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또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하읏…….”
어제보다 더 갈급하고 거친 키스에 사빈이 매달리듯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강헌은 그녀를 정신없이 밀어붙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억지로 잊으려는 사람처럼.
점점 뒤로 밀린 사빈은 이번엔 벽이 아니라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건 좀 많이 위험할 것 같은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강헌의 손이 파자마 안을 파고들었다.
이제 그녀는 강헌의 커다란 티셔츠와 바지가 아니라 새로 구입한 실크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단추가 빠른 속도로 풀려 나갔다.
상의가 양옆으로 펼쳐지자 뽀얀 살결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강헌…… 씨, 이렇게까지는…….”
사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멈춰야 하는데. 더는 위험한데.
‘너무 뜨거워.’
그의 더운 숨결이 목, 어깨, 쇄골, 가슴, 그리고 납작한 복부를 타고 내려가며 흔적을 남겼다.
“하아…….”
봄을 맞아 터지는 꽃망울처럼,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자꾸만 신음이 터졌다.
그 소리가 강헌을 더욱 자극했다.
길고 가는 다리를 들어 올린 그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 안 돼요, 거긴……!”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가 기어코 입술로 머금었다.
사빈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현실적이지 않은 감각에 휩싸여 경련할 뿐이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같고, 반대로 힘이 모조리 빠져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흐…….”
지나친 쾌감으로 인해 몽롱하게 풀린 동공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강헌은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빈이 제 아래에서 황홀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보았던 그 어떤 광경도 이보다 색정적일 수는 없으리라.
그의 목울대에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 낮은 신음이 울렸다.
사빈과 입술을 겹친 그가 곧장 혀를 밀어 넣고 제멋대로 휘저었다.
작고 여린 몸이 파르르 떨며 반응할 때마다 그의 몸 역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녀의 안은 어떨까.
맞닿은 살결만큼 뜨거울까.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이 혈관을 타고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사빈의 몸을 훑어 내리는 강헌의 손은 노골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가 움찔움찔 떨며 저를 꼭 붙잡을 때마다 사빈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욕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더, 아주 조금만.
실크 바지를 끌어 내린 강헌이 새하얀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잠깐……. 안 돼요…….”
사빈이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열망으로 가득 찬 검은 눈동자가 시선으로 애원했다.
제발, 조금만 더.
하나 사빈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깊은 숨을 내쉰 강헌이 다시 바지를 올려 주고 제가 풀어 헤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제, 제가 할게요.”
떨리는 사빈의 목소리에도 그는 묵묵히 단추를 다 채워 주고는 그녀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혔다.
놀라 커진 두 눈이 사랑스러웠다.
붉게 달아오른 두 뺨과 입술도, 그 안에 보이는 앙증맞은 혀도.
방금 전 자신의 입술과 혀가 닿은 그녀의 몸은 마치 과실로 만들어진 듯 말랑하고 부드럽고 달았다.
자꾸만 그 안쪽까지 궁금해진다.
어떤 맛일까. 온도는 어떨까.
사빈이 어떻게 반응할까.
“강헌 씨…… 왜 이렇게 앉는…….”
커다란 손이 사빈의 목을 감싸 당겨 또다시 입술을 포갰다.
흉포하던 방금과는 달리, 아이스크림을 핥는 듯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방금 전, 거칠게 저를 탐할 때보다 왜 지금이 더 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사빈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빈의 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그녀의 허리 뒤로 손깍지를 끼었다.
그들은 박 여사가 출근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
“괜찮습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빈이 가쁘게 숨을 내쉬자, 그가 검지로 눈가를 닦아 주며 물었다.
“……괜찮아지는 중이에요…….”
간신히 흘러나온 희미한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다시 어둡게 내려앉았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탐하고 싶다.
제 속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욕구와 욕망이 사빈을 향해 잔뜩 갈기를 세웠다.
“강헌 씨야말로 괜찮아요?”
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제와는 뭔가 다른 것 같아요.”
“……다르다?”
“불안한 것 같아요. 쫓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빛이 들어찬 것처럼, 강헌의 검은 동공이 순간 크게 열렸다.
“그렇게 느꼈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몰아붙이듯 키스하긴 했지만…… 어딘가 조금 달랐다.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냥 제 느낌일 뿐이에요.”
강헌은 놀랍고 두려웠다.
입술과 온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다니.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검은 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반응을 볼 새도 없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서서히 안정되던 마음이 다시 초조해졌다.
강헌은 다시 한번 그녀를 잡아당겨 키스했다.
‘오늘, 키스가 너무 잦은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빈은 그를 받아들였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쾌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무섭기도 했다. 이 선을 넘어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한 번 선을 넘게 되면,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박 여사님 출근하셨겠어요.”
시계를 보니 6시 반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준비하고 나갈까요?”
사빈의 말이 아쉽고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강헌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함께 있으면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사빈의 뒷모습을 좇던 강헌은 이내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렸다.
그녀와 이 짧은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출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눈과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강헌의 머릿속엔 사빈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출근은 잘 했을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점심에 제게 또 연락을 해 줄까.
“……미치겠군.”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문득 그는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차갑기로 소문난 이강헌 본부장이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얘, 어딘가 강헌 씨 닮았어요.]
[얘도 어딘가 사빈 씨를 닮았습니다.]
발리에서 쿠킹 클래스를 듣고 난 후에 받은 신부 인형 마그네틱이었다.
[어디가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
[이 눈이랑 코가 닮았습니다. 튀어나온 입술도.]
[얘도 강헌 씨랑 엄청 똑같거든요? 차갑고 딱딱하고 정 없어 보이는 게.]
뾰로통해져서 입술이 불툭 튀어나왔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는 마그네틱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똑같은데.”
다시 봐도 귀엽기만 하다.
강헌은 그것을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마치 진짜 사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발리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계속 가지고 다녔다.
처음엔 그냥 서재에 장식해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집에 가면 진짜 사빈을 볼 수 있으니 차라리 회사에 가져다 놓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세인트마리아 호텔에서 디저트를 사다 달라던 재희의 요구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마그네틱을 다시 서랍 깊은 곳에 곱게 넣어 두었다.
“……후.”
재희와 헤어지려고도 해 봤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도 나는 네 곁에 늘 있을 것이며, 네가 필요로 하면 달려갈 것이라고.
그러니 서로를 옭아매기만 하는 이런 관계는 그만두자고.
다음 날, 선영에게 연락이 왔다.
[보, 본부장님, 재희가, 흐윽…… 벼, 병원에…….]
다급히 달려가니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헌은 창가로 다가갔다.
사빈을 만난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평생 재희의 곁에 머물러야 하는 자신이 이런 감정에 빠진 것은 분명 죄악이다.
그러나 강헌은 처음으로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사빈은 심지어 그녀가 미소로 속을 감출 때에도 조화가 아니라, 생화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향기가 났다.
하지만 그 끝엔 슬픔이 가느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강헌은 그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비서에게 지시했다.
천문호와 추연실에 대해, 그리고 사빈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알아 오라고.
특히 사빈이 LA의 별장에서 요양하던 무렵에 대해서.
‘뭘 감추고 있는 것일까.’
그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사빈의 모습을 최대한 상세히 떠올리려 노력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그녀.
제게 집중될 때마다 흔들리던 동공.
말하기 전에는 늘 천문호와 추연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곧바로 꾸며 낸 듯 아름답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가장 이상한 것은 호칭이다. 말끝마다 붙이는 아버지, 어머니.
예절 교육의 일환이라기엔 지나치게 훈련된 느낌이 든다.
결정적으로 그의 오빠들은 제 부모를 그렇게 깍듯이 부르지 않는다.
[이제 한 가족이 되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매제. 사부인께 드리려고 엄마가 뭐 하나 준비하고 계시거든. 좋아하실 거야.]
[아빠, 제 사업계획서도 매제한테 보이는 게 좋겠죠?]
천문호가 작게 눈치를 주자 곧바로 호칭을 아버지, 어머니로 바꾸긴 했지만 그들은 사빈만큼 행동거지에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은 그토록 철저하게 예의를 가르치고, 그녀와 나이 차가 좀 나고 건강한 오빠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키웠다?
어딘가 어색했다.
어쩌면 과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그 자신이 말했듯, 가풍은 다 다르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직감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혹시 사진 속 그 여자가 진짜 사빈의 엄마일까?
그녀는…… 천문호 의원의 사생아인 걸까?
***
이 회장은 나란히 앉은 아들 내외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 봤다. 둘이 아주 다정한 점심시간을 보냈다고.”
“예.”
사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이 회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친근함을 내세우는 것도 좋지.”
사진이 퍼지고 나서 강헌뿐만 아니라 기조그룹과 천문호 의원을 향한 관심도 높아졌다.
“내 손주 볼 날이 머지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