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사빈이 그대로 얼었다.
“네? 그게 무슨…….”
“사빈이는 이제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 당연히 내가 옆에서 잘 챙겨야지. 서 실장, 산부인과 예약이 언제지?”
“다음 주 월요일 오후 4시로 잡혀 있습니다.”
“딱 좋네. 이번 주는 내가 좀 바빠서. 이해해 줄 수 있지?”
미소를 짓는 유 여사의 얼굴은 더 이상 우아하고 너그러운 시어머니가 아니었다.
제2의 추연실이었다.
사빈은 떨리는 입가에 억지로 힘을 주며 대답했다.
“강헌 씨에게 얘기해 볼게요.”
“그러렴. 그럼 일단 약속은 잡으마.”
유 여사가 미소를 지은 채 사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네, 어머님.”
흡족한 표정을 지은 유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일단 미술관 내부부터 둘러보자. 일부러, 도착하면 로비에서 기다리게 한 거야. 그동안 직원들 얼굴 익히라고. 빨리 적응해야지.”
사빈은 무거운 마음으로 유 여사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조금 뒤에선 서 실장이 따라오고 있었다.
‘산부인과라니.’
단순한 검진을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임신을 위한 준비를 하러 가는 거라니.
혼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이나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선 유 여사가, 뒤에선 서 실장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천문호와 추연실에게서 벗어나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여전히 감시당하는 삶이었다.
“이번 겨울에는 작품 관련 교류회가 있어. 다들 며느리를 데리고 나오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교류회……요?”
“응. 미술관 경영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배워 가는 게 많을 거야.”
교류회라는 얘기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추연실도 그런 자리에 사빈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는 했다.
사빈은 추연실의 옆에 병풍처럼 서서 입가에 경련이 일도록 웃고 있어야 했다.
그 짓을 또 해야 하다니. 벌써 입가가 다 아플 지경이다.
“기대되지 않니?”
“……네, 어머님.”
유 여사는 사빈을 데리고 미술관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며 구조와 배치, 미술품 등을 설명해 주었다.
서 실장은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태도 점수라도 매기는 듯.
덕분에 유 여사의 미술관 투어가 끝났을 때 사빈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다시 관장실에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유 여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 며느님은 내일부터 브랜드 경영 부서 부서장으로 일하게 될 거야.”
사빈은 눈을 크게 떴다.
“부, 부서장이요?”
“응. 사빈이가 나비 갤러리 경영지원팀에서 홍보를 맡았다고 해서 신설한 부서야.”
얼어 버린 사빈을 보며 유 여사가 싱긋 웃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일단 직책만 맡는 거고 실무에는 나중에 투입될 거니까. 나랑 서 실장이 잘 이끌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관장님, 비서로 뽑은 직원 인사시킬까요?”
“응, 그게 좋겠다.”
“지금 호출하겠습니다.”
서 실장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어머님, 저는 그런 직책을 맡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부족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사빈이, 정말 바르게 자랐구나. 이렇게 욕심이 없어. 응?”
유 여사는 강헌에게, 아니, 기조그룹에 달라붙어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얻어 내려는 재희를 떠올렸다.
그 딴따라에 비하면 사빈은 정말 천사나 다름없었다.
‘역시 배운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달라.’
물론 유 여사도 천문호와 추연실이 순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욕심과 야심이 그득했다.
천문호는 정적들을 다 물리치고 다음 당 대표 선거에 단독 출마가 확실시된 사람이다.
어지간한 배포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그런 행보를 보일 수 없으리라.
어찌 되었든 자식 교육은 그럭저럭 잘 시킨 듯싶다.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아직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아, 서 실장 왔나 보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서 실장과 한 여자가 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빈은 또다시 억지 미소를 지으며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꾹 맞잡았다.
***
재희는 휴대폰을 내던졌다.
“아아악!”
머리를 쥐어뜯다가 테이블 위에 진열해 놓은 화장품과 향수병을 바닥으로 거칠게 쓰러뜨리는 재희를 보며 선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재희야, 진정해, 응?”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나한테!”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기조그룹 후계자>라는 제목으로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얼마 전에 결혼한 기조그룹 회장 아들이 와이프랑 손잡고 데이트하더라고요. 둘 다 잘생기고 예뻐서 깜짝 놀람. 특히 회장 아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짐.]
사진 속에서 강헌과 사빈은 손을 맞잡은 채 걷고 있었다.
그 밑으로 댓글이 줄줄 달렸다.
- 저희도 점심에 봤어요! 매점에서 샌드위치랑 아이스크림 사 들고 벤치에 앉아서 먹는 모습이 무척 소탈했습니다.
- 저도 봄. 평범한 직장인처럼 입고 주위 신경 쓰지 않으면서 데이트함. 하지만 검색하면 내 월급 맞먹는 가격의 옷이겠지. 눈물.
- 저 사람들은 인생 진짜 살맛 날 듯…… 존잘존예에 재벌가 아들이고 국회의원 딸인데 정략결혼 같긴 한데 어쨌든 공식 입장은 연애결혼이라고 하고. 웹소설 등장인물 설정값도 저거보단 못하겠다. ㄷㄷ
- 이미지 챙기려는 거 아님? 바쁜 사람들이 굳이 점심시간에 나와서 저럴 이유가…….
- ㅇㅇ 주가 올리려는 이강헌의 큰 그림임. 그럼 전 기조전자 주식 매입하러 갑니다.
- 예전에 이강헌 기사 사진 찍힌 거 보고 와라. 그 살벌한 눈빛하고 아내랑 같이 있을 때 눈빛하고 비교하면 완전 다른 사람임. 저 눈빛 보면 연애결혼이 확실함.
그들이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꽤나 많이 찍혔다.
사진 속에서 강헌과 사빈은 누가 봐도 달달한 신혼부부였다.
특히나 그간 언론에서 보였던 차갑고 까칠한 모습과는 달리, 강헌의 달달한 표정과 눈빛에 사람들은 충격을 느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재희였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재희는 심장이 으깨지는 고통을 느꼈다.
다행히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보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스케줄 도중에 보았다면 주위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지금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냥 눈속임으로 결혼한 거라며, 나 지키려고 결혼한 거라며!”
“재희야, 곧 본부장님 오시니까 진정하고…….”
그때 벨이 울렸다.
‘드디어 구세주가……!’
선영은 얼른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본부장님 오셨어요?”
“예. 재희는 안에 있습니까?”
“네, 그런데…….”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에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들어가 보죠.”
선영이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켰다. 강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익숙하게 침실로 향했다.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뒤섞인 어지러운 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재희가 막 남은 향수병을 손에 쥐고 높이 치켜든 찰나.
“서재희.”
낮은 음성에 재희가 움찔한 틈을 타 강헌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
거짓말처럼 재희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오빠…….”
재희의 손에서 향수병을 빼앗은 강헌이 그것을 멀리 두고 엉망이 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흐윽, 오빠…… 나한테 어떻게 이래……?”
재희가 강헌의 옷깃을 부여잡고 서럽게 흐느꼈다.
후. 강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선영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선영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낮고 깊은 목소리에 묻어 있는 피로감이 재희의 신경을 건드렸다.
“오빠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이게 뭐냐고!”
휴대폰을 가져온 재희가 그의 눈앞에 사진을 들이대자 강헌이 얼굴을 찌푸렸다.
“진정해.”
“평생 내 옆에 있어 줄 거라며. 나 지켜 줄 거라면서.”
강헌도 점심시간에 찍힌 사진을 보았다. 퇴근할 무렵, 비서가 글이 올라왔다고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제 모습을 보고 그 역시 충격을 느꼈다.
부드럽게 풀어진 눈빛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제 옆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빈의 모습을 보니 저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납득했다.
재희의 반응이 예상되었지만, 그래도 강헌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와 찍힌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았으면 싶었다.
그래야 언젠가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우리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이게 날 지키는 거야? 이건 날 갈기갈기 찢는……!”
“다 연극이야.”
“…….”
“회장님 눈을 속여야 너를 지킬 수 있어.”
강헌의 말에 재희가 울먹이며 되물었다.
“……정말이야?”
“이 결혼이 계약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너에게 무슨 짓을 하실지 몰라. 얼마나 철저하신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자신을 몇 번이나 구원해 준 그의 차갑고도 다정한 속삭임.
재희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듯 반복해 생각했다.
그래, 오빠는 언제나 내게로 돌아왔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오빠가 그 여자와 저런 사진을 찍는 이유는 날 보호하기 위해서야.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하는 재희를 바라보며 강헌은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
나는 회장님으로부터 재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재희로부터 사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재희는 연약하고 위태롭지만 바로 그렇기에 얼마든지 위험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 목숨을 끊겠다는 시도를 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혹 사빈을 해코지할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
강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재희는 예민하다. 이런 마음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배우의 앞에서 강헌도 연기를 해야 했다.
“너와 만나도 사빈 씨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회장님도 안심하실 거다.”
“그 여자 이름 부르지 마.”
재희가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알았어.”
“나랑 있을 때 그 여자 얘기 하지 마.”
“그래.”
“안아 줘.”
강헌이 숨을 들이마셨다.
“잠깐이라도 좋아.”
“……그래.”
재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기댔다.
강헌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거부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사빈을 안았을 땐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는 이렇게 지독하지 않았는데.
차마 재희를 마주 끌어안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결국 아래로 힘없이 내려갔다.
그것을 느낀 재희는 그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오늘 집에 가지 마,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