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점심은 잘 먹고 있나요? 남은 오후도 힘내세요.]
“너무 딱딱한가……? 아냐, 이 정도면 됐지, 뭘.”
보낼까 말까. 한차례 고민하던 사빈은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강헌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눈속임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면 된다.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고 있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드르륵- 울렸다.
강헌이었다.
“콜록, 콜록!”
놀란 사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 아픕니까?
“아뇨, 괘, 괜찮아요.”
사빈은 목을 다시 한번 세게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세요?”
- ……메시지가 와서.
“아, 그게, 회사 사람들의 눈도 잘 속여야 하니까요. 신혼부부라면 그런 메시지 정도는 보낼 것 같아서.”
- …….
강헌이 침묵하자 사빈이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떴다.
“하, 하트라도 붙일 걸 그랬나요……?”
‘어, 어어?’
사빈은 분명히 들었다. 강헌이 희미하지만 짧게 웃는 소리를.
“바, 방금.”
- 다음번 임원회의 때 부탁하죠. 사람들 눈 많은 곳에서 읽을 테니까.
“그건 좀 부끄러운데.”
- 그래야 회장님 귀에도 들어갑니다.
아아, 그렇구나.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음번 회의 때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열심히 작성해 볼게요.”
- 사빈 씨는 점심 먹었습니까?
“지금 먹고 있어요.”
- 어머니와의 약속은 오후 아닙니까?
“네, 혼자서 먹고 있어요.”
강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 혼자?
“네.”
- 어디서?
“기조미술관 근처 공원이에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여덟 살 이후, 사빈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점심시간이었다.
그 순간에 강헌과 통화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 20분만 기다려요.
“네? 아니에요, 저 금방……!”
전화가 끊겼다.
사빈은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황급히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하아, 어쩌지.”
그를 기다릴 여유는 있었다. 지금은 12시 반이었고, 유정희 여사와의 만남은 2시였으니까.
사빈은 강헌의 회사에서 이곳까지 거리를 찍어 보았다.
차로 딱 20분 거리였다.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와도 되려나?”
괜찮으니까 온다고 했겠지?
……그런데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지?
갑자기 속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사빈은 얼른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아님 이 근처에 올 일이 있는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강헌이 점심시간에 순수하게 자신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올 리는 없었다.
그는 행동 하나하나 철저하게 계산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이득이 되는 무언가가 있기에 온다는 것일 테지.
사빈은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그녀는 배가 불러서 잠깐 걷기로 했다.
검은 슬랙스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손에 커피를 들고 있으니 자신도 회사원처럼 느껴졌다.
사원증만 목에 걸면 딱 좋은데. 기조미술관에서 일하게 되면 지급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공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Rrrrrrr-.
강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어디에 있습니까?
“동문 테니스코트 쪽이에요.”
- 보입니다.
사빈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어디요?”
- 왼쪽.
키와 체격이 커다란 사람이 이리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아, 그러고 보니 강헌 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벌써 한 무리가 강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사빈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강헌의 손목을 붙잡은 사빈이 그를 나무 그늘 아래로 데리고 가서 소곤거렸다.
“선글라스 같은 거 써야 하지 않아요?”
“왜 그래야 합니까?”
“강헌 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상관없습니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떡해요?”
강헌이 무심히 말했다.
“아내 보러 온 건데 뭐 어떻습니까.”
사빈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맞는 말인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져서 사빈은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오히려 좋습니다.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되니까.”
강헌의 말에 사빈은 꿈에서 깬 듯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구나. 하긴, 그러니까 이강헌 씨가 날 찾아왔겠지.
예상치 못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가슴에 시린 바람 한 점이 불어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좀 걷겠습니까?”
저 행동도 계산하에 나온 것.
그리 생각하자 뛰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좋아요.”
강헌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면 천문호도 만족해할 것이다.
그러다 추연실의 말을 떠올린 사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주일 내로 답 가져와라. 더 기다리게 하지 마.]
무진의 사업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답변을 가져가야 하는데.
겁이 난다. 강헌이 예의 그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혐오하듯 바라볼까 봐.
그녀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꾹 들어갔다.
“…….”
강헌은 제 손을 강하게 맞잡아 오는 사빈을 한 번 슥 쳐다보고는 손깍지를 꼈다.
“어?”
“이러자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뭘 했나요?”
“힘주어 잡기에.”
“아, 미,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고. 그냥 이대로 걷죠. 이편이 신혼부부에게 더 어울리니.”
재희와의 통화가 끝난 후 곧바로 임원회의에 참석한 강헌은 정신적으로 무척 피로했다.
점심시간, 강헌은 비서에게 식사를 하고 오라 말한 뒤 사무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써 외면했지만 이유는 하나였다.
부담감.
아플 때의 재희는 언제나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며 제 품에 매달렸다.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 그때만큼 아파…….]
[가지 마, 오빠. 자고 가면 안 돼? 그냥 얌전히 옆에만 있을게.]
[오빠, 한 번만 안아 줘. 그럼 괜찮아질 것 같아.]
그걸 또 겪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현기증마저 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와중, 사빈에게서 문자가 왔다.
[점심은 잘 먹고 있나요? 남은 오후도 힘내세요.]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가락이 멋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당황했는지 더듬는 목소리가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아, 그게, 회사 사람들의 눈도 잘 속여야 하니까요, 신혼부부라면 그런 메시지 정도는 보낼 것 같아서.]
어떤 이유든 좋았다. 사빈이 제게 연락을 하려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하, 하트라도 붙일 걸 그랬나요……?]
웃음이 나왔다. 작고 희미한 그것은 강헌의 피로를 앗아 갔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었다.
뭘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더 시원하게 뚫릴 듯했다.
혼자 공원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말에 그는 재킷을 낚아채서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오가는 시간이 빠듯하겠지만 잘한 선택이었다.
커피를 들고 서 있는 사빈을 보는 순간 부담감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날아갔으니까.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손을 붙잡은 그들은 공원을 한 바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점심은 뭐 먹었습니까?”
“샌드위치요.”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걸로 됩니까?”
“네, 충분해요. 전부터 해 보고 싶었거든요. 차에서 뭐 먹기.”
“안 해 봤습니까?”
“아…… 부모님이 워낙 청결하셔서요. 차 안에서 뭘 먹는 걸 싫어하셔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 사빈의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었다.
“강헌 씨는 점심 뭐 먹었는데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네에?!”
놀란 사빈이 그대로 걸음을 멈춰 서자 강헌도 따라 멈췄다.
“아직까지 점심을 안 먹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예고 없이 강헌의 손이 뻗어 왔다.
흠칫 놀란 사빈이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입가에서 따뜻한 온기가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뭐지……?
“입가에 뭐가 묻었습니다.”
사빈의 동공이 크게 열리더니 이내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냥 말을 해 주시지.”
“이제 없으니까 그렇게 문지르지 않아도 됩니다.”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뼈를 꺾어서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 샌드위치 먹기가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빵은 위쪽만 작아지고 안의 재료는 흘리고.”
“먹기엔 김밥이 더 낫습니다.”
“……자주 드세요?”
“가끔.”
의외였다. 강헌이라면 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겸한 점심을 먹을 것 같았는데.
“왜 그럽니까?”
“그냥…… 의외라서요.”
“본부장으로 임명된 직후에는 검토할 서류가 많아서 이동 중에 먹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랬구나. 하긴 강헌 씨는 낙하산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후계자니까.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장식이 아닐 것이다.
“오늘은 왜 안 먹었어요? 오늘도 바빴나요?”
입맛이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소에도 음식은 그저 속을 채우는 것일 뿐이라 여기며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도 오래간만에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는데.”
그런데 사빈과 함께 있으니 입맛이 돈다.
특히나 특정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사빈이 눈을 꽉 감고 있을 때, 강헌은 엄지로 닦아 낸 소스를 입으로 가져가 혀끝으로 살짝 맛보았다.
시중에서 파는 흔한 맛이었는데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같이 있어 주겠습니까?”
강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속을 가렸다.
잠시 생각하던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사 주면요.”
그녀의 말에 잠시 얼어 있던 강헌.
“……하하.”
사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강헌 씨가…… 소리 내서 웃었어?
“사 주겠습니다. 원하는 만큼.”
휘어진 그의 눈가와 입매를 보며 사빈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차가운 커피를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앗, 차가워. 꿈은 아닌데.’
그의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차가운 얼굴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얼굴도 제법…… 근사했다.
아니, 사실 무척이나 빛났다.
햇살이 그의 머리 위만 비추는 것처럼.
가볍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도 듣기 좋았다.
평소의 차갑고 한기가 가득 흐르는 목소리 어디에 이런 찬란함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빈은 입을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빨라지는 맥박이 느껴진다. 위장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다.
갑자기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의 온도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휙. 그녀는 손을 빼냈다.
미소하던 강헌의 입가가 서서히 내려왔다.
“사빈 씨?”
“빠, 빨리 가요. 이러다 점심시간 다 지나겠어요.”
그와 계속 손을 잡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러다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사빈은 그에게 팔이 붙들렸다.
“갑자기 왜 그럽니까?”
“…….”
“내가 뭐 실수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