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갑자기 그가 의식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빈은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양가 인사드리고 온 다음 날, 강헌 씨도 그랬잖아요. 2층 복도에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차갑게 뒤돌아섰잖아요.”
강헌은 기억을 더듬었다.
유정희 여사가 사빈을 되도록 빨리 실무에 투입하려 한다는 말을 전하자, 사빈이 말했다.
[시간을 끌게요.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은 그녀와의 시간에 점점 빠져드는데, 사빈은 저와 있어도 오로지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고까워서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때 나도 이런 기분이었어요. 잘 대화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유도 없이 외면당했을 때.”
사빈이 마음에 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긴 무시당했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하지만 강헌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속 좁은 자신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과하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에 움찔한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니까 꼭 내가 무슨 가해자라도 되는 것 같잖아.
“입술.”
강헌의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렇게 깨물지 말아요.”
천천히 뻗어 오는 손.
“상처 날지도 모르니.”
엄지가 그녀의 입술을 살살 쓸었다.
그 작고도 농밀한 움직임에 사빈은 아랫배에서 뜨거운 감각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침의 키스가 떠올랐다.
격렬하고도 야릇했던 그 키스가.
입술을 헤집고 혀를 마구 얽으며 그는 있는 대로 자신을 밀어붙였다.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살결을 타고 매끄럽게 올라간 그의 커다란 손은, 지금 쿵쿵 뛰고 있는 곳을 부드럽게 쥐고 어루만졌다.
그때 느꼈던 묘한 아지랑이가 지금, 사빈의 안에서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어.’
고개를 빼냈다간 강헌이 미간을 좁히며 더 가까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럼……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강헌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주 천천히.
“이미 휴대폰을 꺼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빈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보았다.
아닌 척하면서 휴대폰으로 이쪽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나면 피차 곤란할 것 같은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손, 다시 잡죠.”
귓가에 닿는 강헌의 숨결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만족한 얼굴로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샌드위치는 어디에서 샀습니까?”
“스타박스 드라이브 스루에서요.”
“난 저 매점에서 사야겠군요.”
“괜찮겠어요? 부족할 것 같은데.”
“먹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사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놀란 것이다.
먹는 게 중요하지 않다니.
“그럼…… 식사를 거를 때도 많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원활하지 않은 영양 공급으로 인해 신체에 무리라도 가게 된다면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니까.”
강헌은 모든 것을 죄다 일에만 맞춘 사람이었다.
“전 먹고 싶은 게 아주 많은데.”
사빈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함께 움직일 때 맛집에 가는 건 어렵겠다.”
결혼식을 치르고 호텔에서 하루 머무를 때도 룸서비스로 이런저런 음식들을 죄다 시켜 본 사빈이다.
그는 별로 통제를 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난 먹어야 하는 음식이 정해져 있었는데.’
하긴, 얼마나 풍족하게 자랐겠나. 더는 먹고 싶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발리에서도 음식 맛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
사빈은 문득 진우를 떠올렸다.
대학 시절, 그의 별명은 ‘맛집 나침판’이었다. 캠퍼스 주위는 물론, 서울 전역의 웬만한 맛집은 죄다 꿰뚫고 있었다.
[선배, 우리 다음 뒤풀이는 어디에서 해요?]
[곱창, 막창, 막국수 죽이는 집 알아 놨다.]
[역시 맛집 나침판! 저 다음 주에 남자 친구랑 데이트할 건데, 괜찮은 곳 추천 좀 해 주세요.]
[입가에 물들면 안 되니까 매운 건 탈락, 먹는 게 흉하면 안 되니까 샌드위치나 햄버거도 탈락, 양식과 일식 중에 골라 봐.]
사빈도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었지만 전공 서적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맛집 탐방이라니. 당시 그녀로서는 꿈도 못 꿀 사치였다.
‘선배한테 연락해 봐야겠다. 발리에서 사 온 기념품도 줄 겸.’
그리 생각하며 강헌과 손을 맞잡은 채 매점으로 향했다.
“사빈 씨가 원한다면.”
뜬금없이 꺼낸 소리에 그녀가 ‘네?’ 하고 강헌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 줄 수 있습니다.”
“어디를요?”
“……맛집.”
주위를 의식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맛집은 즐길 줄 아는 사람하고 가야 신나거든요. 억지로 맞춰 줄 필요 없어요. 전 혼자 있는 게 편하기도 하고요.”
입술을 달싹이던 강헌은 이내 입매를 굳혔다.
매점에 도착한 그들은 샌드위치 하나와 오렌지주스 한 병을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계산 직전, 강헌이 바깥에 있는 냉동고에서 초코 맛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왔다.
“먹는다면서.”
“맞다, 까먹고 있었어요.”
기억력 좋네, 이강헌 씨.
사빈이 살짝 미소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을 보며 매점 주인이 어머머,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내 커플인가 봐. 점심시간 데이트?”
대답할 틈도 없이 주인이 말을 이었다.
“너무 보기 좋다. 우리 가게에 커플들 많이 왔는데, 죄다 결혼했어. 덕분에 여기가 결혼 명소라고 불린다니까? 그런데 이런 선남선녀는 처음 봐. 너무 잘생기고 예쁘고…… 그런데 남자 친구 쪽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강헌을 곰곰이 바라보던 매점 주인이 아! 하고 소리치며 눈을 크게 떴다.
“기조그룹 회장 아들 닮았네! 우리 딸이 그 양반 잘생겼다고 난리도 아냐. 연예인도 아닌데 맨날 기사 사진 보면서 멋있다고 온갖 주접을 다 떤다니까?”
“…….”
“근데 우리 남자 친구 쪽이 인상이 더 부드럽다. 사진 보니까 그 회장 아들내미는 좀 무섭더라고. 무표정인데도 화난 것 같고.”
설마하니 기조그룹 회장 아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매점 주인은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 아이스크림의 바코드를 찍으며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하긴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인상이 무서워질 리가 없지. 거기는 뭐 보니까 무슨 의원 딸내미하고 결혼했던데. 하여튼 다른 세상이라니까. 결혼을 사랑해서 해야지, 지들끼리 뭐 해 처먹으려고 하면 쓰겠어? 행복하겠냐고, 그게.”
타령을 하듯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리던 매점 주인이 물건을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자. 우리 선남선녀 받으시고. 꼭 결혼까지 해요, 응? 나중에 와서 알려 줘.”
“……예.”
봉투를 건네받은 강헌은 사빈의 손을 붙잡고 벤치로 향했다.
사빈은 무표정한 그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강헌이 샌드위치의 포장을 해체하는 동안 사빈은 오렌지주스의 뚜껑을 따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요.”
그녀의 얼굴을 흘깃 바라본 강헌이 그것을 건네받았다.
“……고맙군요.”
그리고 사빈은 제 몫으로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핥기 시작했다.
“신기하네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우리가 결혼한 걸 알고 있다는 게.”
그녀는 공원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결혼 기사가 난 것도 신기했어요. 내가 대단한 사람이랑 결혼을 하는구나, 실감이 났죠.”
“그랬습니까.”
“강헌 씨는 익숙하죠?”
“나름대로는.”
그의 대답에 사빈이 픽 웃었다.
“되게 시크하네요. 저도 언젠가는 강헌 씨처럼 여유롭게 될까요?”
“익숙해질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강헌.
“내 의도와 다른 기사가 나가도 너무 흔들리지 말아요. 어차피 곧 지나갈 거니까.”
“명심할게요.”
두 사람은 한동안 각자의 맛에 집중했다.
적당한 햇살과 바람은 침묵을 어색하지 않게 메워 주었다.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편안함. 안정감. 안도감.
타인과, 그것도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강헌은 고개를 돌려 사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둥근 이마와 예쁘게 솟은 코, 그리고 물면 단맛이 나는 붉은 입술.
가장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
강헌은 그녀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저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은 어떨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녀의 눈에는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강헌은 답을 알고 있었다.
1년 후면 헤어질 계약자.
사빈에게 자신은 그 이상의 의미는 될 수 없을 터.
“강헌 씨.”
사빈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그는 그녀를 보지 않은 척,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말을 하려고 해요.”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
강헌의 마음도 어쩐지 내려앉는다.
“이런 말은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먼저 말하고 싶어요.”
“……어떤 말을.”
“강헌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부탁 같은 건 되도록 하고 싶지 않고요.”
사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건 내 뜻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사빈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싫었다.
곤란한 일이라도,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제게는 털어놓아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까 갤러리에 사직서를 내러 갔다가 어머니를 뵈었어요.”
“예.”
“……답변을 듣고 싶어 하세요. 큰오빠의 사업에 관한.”
사빈은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베어 물었다.
다디단 초코 맛이 혀끝에서 녹아 없어졌다.
강헌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부끄러움과 초조함이 커져 갔다.
‘계약을 깨자고 하면 어쩌지. 1년을 채울 것도 없이 곧바로 이혼하자고 한다면.’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경멸하려나.
“인사드리러 방문했을 때 사업에 대해 대강 듣기는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말씀을 잘하시더군요. 큰형님께선.”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연설을 잘한다고 아버지께서 흡족해하셨죠.”
“여동생이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을 방문했을 때 말 한 마디 못 건넬 정도로 낯을 가리지는 않아 보이던데.”
사빈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아이스크림콘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끝이 뭉개졌다.
“오빠와 친한 편은 아닌가 봅니다.”
“……나이 차이가 나는 편이라서요. 어릴 때 떨어져 지내기도 했고.”
대외적으로 사빈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해외에서 요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외에 있었다고 했죠.”
“……네.”
“어디에 있었습니까?”
“미국에요.”
“도시는?”
“LA에요.”
“요양 시설에 있었습니까?”
혀로 입술을 축인 사빈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 노력했다.
“아뇨, 별장에 있었어요.”
천문호와 추연실이 여덟 살이었던 자신을 앉혀 놓고 철저히 주입시켰던 내용.
“장난을 치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친 적이 있어서요. 뇌진탕으로, 의식이 일시적으로 소실된 적이 있어요.”
“기억상실이라는 말입니까?”
“……네, 아주 일시적으로.”
강헌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놀란 부모님께서는 절 미국에 있는 별장으로 보내셨어요.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쁜 의도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어서요.”
준비해 온 말은 술술 잘도 나왔다.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마치 진짜로 그 일을 겪은 것처럼 상상하고, 또 상상해야만 했다.
“그래서 오빠들과는 서먹서먹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게 사실이에요.”
아니. 사실 그들과 난 서먹서먹한 정도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남들 눈이 안 보이는 곳에선 잘해 줘요.”
방관하고, 혹은 가담하며 그들의 부모와 함께 날 갈기갈기 찢어 놓았어요.
“가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