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눈가가 붉게 물든 재희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 봐야 해.”
“오빠.”
“점심에 올라간 사진으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야. 뒤에 누가 붙었을지도 모르고.”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재희도, 그리고 강헌 스스로도 놀랐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재희는 강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블랙홀처럼 새까만 눈동자.
함께 보육원에서 지냈을 땐 투명하다 생각했던 그의 눈동자는 기조그룹의 후계자가 된 이후로 서서히 탁해지더니, 이내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변했다.
오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오빠 안에 나는 확실하게 있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희는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강헌이 자신을 만날 때마다 깊은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을.
지친 강헌이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면…….
‘안 돼, 절대로.’
끔찍한 생각을 지워 낸 재희는 애써 웃었다.
“응, 알았어. 그래야 회장님이 의심하시지 않을 테니까.”
“……그래.”
“매일 오빠만 기다려. 오빠가 없으면 나도 없으니까.”
재희의 말이 족쇄가 되어 강헌을 옭아맸다.
목이 졸리는 듯 숨이 막혔다. 부푼 허파가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삼킨 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나 세인트마리아 호텔 디저트 먹고 싶어.”
세인트마리아 호텔. 사빈과 자신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
이제는 그렇게 기억되는 장소.
재희와 디저트를 먹은 곳이 아니라.
“내일 사다 줄 수 있어?”
“회장님과 저녁 약속이 있어.”
“그럼 오빠 시간 되는 날에. 기다릴게.”
재희는 불안할 때면 이런 식으로 강헌의 애정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가 바쁜 일정을 쪼개어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말이다.
“초코 쉬폰 케이크 사다 줘. 응? 그게 맛있대.”
초코라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그녀가 떠올랐다.
점심 때 사빈이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었지.
그 모습을 떠올리며 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가 도착했다는 말에 2층 자신의 서재에 있던 사빈이 아래로 내려갔다.
강헌이 막 현관을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요?”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오늘은 저녁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박 여사가 여전히 집에 있었다.
박 여사를 힐긋 본 강헌이 다가온 사빈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좀 늦었습니다.”
볼이 붉어진 사빈은 간신히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있었다.
“일이 많았나 봐요.”
“조금.”
“저녁 안 먹었죠?”
강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 여사가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그럼 씻고 와요. 난 박 여사님 도와서 상 차리고 있을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박 여사가 사빈에게 말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작은사모님.”
“아, 그래도…….”
그때 강헌이 말을 꺼냈다.
“옷 갈아입는 걸 좀 도와주겠습니까? 할 말도 있고.”
“그럼 그럴게요.”
박 여사는 다이닝룸으로, 사빈과 강헌은 침실로 향했다.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도와 달라고 한 거 아니었나?’
하여튼 이상한 이강헌 씨.
침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말없이 다가온 그가 사빈의 옆에 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안아도 됩니까?”
“네? 가, 갑자기 무슨.”
“박 여사님이 있으니까.”
지금은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무리 박 여사가 집에 있다지만 곧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 하는데, 굳이 지금?
“지금은 안 해도 되지 않나요? 곧 나가야 하잖아요.”
“…….”
“박 여사님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녀의 대답에 강헌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렇겠군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소하는 사빈을 보며 마른세수를 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가죠.”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아니, 다이닝룸까지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나?!’
사빈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테이블 위에는 영양, 그리고 색감까지 고려한 반찬들이 접시에 곱게 담겨 있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개를 살짝 숙인 박 여사가 메이드 방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헌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고, 그런 그의 눈치를 조금 살피던 사빈도 수저를 들었다.
“오늘 어머님께서 미술관 내부를 안내해 주셨어요.”
“예.”
“저는 브랜드 경영 부서의 부서장이 되었고요.”
“예.”
“그리고 다음 주에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셨어요.”
산부인과라는 말에, 줄곧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사빈의 얼굴을 보았다.
“임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후.”
짙은 한숨을 내쉰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제가 말씀드리죠.”
“네……. 그런데 강헌 씨. 무슨 일 있나요? 표정이 안 좋아서요.”
미간을 설핏 찌푸린 그가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사빈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파고들 생각은 없다.
그들은 진짜 부부가 아니니까.
침묵 속에서 식사는 진행되었다.
사빈은 별로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점심시간을 보낸 이후로 그녀는 강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러나 강헌은 아니었다.
사빈이 신경 쓰이고, 의식되고, 자꾸만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게 되었다.
동시에 재희의 존재를 떠올리자 속이 답답해졌다.
“내일 아버님과 식사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을까요?”
사빈의 맑은 목소리에 강헌의 표정은 도리어 굳어졌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대답이 늦는 걸 싫어하십니다.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기색도.”
그의 말에 사빈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이 회장은 천문호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유 여사와 추연실이 닮아 있던 것처럼.
사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추연실에 의해 끌려갔던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죄다 서로 비슷했다.
외모와 성격이 조금 다를 뿐 관심사, 대화 주제, 사고방식은 무척이나 흡사했다.
사빈은 마치 이 회장이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벌써부터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또 아이 얘기를 꺼내겠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
어두워진 사빈의 얼굴을 본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저런 표정을 짓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이 얘기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두 분께 잘 말씀드릴 테니.”
아, 하며 사빈이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졌다.
“티가 났어요?”
“조금.”
“……상견례 때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신 줄 알았어요. 그렇게 아이를 원하실 줄은.”
“회장님은 실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말에 뼈가 있고 계산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천문호의 앞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미술관 일은 할 만할 것 같습니까?”
사빈은 눈을 고쳐 떴다. 제 얘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아직 첫날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비서를 붙여 주셨어요.”
말이 비서지 기실 감시역이다. 그것을 사빈도, 강헌도 잘 알았다.
“책잡히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틈날 때마다 연락하죠.”
“네?”
“책잡히지 않게.”
강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에 그의 눈가 근육이 살짝 풀어졌다.
***
식사가 끝난 후.
박 여사는 부엌을 정리한 뒤 방해하지 않고 곧바로 퇴근하겠다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복도 양쪽 끝에 있는 각자의 서재로 헤어졌다.
“10시쯤에는 자려고 합니다.”
“그럼 저도 그때 내려갈게요.”
강헌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도와줄 건 없습니까?”
“네? 어떤?”
“……미술관 업무라든가.”
잠깐의 틈을 두고 그가 조금은 압니다, 하고 덧붙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요. 비서님이 보내 주신 자료 훑으면 될 것 같아요.”
그가 아쉬움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요.”
“아…… 그럴게요.”
“그럼.”
강헌이 먼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정한 건지 아닌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사빈도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문을 닫은 그녀는 곧장 데스크로 가서 서랍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지 서랍 틈 사이에 끼워 놓은 종이가 기억하는 모양 그대로 있었다.
열쇠는 가방에 늘 가지고 다녔다. 퇴근 후 실내복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연 사빈은 일기장을 꺼냈다.
오렌지색 노트를 펼친 그녀는 펜을 들었다.
이상한 이강헌 씨.
같은 필압으로 썼는데 어쩐지 강헌의 이름 세 글자만이 진하게 보이는 것 같다.
다정한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사각사각. 서재에 글씨를 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서재희 씨에
사빈은 방금 쓴 것을 쫙쫙 그어 지우고는 고쳐 썼다.
혼자만 보는 일기장이지만 그래도 실명을 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일기는 타인이 볼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기록하는 혼자만의 전유물이라고.
남편의 연인에게
“남편의 연인이라.”
단어들의 묘한 조합이다. 남편에게 연인이 있음을 알고도 이렇게 태연한 여자는 별로 없겠지?
남편의 연인에게.
당신에게는 언제나 다정한가요?
오늘 처음으로 그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재희는 이 모습을 자주 보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을 뿐이다.
내 생각엔 좀 갈대 같아요. 겉모습은 고목나무인데 기분은 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갑자기 차가워지고. 그러다 순순히 사과하고.
누군가와 터놓고 대화한 적이 없던 사빈은 마치 일기장과 대화하듯 끄적끄적 적어 내려갔다.
좀 차갑긴 해도 나쁜 사람 같진 않아요. 안 그럼 한 사람을 위해서 그토록 큰 희생을 할 리가 없겠죠.
그토록 큰 희생이라는 건 자신과의 결혼이었다.
우리는 1년 후에 헤어지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잘 지낼 수 있기를. 그리고 당신에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