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45)화 (45/90)

제45화

누구라도 알아주었으면.

괴롭고 외로웠던 나의 시간을.

하나 사빈은 목 놓아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삼켰다.

적어도 강헌은 아니었다.

다른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결혼한, 1년 후면 헤어질 남편에게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부담을 줬다면 미안해요.”

사빈은 씁쓸함을 감추려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강헌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순간 사빈의 본가에서 맡았던 조화의 향기가 강헌의 코끝을 스쳤다.

친정에 갈 때도 그렇고, 가서 얘기를 나눌 때도 그렇고.

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사빈은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평소보다 더 평온한 미소가 도리어 불안을 야기한다고나 할까.

“사진 말입니다.”

그는 사빈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상견례가 끝나고 우리끼리 호텔 베이커리 카페에 갔을 때 떨어뜨렸던 사진.”

사빈이 숨을 죽였다.

“……그게 왜요?”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부모님과 어릴 때 찍은 사진 같던데.”

“네, 맞아요.”

또다시 맡아지는 조화의 향기.

“얼마 전 기사를 검토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천 의원님과 장모님의 젊었을 때 사진을.”

“…….”

“사빈 씨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 인물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버님은 언뜻 비슷한데 어머님께서는 많이 다르시더군요.”

사빈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강헌은 놓치지 않았다.

“외모야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니까요.”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체력과 체격과 직감과 눈치를 키웠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였다.

학교에서는 고아라며 우습게 보았고, 조금만 약하다 싶으면 창고로 끌려가 곧바로 밟혔다.

그것은 보육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없거나 혹은 버렸다는 동지 의식보다는, ‘내가 쟤보다는 낫다’는 얄팍한 우월감으로 버티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결과였다.

기억력과 식별력도 좋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에 의해 자신의 물건이 뒤바뀌거나 음식을 빼앗기니까.

빼앗긴 놈이 잘못이지, 빼앗은 놈은 죄가 없었다.

약해서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까.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로 자라난 강헌은 떨어뜨린 사진을 줍는 그 짧은 시간에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선명히 파악했다.

남자는 천문호의 젊은 시절처럼 보였지만, 단언컨대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추연실이 아니었다.

하나 그때는 사빈의 가족사가 어찌 되었든 저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의 안에서 사빈의 자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와 한 조각의 숨결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사빈 씨.”

“…….”

“그분은 누구십니까?”

사빈은 벼랑 끝까지 몰린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움직였다간 칼날이 박힌 골짜기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엄마예요.”

손목시계를 본 사빈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엄마예요. 시간 다 됐으니 전 이만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는 빠르게 멀어지는 사빈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곧고 바른 자세로 걷는다. 평소처럼.

그러나 어딘가 위태롭게 보였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곧 발목이 꺾일 사람처럼.

“……엄마.”

여덟 살 이후로 맘 편히 꺼낼 수 없었던 단어.

입술에 담겼던 말은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그것은 강헌에게 아주 낯선 단어였다.

또한, 사빈에게도.

그는 그녀가 추연실을 칭할 때 단 한 번도 ‘엄마’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너무 과한 생각일까.

***

차로 돌아온 사빈은 시동을 걸고 곧장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핸들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알아차린 걸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주 잠깐만 봤을 뿐인걸.

내 말에 모순이 있었을까?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걸까?

표정 연습을 더 해야 했을까? 목을 가다듬을 걸 그랬나?

“하아…….”

핸들을 쥔 손등에 이마를 툭 기댄 사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켰으면 어쩌지?’

강헌이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그것을 빌미로 그에게 유리한 제안을 하게 된다면.

리스크를 떠안게 된 천문호와 추연실이 저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만 해도 온몸이 떨려 올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사빈은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유정희 여사와의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

책을 잡히면 안 돼. 집안에 누를 끼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으니까.

강박적으로 되뇐 사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어찌어찌 기조미술관까지 도착했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선바이저를 내린 사빈은 거울을 보며 모습을 점검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 잔뜩 겁먹은 눈빛. 파르르 떨리는 메마른 입술.

이런 꼴로는 무슨 일이 생겼다고 광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얼른 파우치를 꺼내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경박스럽지 않고 조신’하게.

이쯤이면 되었다 싶어서 파우치를 정리하여 가방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웃으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추연실의 말을 떠올린 사빈은 입가에 힘을 주어 밀어 올리고는 로비 데스크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천사빈입니다. 어머님 뵈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작은사모님.”

유니폼을 갖춰 입은 세 명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빈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서 실장님께서 내려와 모셔 갈 겁니다. 저쪽 소파에 앉아서 잠시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짙은 녹색의 벨벳 소파에 바른 자세로 앉은 사빈은 계속 미소를 지은 채 유 여사의 비서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헌의 본가에서 보았던 여자가 또각또각 일정한 구두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작은사모님.”

“안녕하세요, 서 실장님.”

“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서 실장은 VIP만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로 사빈을 안내했다.

기조미술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입구에서부터 본관까지 차로 2, 3분 정도 걸렸고, 본관에서 별관까지는 또 몇 분 걸렸다.

슥 훑으면 하루에 다 둘러볼 수는 있겠지만 전시품 하나하나를 세세히 들여다본다면 부족하리라.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본관이었다.

엘리베이터조차 우아한 그곳의 4층에 관장실이 있었다.

“관장님, 작은사모님 오셨습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고저 없는 목소리 역시 우아했고, 온기는 없었다.

마치 추연실처럼.

“어서 와라, 아가.”

C사의 흰 투피스를 한 벌로 맞춰 입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두 번 돌려 두른 유정희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사빈을 맞았다.

“오는 데 고생했지?”

“아니에요, 어머님. 별로 안 막혀서 수월하게 왔습니다.”

“호호, 어머님 소리가 참 듣기 좋네. 서 실장? 커피 좀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사빈이 커피 괜찮지? 녹차, 홍차, 밀크티 있는데.”

“아…… 그럼 전 밀크티로 하겠습니다.”

“귀엽긴.”

유 여사가 눈짓하자 서 실장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닫으며 나갔다.

“앉자.”

“네, 어머님.”

공손히 대답한 사빈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어쩜, 사빈이는 작은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넘치는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님. 워낙 엄하게 예절 교육을 받아서요.”

살짝 미소하며 대답하는 사빈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 몸을 덜덜 떨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사돈어른과 사부인께서도 워낙 예의 바르고 우아하시니 당연히 닮을 수밖에.”

유 여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갤러리에는 얘기 잘 했고?”

“네, 관장님께서 아쉽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 준다고 말씀하셨어요.”

“최현숙 관장이지? 남편이 지룡건설 사장인.”

“네, 맞습니다.”

“희귀한 미술품을 많이 가지고 있다더구나. 몇몇 작품은 나보다 최 관장을 먼저 거친다던데.”

그리 말하는 유 여사는 자존심이 살짝 상한 듯 보였다.

“친한 정부 관계자가 여럿 있다던데.”

“아…… 저는 거기까지는…….”

“그래도 우리 사돈어른만 할까. 내년에는 당 대표에 출마하신다지?”

어색한 답변에는 곤란한 미소로 답한다. 괜히 입을 열어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 것.

추연실이 가르친 기본 원칙 중 하나였다.

“홍환희 작가의 미공개 작품이 수장고에 있다던데. 정말이니?”

망설이는 척하던 사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유 여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직접 봤어?”

“저는 보지 못했지만, 저희 어머니께서 확인하셨습니다.”

“사부인께서? 언제?”

“오전에 갤러리에 들렀을 때 어머니도 계셨어요. 저는 어머님과의 약속이 있어서 함께 보지는 못했습니다.”

사빈은 유 여사가 추연실에게 직접 전화를 걸도록 유도했다.

중간에서 이리저리 얘기를 전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 안 된다.

곧 떠날 사람이므로.

“전화드려야겠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유 여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며느리 하나는 참 잘 얻었지. 사부인 아니면 그 귀한 작품에 대한 얘기를 누구에게 듣겠어.”

사빈이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쟁반을 든 서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와 밀크티입니다.”

“사빈이가 고른 차를 보니까 하는 말인데.”

유 여사가 사빈 쪽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아이는 언제쯤 가질 예정이니?”

“아…….”

사빈의 볼이 붉어졌다.

“강헌 씨가 당분간 신혼을 즐기자고 해서요.”

“그것도 좋지. 그치만 사빈이도 이제 이십 대 후반으로 넘어가잖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낳아야 아이도 건강하고, 엄마도 건강하지.”

“네…….”

“커피가 아니라 밀크티를 고른 것도 그런 본능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몸에 좋은 것에 손이 간 거야.”

점심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서 카페인이 덜 들어간 걸 고른 건데.

유 여사의 괜한 의미 부여에 멋쩍은 표정을 짓던 찰나.

“내가 산부인과 예약해 놨으니까 지금부터 아이 맞이할 준비 하자. 검사도 좀 받고. 미리 몸 만들어 놔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