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사빈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강헌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
순간 이 회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강헌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나오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그만큼 진지하고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사빈 씨와 저는 결혼한 사이이긴 하나 아직 서로를 알아 가는 중입니다.”
강헌의 낮은 음성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사빈의 마음을 꽉 붙잡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다시 이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각자의 일도 있습니다. 저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 중이고, 사빈 씨도 부서장을 맡아 업무를 배워 가고 있습니다. 제 능력은 이미 입증된 바 있고, 사빈 씨 역시 훌륭한 인재라는 평을 듣는 것으로 압니다.”
“흐음.”
이 회장이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이런 시기에 임신을 하게 된다면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부모가 되는 당사자가 할 일이 따로 있을 테니까요.”
마치 브리핑을 하듯 힘 있는 음성과 흔들림 없는 표정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강한 믿음을 갖게 했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이도 때를 놓치면 안 되는 법이다.”
“저희는 아직 젊습니다. 또한 지금이 기조그룹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떻게.”
“대부분 재벌가 며느리들은 시집을 온 순간부터 바깥 활동을 줄이고 내조에만 전념합니다. 그러다 아이를 낳은 후 예술 문화 쪽 계열사에서 직책을 맡아 이따금 언론을 통해 얼굴을 비치는 것이 전부죠.”
어느새 이 회장은 마치 회의장에 앉아 있는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해서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사빈 씨가 자신의 능력을 떨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기조그룹은 여타 재벌가와는 다른 진보적인 의식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사빈의 동공이 순간 크게 열렸다.
테이블 밑으로 강헌이 손을 잡아 온 탓이다.
차가운 제 손을 덥히는 크고 따뜻한 손.
“현재 기조그룹은 이미지 개선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선대에서 쌓아 올린 오만하고 고지식하다는 이미지를 깨기 위해서요.”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수안구로 이사하고, 또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준 이유입니다. 그것을 흡족하게 여기셨듯, 이번에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브리핑 아닌 브리핑이 끝났다.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긴 이 회장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사빈이 손에 힘을 꾹 주자, 강헌이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살살 쓸었다.
애정 표현 같단 생각에 사빈은 붉어진 뺨을 숨기려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가.”
하나 갑자기 불려서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들었다.
“네, 아버님.”
“잘할 수 있겠니?”
“아직 많이 부족해서 배우는 중입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널 위해서 브랜드 경영 부서를 신설했단다. 사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만든 자리다. 네가 아이를 가지고 일을 하지 않게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저 이름뿐인 감투였지.”
이 회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사빈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저 시선을 피하면 안 된다고.
천문호와 아주 많이 닮아 있지만, 그러나 이 회장은 천문호가 아니다.
그래서 사빈은 용기를 끌어모아 이 회장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됐군.’
이 회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본 강헌은 고비를 넘겼다고 확신했다.
“잘하겠구나.”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이 회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눈을 피하는 사람은 결코 믿지 않았다.
설령 피가 섞였다고 해도.
[얼굴만 봐도 내 씨구나. 그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검사는 할 거다.]
이 회장이 보육원을 처음 찾은 날, 자신을 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강헌이 보아도 이 회장과 자신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친아버지를 만났다는 감동보다 두려움과 경계심이 더 컸다.
미소 띤 입가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한 눈빛에서 그가 얼마나 위험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느껴졌다.
이 남자는 강하다.
설령 피가 섞인 존재라 해도 쓸모없다는 판단이 서면 가차 없이 쳐 내 버릴 만큼.
그래서 강헌은 더더욱 자신을 품평하듯 바라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강한 자에게 약한 자는 그저 지워질 뿐이다.
강헌은 그 누구에게도 눌리고 밟힐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눈싸움을 하듯 몇 초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다.
[쓸모 있겠군.]
그 한마디에 강헌은 살았다. 만약 그때 이 회장의 눈을 피했다면 그날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큰아들이 사고로 죽어서 후계자가 강헌뿐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쓸모없는 사생아는 그의 인생에 있어 오점에 불과했으므로.
“그럼 너희를 믿고 내 아이 문제는 양보하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강헌은 사빈의 입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아버님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거슬린다. 무척이나.
“안사람도 기대가 아주 크단다. 며느리가 말귀가 아주 밝다면서. 하나를 가르치면 셋을 알아듣고 다섯으로 응용을 한다고.”
일 이야기에 사빈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막상 일을 배우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갤러리에서 근무할 때도 몰랐던 적성을, 결혼 후 시어머니 밑에서 업무를 배우며 깨닫다니.
겨우 하루뿐이었지만 사빈은 숨 돌릴 틈 없이 아주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단순히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것과, 미술관을 경영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사빈은 추연실처럼 그림을 보러 다니는 것보다,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전시하고 세상에 어떻게 알릴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잘 맞았다.
그리고 추연실의 밑에서 단순히 인맥 혹은 재산을 늘리기 위한 도구로써 바라본 그림과, 그린 이의 사상과 시각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서 바라보는 그림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즐거웠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빈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기대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님.”
이 회장이 눈썹을 한 번 치켜세웠다.
“천 의원님께서 많이 혼낸 모양이다.”
“……예?”
“말끝마다 아버님이라고 꼭 붙이는구나. 물론 듣기엔 참 좋다만.”
조금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황한 사빈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상견례 때처럼.
“아…… 듣기 불편하시다면 시정하겠습니다.”
이 회장이 껄껄 웃었다.
“아니다. 불편은 무슨. 시정할 필요까지야.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아버님.”
무의식적으로 나간 말에 사빈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자 이 회장은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우리 며느리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오, 음식이 오는 모양이군.”
문이 열리고 주문한 요리가 테이블 위에 가득 펼쳐졌다.
그때까지도 손을 붙잡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야 천천히 서로를 놓았다.
강헌은 묵묵히 사빈을 챙겼다. 물을 따라 주기도 하고, 멀리 있는 음식을 가까이 가져와 주기도 했다. 생선의 뼈를 발라 주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서재희 씨에게 해 주던 대로 하는 거겠지?’
아. 사빈은 돌멩이가 마음을 툭, 치고 가는 느낌에 눈을 고쳐 떴다.
뭐지? 이 기분은.
하지만 작은 자극은 곧 지나갔다.
사빈은 재희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이 회장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제대로 속이고 있나 보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빈은 강헌이 수저 위에 얹어 준 생선을 맛있게 먹었다.
***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
박 여사의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아침마다 관계를 가지며, 박 여사가 출근하고 난 후 최소 10분에서 최대 30분 안에 행위를 끝낸다고 한다.
피임을 하지 않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임신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도 했다.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본부장님과는 다르게, 작은사모님께서는 얼굴에 티가 나는 편이십니다.]
박 여사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이 회장은 강헌과 사빈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열기가 피어올랐으니까.
특히 강헌의 눈길이 아주 뜨거웠다.
재희와 함께 있을 때도 보지 못했던 눈빛과 표정이었다.
“흐음. 이제 슬슬 그 물건을 완전히 떼어 낼 때가 되었군.”
***
한동안 평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사빈은 생각보다 새로 일하게 된 미술관에서 잘 적응해 나갔고, 두 사람의 뜨거운 연기는 아침마다 계속되었다.
퇴근 후.
강헌은 호텔 내 베이커리 카페를 방문했다.
재희가 부탁한 디저트를 사기 위해서다.
초코 쉬폰 케이크를 고른 그는 눈에 들어온 레몬 마들렌도 함께 계산했다.
케이크는 재희에게, 그리고 마들렌은 사빈에게 줄 심산이었다.
이러면 누가 본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이강헌 본부장님?”
그리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강헌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돌아보니 연진우가 서 있었다. 유니폼이 아니라 슈트를 입은 채로.
“뒷모습 보고 혹시나 싶어서 와 봤는데, 정말 본부장님이셨네요.”
유니폼을 입었을 때도 멋이 났던 진우는 슈트를 갖춰 입자 지나가는 사람이 고개를 돌릴 만큼 근사한 모습이었다.
“사빈이 사다 주시려고요?”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싫었다.
예, 하고 짧게 대답한 그는 몸을 돌려 직원이 포장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초코 쉬폰 케이크랑 레몬 마들렌 사셨구나. 혹시 라즈베리 파이는 어떠세요? 사빈이도 좋아할 것 같은데.”
“아내는 그런 종류를 싫어합니다.”
“그래요? 입맛이 바뀌었나? 대학 땐 늘 블루베리, 라즈베리, 크랜베리만 먹어서 베리공주라고 놀렸었는데.”
강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사빈이 베리류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그냥 질러 본 건데, 패착이다.
“…….”
그의 눈빛에 진우는 흠칫했다. 언제 봐도 참 무서운 얼굴이라니까.
잘생기긴 했지만.
슈트를 입은 오늘, 진우는 자신의 모습에 꽤나 자신이 있었다.
거울을 보아도 스스로가 제법 잘생겨 보였다.
이모의 명령으로 카페 내 매장을 둘러보던 그는 저 멀리에서도 우월하게 빛나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넓고 단단한 어깨와 등은 운동깨나 했다는 자부심을 가진 진우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또, 저보다 긴 다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헌의 다리는 저만큼이나 길었다.
게다가 강헌과 자신 모두 슈트를 입고 있어서 더 잘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사빈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강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왜 연진우 씨가 궁금해하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