 케이크만 살 것이지, 마들렌은 왜 사 온 걸까요? 차라리 아예 사 오지나 말지.
그럼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더러 당신을 잊지 말라는 뜻인가 봐요. 헛된 상상에 빠지지 말라고, 자꾸 일깨워 주나 봐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난 충분히 알고 있거든요.
내 주제를 말이지. 사빈이 자조하며 펜을 내려놓았다.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연인에게 줄 케이크를 사러 간 김에, 계약으로 결혼한 아내에게 줄 마들렌을 사다 준 남자에게.
“……다정하게 굴지 마요, 이강헌 씨.”
말한 그대로 일기장에 쓴 뒤 펜을 내려놓으려던 사빈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쥐었다.
당분간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의 초코 케이크는 먹지 않을 생각이에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그쪽도 별로 내켜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노트를 탁, 덮은 사빈은 서랍 안에 잘 넣어 둔 뒤 열쇠로 잠갔다.
몇 번이나 잘 잠겼는지 서랍을 당겨 본 후 열쇠를 등 뒤에 있는 책장 아래쪽에 꽂힌 책 아래에 숨겼다.
창가에 있는 화분 밑에 둘까 했지만 박 여사가 물을 주기 위해 밖으로 가지고 나갈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기장에 쓰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기는 하네.”
기지개를 쭉 켠 사빈은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강헌이 가져온 물병과 컵을 보았다.
……목이 막히니까, 그러니까 마시는 것뿐이야. 절대 이강헌 씨 행동이 수고로워서가 아니라.
마들렌 몇 개를 먹다 보니 정말로 목이 막히기는 했다. 책상에서 일어난 사빈은 소파로 가서 컵에 물을 따랐다.
강헌은 차가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다정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행동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때에 따라서 다정함은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사빈은 오늘 깨닫게 되었다.
자꾸만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은 사빈은 천천히 물을 넘겼다.
***
한편, 자신의 서재로 향한 강헌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분명 사빈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달뜬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며 제 옷깃을 붙잡고 매달리던 사빈을 떠올리자, 금세 몸이 뜨거워졌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후.”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사빈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많이 아팠나.
최대한 부드럽게 어루만졌는데, 워낙 살결이 여린 사빈이다 보니 작은 자극에도 아팠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배려를, 하고 생각하던 찰나.
Rrrrrrr-.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본 강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재희였다.
또다시 사빈을 떠올리는 시간을 방해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받지 않으면 또 난리가 날 것이다. 그가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 대거나, 아니면 선영을 시켜서 또 저를 불러내려 할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통화를 하는 것이 나았다.
“여보세요.”
- 오빠.
“……응.”
- 뭐 하고 있어?
“서재야. 일하고 있어.”
- 오빠 집 가 보고 싶다.
순간 강헌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되묻고 말았다.
“여길 왜.”
- 아, 난…… 그냥 오빠가 사는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당황한 재희가 말끝을 흐리자, 강헌은 상대편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쉬었다.
- ……오빠.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말이라.”
잠시 침묵하던 재희.
- 내가 가면 안 되는 거야?
“……뭐?”
- 그 여자가 우리 사이 다 안다면서. 그 여자 외출했을 때 잠깐 둘러보면 안 돼?
“재희야.”
- 왜? 아, 차라리 그 여자 있을 때 갈까? 우리 사이가 어떤지 똑똑히 봐야 헛된 희망 같은 거 안 품을 거 아냐.
강헌은 재희에게 들리지 않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회장님께서 보낸 사람이 도처에 깔려 있어.”
- 그럼 사진이라도 찍어 줘.
“재희야.”
- 그것도 안 돼? 사진은 괜찮잖아.
“나 사진 찍는 거 싫어해.”
- 알아! 내가 오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딨어! 그래도 날 위해서 찍어 주면 안 돼?
재희의 억지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강헌은 사빈을 보고 싶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그 싱그러운 향기를 맘껏 들이켜고 싶었다.
“늦었어. 스케줄 있다고 들었는데 이만 자는 게 좋겠다.”
- 사랑한다고 말해 줘.
이따금 재희가 조를 때면 해 주던 말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그저 사랑해, 세 음절만 내뱉으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강헌은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 오빠. 듣고 있어? 사랑한다고 말해 줘. 그럼 끊을게.
말해야 하는데, 왜 사빈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몸이 굳는 것인지.
“……회장님께 전화 들어온다. 이만 끊을게.”
- 오빠, 오……!
강헌은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꼭 넥타이에 목이 칭칭 감긴 기분이었다.
이럴 때 사빈을 보면 답답했던 속이 단번에 풀릴 텐데.
그러나 참아야 한다. 그녀가 자신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니.
강헌은 시계를 보았다. 사빈이 언제쯤 침실로 향할지 생각하면서.
***
이제 자러 가야 하는데.
시계를 본 사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9시 5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강헌은 아직 서재에 있을까? 아님 침실로 내려갔을까?
‘먼저 내려가서 자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강헌은 저보다 더 바쁜 사람이다. 주말이긴 하지만 할 일이 많을 테니 아직 서재에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사빈은 서재의 불을 끄고 문을 나섰다.
맞은편에 있는 강헌의 서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리를 들어 볼까?’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고 다가간 사빈이 문에 귀를 대는 순간.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앗……!”
몸이 앞으로 쏠린 사빈은 강헌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사빈 씨?”
“아, 내, 내려가셨나 하고요.”
“지금 막 내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강헌은 사빈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가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왔다.
“사빈 씨도 끝났나 봅니다.”
“아, 네, 저도 방금…….”
이런 바보!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럼 내려가죠.”
강헌은 여전히 사빈의 어깨를 감싼 채로 말했다.
“아, 저…… 놔주셔야…….”
“어두우니까. 또 넘어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방금은 넘어질 뻔한 게 아닌데.
하지만 그의 기척을 알기 위해 엿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빈은 그의 커다란 손에 어깨가 감싸인 채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이 1층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끄고 오겠습니다.”
침실의 문을 열어 준 강헌이 거실에 있는 스탠드를 끄러 갔다.
그사이 얼른 안으로 들어간 사빈은 욕실로 향했다.
빨리 씻고 곧바로 자야지.
자신이 씻고 있는 사이 강헌이 먼저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옷을 벗었다.
***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강헌은 안경을 쓴 채 스탠드 불빛 아래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오는 사빈을 보며 그가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다 씻었습니까?”
“아, 네……. 강헌 씨는 안 씻으세요?”
“옷 갈아입으면서 씻었습니다.”
빨리도 씻었네요. 당신이 씻고 있는 사이에 잠든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전 먼저 잘게요.”
그의 옆자리에 누운 사빈은 이불을 어깨까지 푹 들쓰고 눈을 감았다.
“…….”
제게 등을 돌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헌이 안경을 벗었다.
달칵. 협탁 위에 안경을 내려놓고 그 옆에 태블릿을 두었다.
그리고 스탠드의 불을 껐다.
순식간에 몰려든 어둠이 그들을 감쌌다.
“사빈 씨.”
낮은 음성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네.”
“이쪽 봐요.”
“왜, 왜요?”
사빈은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얼굴 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