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50)화 (50/90)

제50화

무감정하던 강헌의 눈빛과 음성에 감정이 어린다.

진우는 그것을 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불쾌감.

진우의 생각대로, 강헌은 자신의 아내에게 호의를 가진 남자에게 강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대학 선배라고 해도 앞으로는 내 아내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거나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그건 좀…….”

“아내에게 피해가 되니까.”

진우의 말문이 막히자, 강헌의 음성에 좀 더 힘이 실렸다.

“우리 결혼을 지켜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내보이면 곧장 물어뜯을 인사들이 많다는 뜻이지.”

“…….”

“연진우 씨가 그 빌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내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고.”

대치하듯 마주 보던 두 사람.

진우는 불쾌감과, 그리고 묘한 성취감이 뒤섞인 강헌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끝마다 아내, 아내 거리기는.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자랑 맞구나.’

하긴. 사빈 정도 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때 직원이 포장을 마쳤다고 알려 왔다.

강헌은 그럼, 하고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포장한 것을 받아서 베이커리를 빠져나갔다.

혼자 서 있던 진우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사빈이 맞아 주는 집으로 돌아갈 강헌이 부러웠다. 심장이 덜컹거릴 만큼.

***

“여기.”

강헌이 선영에게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 인장이 찍힌 봉투를 건네주었다.

“안 들어가세요?”

“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재희가 본부장님 오시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선영은 재희를 보고 가라며 눈빛으로 강헌을 붙잡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빈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집에서 쉴 거라고 했다. 곧 출근을 해야 하니 이렇게 놀 수 있는 날은 별로 없을 거라면서.

‘마들렌 좋아할까.’

아까 저보다 사빈을 더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하던 진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베리가 들어간 것은 사지 않았는데.

[대학 땐 늘 블루베리, 라즈베리, 크랜베리만 먹어서 베리공주라고 놀렸었는데.]

살 걸 그랬나.

이제 와서 다시 세인트마리아 호텔로 가기는 늦었고.

돌아가는 길에 눈에 띄는 곳에서 베리류가 들어간 케이크를 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강헌은 문득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영을 보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놀람이라기보다는 경악에 더 가까웠다.

왜 그러느냐는 강헌의 시선에 선영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아아, 하고 어색한 소리를 내며 목을 긁었다.

“아, 본부장님께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서요.”

강헌이 저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는 재희를 볼 때도 딱딱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나름대로는 다정하게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눈빛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선영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강헌은 재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해서 재희는 매일 그의 애정을 확인하려 들었고, 선영은 온갖 달콤한 말로 재희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방금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던 강헌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고선 무의식적으로 웃은 듯했다.

재희가 그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강헌은 재희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그 결혼한 여자인가?’

선영은 두 사람의 결혼 기사에 게재되었던 사진을 떠올렸다.

강헌과 손을 붙잡고 미소를 짓고 있던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였다.

재희와는 아주 다른 인생을 살아온 여자.

선영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아니, 너무 뻔뻔하잖아.’

재희에게 강헌과의 과거를 들은 그녀로서는 그가 재희를 배신한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어도 모자랄 판에, 곱게 자란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게다가 두 사람은 정략이지만 어쨌든 결혼을 한 상태다.

강헌이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면 재희는 꼼짝없이 버려지는 셈이었다.

“재희는 가끔씩 잠에서 깨서 울어요. 그때가 생각난다면서.”

강헌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선영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그렇게 깨면 적어도 1시간은 벌벌 떨면서 잠을 못 자요. 너무 괴롭다고. 무서워 죽겠다고.”

“…….”

“본부장님께서 바쁘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재희를 좀 더 신경 써 주시면 좋겠어요. 본부장님 안부 전화 한 통에 재희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세요?”

목이 졸리는 듯 숨이 턱 막힌다.

숨을 짧게 들이마신 강헌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죠.”

“들어가실 거죠?”

그러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강헌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만 가는 게 좋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럼.”

그 말을 남긴 채 강헌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본부장님……!”

선영이 애타게 외쳤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은 매정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재희가 울부짖었다.

“거봐, 오빠는 역시 그 여자한테 가잖아! 이제 나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야…….”

“재희야, 본부장님이 바쁘셔서 그래, 응?”

“날 버리고 어떻게, 어떻게 그 여자한테……!”

바닥에 주저앉은 재희가 제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선영이 간신히 말렸다.

“재희야!”

“그 여자를 만나야 돼…….”

재희의 눈에서 초점이 나갔다.

그 여자를 만나야겠어. 만나서, 오빠와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 줄 거야.

***

강헌은 집으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베이커리에 들러 베리가 들어간 케이크를 샀다.

평소였다면 재희가 머릿속에 틀어박혀서 두통이 일었을 텐데.

마들렌과 케이크를 좋아할 사빈을 생각하니 어느덧 재희는 까맣게 잊혔다.

“오셨어요, 본부장님.”

그를 맞아 준 사람은 박 여사였다.

“아내는 어디에 있습니까?”

“2층 서재에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퇴근하십시오.”

“네, 본부장님.”

고개를 숙이는 박 여사를 지나친 강헌이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곧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2층에 있는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그리고 일부러 문 앞에서 목을 가다듬어 자신이 온 것을 알린 다음 노크를 했다.

- 네, 들어오세요.

사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갑갑했던 속이 단번에 뚫렸다.

강헌은 표정을 갈무리한 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헌 씨?”

자신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빈을 보자마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박 여사님인 줄 알았어요.”

“내가 방해했습니까?”

“아뇨, 미술관 작품들 살펴보고 있던 중이에요.”

“저녁은 먹었습니까?”

“네, 간단히. 강헌 씨는요?”

자신을 챙기는 사빈의 물음에 강헌의 기분이 더욱 나아졌다.

“나도 먹었습니다. 괜찮으면 이거 먹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예요?”

“세인트마리아 호텔에서 산 마들렌과 케이크입니다.”

사빈은 눈을 고쳐 떴다. 강헌이 자신을 위해 디저트를 사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늘 미팅이 거기에서 있었나 봐요?”

“그 근처였습니다.”

강헌은 소파 테이블 위에 마들렌과 케이크를 펼쳐 놓았다.

“케이크는 봉투가 다르네요?”

“이건 다른 곳에서 샀습니다.”

“아, 라즈베리다!”

사빈이 기쁜 듯 눈을 접으며 웃었다.

‘……사 오길 잘했군.’

강헌과 사빈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올라왔나 봐요.”

사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킷은 벗고 먹는 게 편할 것 같은데.”

“그러겠습니다.”

강헌은 재킷을 벗어서 자신의 옆에 두었다.

“잘 먹을게요.”

사빈이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촉촉한 빵 사이로 은은한 레몬 맛이 감돌았다.

“음, 정말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강헌 씨도 하나 먹어 보세요.”

강헌도 사빈을 따라서 마들렌을 입에 넣었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입에도 맛있게 느껴졌다.

자신 있게 권하던 진우의 모습이 떠오르자 속에서 불퉁한 감정이 툭 솟아올랐다.

‘허세는 아니었군.’

사빈은 동봉된 일회용 포크로 라즈베리 케이크를 조금 덜어 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와아, 이것도 맛있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신기해요. 제가 베리 종류를 좋아하거든요.”

“……그렇습니까.”

사빈이 크림이 묻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네. 그래서 진우 선배가 베리공주라는, 얼토당토않은 별명까지 지어 주었다니까요.”

순간 강헌의 눈가가 움찔 떨리더니 이내 차갑게 굳었다.

그 별명을 그 남자가 지어 준 거였나.

사빈과 잘 어울리는 귀여운 별명이라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블루베리, 라즈베리, 크랜베리가 들어간 것만 찾아 먹었어요. 그 근방 디저트 가게는 다 가 본 것 같아요.”

“……그 남자와 함께 갔습니까?”

“아뇨, 대개 혼자 갔어요.”

사빈의 대답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것도 잠시.

“근처는 혼자 갔고, 진우 선배가 추천했던 멀리 있는 가게는 같이 갔어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둘이 멀리 있는 가게를 같이 갔다고?

그건 데이트가 아닌가.

“선배가 맛집을 엄청 잘 알았거든요. 별명도 맛집 나침판이었어요.”

사빈은 그때를 회상하며 즐겁다는 듯 말했다.

“……많이 친했나 봅니다.”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같은 동아리였거든요.”

“동아리?”

“인하모니라는 클래식 연주 동아리 모임이었어요. 전 사람들하고 별로 어울리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진우 선배만 먼저 다가와 주었죠.”

장학금을 타기 위해, 그리고 천문호의 감시 때문에 사빈은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공부만 해야 했다.

진우가 아니었더라면 대학 시절이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진우 선배가 마들렌이 맛있다고 했던 말 때문에 그 호텔까지 가서 사 온 거예요?”

재희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으므로 강헌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고마워요, 정말. 거기 마들렌 꼭 먹어 보고 싶었거든요.”

사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불쾌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강헌의 귀에 제 심장이 쿵, 쿵, 크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혹 사빈에게도 들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그 호텔 다른 케이크도 맛있다는데. 나중에 가 봐야겠어요.”

“내일 갑시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사빈의 입술에 크림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본 강헌이 손을 들었다.

“케이크를 먹으러 같이 가자는…….”

사빈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강헌의 엄지가 아랫입술에 닿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훔친 강헌은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달군요.”

제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혀로 손가락을 핥는 강헌은 관능적이었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빈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달지 않은 편이에요.”

“내게는 많이 답니다.”

강헌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가, 강헌 씨?”

“사빈 씨는 아닌가 보군요.”

“네, 저는 괜찮…….”

강헌이 그녀의 말을 끊듯이 말했다.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확인을……?”

“당신이 먹는 것과 내가 먹는 것의 맛이 다른 것 같아서.”

그의 강렬한 눈빛에 사빈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박 여사님이 밖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강헌은 이미 퇴근했을 박 여사를 구실 삼아 다가갔다.

사빈이 눈을 깜빡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라즈베리의 달콤한 향기가 진해졌다.

“허락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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