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42)화 (42/90)

제42화

월요일.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짧은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그들은 집 안 내부에서 지하로 내려갔다. 차고와 연결된 문이 그곳에 있었다.

“회장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함께 저녁을 먹자 하시더군요.”

“알겠어요.”

이제 인사를 나누고 각자 헤어져야 맞지만.

박 여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수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 배웅이지, 기실 감시다.

강헌이 먼저 팔을 벌렸다. 그러자 사빈의 볼이 붉어지더니 머뭇머뭇 다가와 그에게 안겼다.

“운전 조심해요.”

그의 속삭임에 움찔한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강헌 씨도요. 이따 퇴근하고 집에서 봐요.”

그녀의 말에 강헌의 심장이 뻐근해졌다.

별것 아닌 말인데, 왜 기분은 이다지도 좋아지는 것일까.

자신의 등을 감싼 사빈의 작은 손의 감촉도 선명히 느껴졌다.

짧은 포옹을 마친 두 사람은 박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각자의 차에 올랐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본부장님, 사모님.”

시동을 켠 강헌이 먼저 차고를 나섰고 사빈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간간이 백미러를 통해 뒤따라오는 사빈의 차를 보았다.

윈도우 틴팅 때문에 선명하진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사빈의 형체가 보이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강헌은 왼쪽으로, 사빈은 오른쪽으로 방향이 나뉘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보며 강헌은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만 더 같이 가도 좋을 것을.

그런 생각을 품고 회사에 도착한 강헌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박선영입니다.

재희의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는.

“예.”

- 다름이 아니라, 재희가 좀 아파서요.

강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또 쓰러졌습니까?”

- 다행히 쓰러지기 전에 집에 데려왔어요. 지금 누워 있는데, 자꾸 본부장님을 찾아서…….

선영이 말끝을 흐렸다. 빨리 찾아오라는 의미였다.

재희는 강헌이 자신을 보러 올 때까지 병원도 가지 않고 스케줄도 취소하며 그를 기다렸다.

- 모레 광고 촬영 건으로 미팅이 있거든요. 거기 불참하면 진짜 큰일인데…….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에게 주어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오늘 저녁에 가겠습니다.”

사빈은 출근하자마자 관장실로 호출을 받았다.

곧 사직하는 것 때문에 부른 듯했다.

문을 연 사빈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추연실을 보고는 멈칫했다.

“뭐하니? 어서 들어오지 않고.”

“……어머니 오셨어요.”

애써 입꼬리를 올린 사빈이 관장실 문을 조용히 닫으며 들어와 추연실의 맞은편에 앉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최 관장도 목에 몇 겹으로 감은 진주 목걸이를 찰랑거리며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너무 아쉽네. 이렇게 유능한 직원을 놓아주어야 하다니.”

최 관장의 너스레에 추연실이 호호, 하고 웃었다.

“지금까지 최 관장이 잘 봐 준 덕분이지.”

“사빈이가 연실이 널 닮아서 아주 똑똑하고 야무져.”

사빈이 추연실의 친딸이라 알고 있는 최 관장이 사빈을 한껏 치켜세웠다.

“어찌나 단아하고 차분하고 현명한지,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빛이 막 난다니까? 연실이 너 대학 다닐 때랑 똑같더라고.”

“얘도, 참.”

“정말이야. 나한테 다리 놔 달라고 말한 사람만 해도 벌써 몇 명인데.”

“……그랬어?”

추연실이 순간적으로 사빈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허벅지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사빈은 눈이 마주친 순간 움찔했다.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구나, 우리 딸.”

“호호, 아마 사빈이는 몰랐을 거야. 다 내 선에서 쳐 냈거든. 우리 천 의원님 막내따님과 어울리기엔 급이 좀.”

그러자 추연실의 눈초리가 조금 유순히 풀어졌다.

“아아, 그런 거구나.”

“그건 그렇고, 이야. 내 친구가 기조그룹과 사돈이라니. 내 어깨가 다 으쓱한다, 얘. 친딸처럼 아끼던 우리 사빈이가 기조그룹 며느리라니.”

최 관장의 목소리에 한껏 콧소리가 들어갔다.

“네 덕분에 사빈이가 잘 배웠지.”

“아휴, 별말을. 당연한 거지, 얘. 참, 재작년에 홍콩 아트페어에서 사들인 그림이 있거든. 그거 한 번 볼래?”

최 관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조그룹 사모님이 굉장히 좋아한다는 아티스트 미공개 작품이야.”

추연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그렇다니까. 그거 구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경매에 공개되기 전에 간신히 잡았어.”

“어떻게?”

“그때 새로 임명된 총괄 디렉터랑 친분이 있거든. 앞으로도 그런 작품 서너 개는 빼 주겠다고 약속했어.”

최 관장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우리 갤러리에 걸어도 좋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에서 전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네. 기조미술관에 비하면 우리는 규모가 작으니까. 예술인으로서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작품을 보여 주고 싶어.”

“어쩜, 현숙이 넌 예나 지금이나 고상하니. 너 같은 사람이 있어서 대한민국 미술계 미래가 참 밝다.”

“나도 더 기여하고 싶은데…… 에휴, 요즘 우리 남편 걱정하느라 집중이 안 되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사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본론이 빠르게 나온 편이다. 평소엔 이것보다 더 오그라드는 칭찬을 몇 분이고 주고받은 후에야 서로의 본심을 이야기했었다.

“남편 사업이 왜?”

“강원도 매립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으려고 하는데, 규제가 너무 심해서. 공사 인허가 받기가 힘든가 봐.”

휴우, 하고 최 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것 때문에 요즘 골머리 썩고 있어. 연실이 너한테 보여 줄 작품도 많은데.”

“친구 좋다는 게 뭐니. 고민이 있으면 같이 머리 맞대고 그러는 게 친구지. 내가 우리 의원님한테 말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머, 너무 고마워, 연실아. 친구가 있어서 아주 든든하다, 내가.”

그들의 거래는 늘 이런 식으로 성립되었다. 사빈은 어서 빨리 이 답답한 공기로 가득 찬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몇 차례 더 대화를 나눈 그들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사빈이, 이제는 갤러리 직원도 아니니까 이모라고 불러. 알았지?”

최 관장의 말에 사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호, 굳은 것 좀 봐. 너무 귀엽네. 남편은 잘 해 주고?”

“네.”

“신혼인데 오죽할까. 기조그룹 후계자인 것도 모자라서 외모까지 근사하더라. 연실이 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추연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어디서 이런 딸이 굴러들어 왔을까.”

“어디서 왔긴? 의원님한테서 왔지.”

최 관장의 말에 추연실이 어머,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여튼 현숙이 넌 참 재밌다니까.”

“호호. 그럼 우리 다음 약속은 언제로 잡을까? 그림 봐야지.”

“모레 어때? 사빈아, 괜찮지?”

“아…….”

사빈이 머뭇거리자 추연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수요일에는 아버님께서 저녁을 사 주신다고 하셔서요.”

“어머, 회장님이 사빈이 엄청 예뻐하시나 보다. 그래, 선약이 먼저지. 연실아, 네가 보고 사빈이한테 얘기해 주면 되잖아.”

“그래야겠네.”

“이모한테 종종 놀러 와, 사빈아.”

드디어 나비 갤러리를 벗어난 그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추연실이 다가오는 것을 본 기사가 빠르게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에 타기 전. 최 관장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르게 추연실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서방한테 네 큰오빠 얘기는 해 봤니?”

“……네, 어머니.”

“뭐라던?”

“지금 당장 대답을 하는 건 어렵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내로 답 가져와라. 더 기다리게 하지 마.”

말을 마친 추연실이 뒷좌석에 몸을 싣자, 운전기사가 재빨리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문을 닫은 운전기사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사빈이 고개를 숙이자 비로소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빈은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쩌지.’

추연실은 답을 가져올 때까지 추궁할 것이다.

그 악독한 눈빛과 말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사빈은 저도 모르게 강헌을 떠올렸다.

그에게 말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결혼도 했으니까, 예전처럼 손에 쥐고 뒤흔드는 짓은 못하지 않을까?

강헌이 직접 말해 준다면, 아무리 천문호와 추연실이래도 저를 대할 때처럼 세게 나가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러다 사빈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왜 이런 생각을. 이강헌 씨가 날 위해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해 줄 리 없잖아.’

아침에 좀 진한 스킨십을 한다고 해서 그와 정말 부부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스스로를 책망한 사빈은 차에 타서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오후에는 시어머니인 유정희 여사와의 만남이 잡혀 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일까. 추연실과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집에 들렀다 가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점심은 대충 때우자.’

사빈은 시동을 켜고 핸들을 천천히 돌려 나비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좋은 날씨였다.

추연실과 최 관장으로 인해 지끈거리던 머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게다가, 혼자다.

혼자서 운전을 하고 있다. 시어머니와의 약속이 잡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점심 정도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사빈은 라디오를 틀었다. 늘 운전기사가 데려오고 데려다주던 검은 세단 안에서는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아야 했고, 정숙해야 했으며, 필요 없는 말을 하거나 졸아서도 안 됐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좋았어.”

사빈은 유명 체인점 카페의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로 들어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리고 기조미술관 근처 공원에 차를 세워 놓고 먹기 시작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 어디에나 널려 있는 벤치에 앉아 가볍게 식사를 때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품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캠퍼스 내에도 천문호를 대신할 눈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라디오에서는 ‘벚꽃 엔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빈이 천문호와 추연실의 눈을 피해 몰래 듣던 노래였다.

듣자마자 머릿속에 연분홍색의 꽃잎이 물결치는 광경이 떠올라서, 사빈은 괴로울 때마다 이 노래를 몰래 찾아 들었다.

언젠가 제게도 봄날이 찾아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공원에는 목에 사원증을 걸고 음료를 손에 들고 산책을 나온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걷거나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때는 자신도 저 평범하고 평화로운 사람들 틈에 끼고 싶었다.

1년 후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강헌은 점심을 먹고 있을까.

불현듯 든 생각에 사빈이 샌드위치를 씹던 입을 멈췄다.

‘그러겠지. 점심시간인데.’

한 번…… 연락을 해 볼까. 어쨌든 떨어져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하는 것은 변함없으니까.

망설이던 사빈은 ‘성공적인 이혼을 위하여’라는 생각으로 냅킨에 손을 닦고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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