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그리고 최 관장이 추천한 아티스트가 있는데 기조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주면 아주 좋을 것 같더구나. 조만간 파일 보낼 테니까 진행할 수 있도록 해.]
추연실의 여대 동창인 최현숙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나오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빈은 될 수 있는 한 버틸 생각이었다.
강헌이 뒤를 받쳐 줄 테니까.
“이제 막 배우는 단계이니 당분간은 크게 신경 쓸 일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다만, 어머니께서는 최대한 빠르게 사빈 씨의 교육을 마치고 실무에 투입하려 하십니다. 갤러리에서 일했으니 돌아가는 사정이나 업무를 잘 알 거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유 여사는 아무래도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했다.
갤러리에서 일하는 건 맞지만, 제대로 업무를 배운 적도 없고 그저 일하는 시늉만 하며 자리를 지키다 올 뿐이다.
낙하산은 낙하산답게.
사빈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그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까 저어한 추연실의 지시였다.
“시간을 끌게요.”
혹여 중요한 업무라도 맡게 되면 큰일이다.
1년 후에는 이혼할 거니까.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순간 강헌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야겠군요.”
그렇게 뜨거운 아침을 보냈는데.
사빈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혼뿐인 모양이다.
‘당연한 것을.’
처음부터 이혼을 위해 결혼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은 재희를 지키기 위해 결혼한 거고.
……그런데 왜 진창에 처박히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
갑자기 표정이 가라앉은 강헌을 보며 사빈은 의아했다.
그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또 말실수했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설렁설렁 하려는 건 아니에요. 열심히 배울 테지만, 만약 제가 중요한 업무라도 맡게 된다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강헌이 먼저 몸을 돌려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던 사빈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서재 맞은편에 위치한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달칵.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은 사빈.
“도무지 모르겠어.”
강헌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모를 사람이었다.
서늘한 것 같으면서도 뜨겁고,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면이 있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듯하면서도 다 듣고 있다.
그러다 저렇게 갑자기 차가워진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혹시…… 아침에 저와의 스킨십이 싫었던 걸까.
아냐, 이제 와서 싫은 티를 내기엔 좀 늦은 감이 있다.
“화해하자고 해 놓고선.”
이상한 이강헌.
속으로 중얼거린 사빈이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살랑거리는 바람이 들어왔다.
“음, 상쾌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내밀고 바깥에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헌으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가 완전히 식어 갈 무렵.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강헌이었다.
[내일 나갈 보도 자료입니다. 확인하고 수정할 사항 있으면 체크해서 보내십시오.]
사진을 보는 순간, 애써 식혔던 볼이 다시 화악 물들었다.
***
재희는 태블릿을 바닥에 거칠게 내던졌다.
“재, 재희야. 진정하고, 응? 곧 간담회 시작하니까.”
스타일리스트인 선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재희를 달래려 애썼다.
“어디, 네일 깨졌나 봐 봐.”
“선영아…….”
재희가 품에 달려들자, 선영이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저걸 봤으니 미칠 만도 하지.
“나 어떡해? 오빠가, 오빠가…….”
화면이 깨진 태블릿에는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해변에서 사빈의 어깨를 감싼 강헌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는 장면이었다.
강헌은 스킨십을 싫어한다.
누구와도 닿는 것을 싫어했고 어쩌다 스치는 것조차 내키지 않아 했다.
그날 이후로.
재희는 늘 노력했다.
심할 정도로 청결을 유지하고, 머리가 아프지 않은 향수를 뿌리고,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외모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데뷔 때와 지금이 똑같다는 말을 듣는 데는 이런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의 문제가 마음에서,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그나마 외모라도 잘 관리해 놓아야 그가 제게 닿는 것을 덜 꺼려할 테니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땠더라.
그때도 강헌은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보육원 원장님이 아이들을 안아 줄 때면 강헌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어쩌다 재희가 가볍게 팔짱을 끼며 장난을 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고 하면 가볍게 웃으며 쳐 내긴 했지만 지금처럼 혐오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혐오감.
강헌의 눈빛에 드러난 것은 분명 혐오감이었다.
그건 재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왜 조금 더 참지 않았을까. 왜 이 회장이 재희를 노리도록 틈을 보인 걸까.
재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그의 고뇌를 풀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몰락이므로.
“선영아, 오빠가 정말로 이 여자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재희는 선영을 붙잡고 매달렸다.
“오빠가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어.”
“너 볼 때도 저런 눈빛이야.”
“아냐, 아니라고! 나한텐 억지로 웃어 준단 말이야, 억지로…….”
고등학교 졸업식 날.
이 회장이 찾아왔다.
“네가 강헌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아이라지?”
“아, 안녕하세요. 서재희입니다.”
“배우를 지망한다고 들었다. 맞니?”
“네에…….”
“그럼 네 연기력 한 번 보여 봐라. 잘하면 내가 지름길을 깔아 주겠다.”
이 회장은 자신이 배우가 되기 위해 여러 군데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는데도.
“나는 강헌이가 필요하다.”
재희도 말하고 싶었다. 자신도 강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너도 필요하겠지, 그 애가.”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 회장이 덧붙인 말에 재희가 눈을 크게 떴다.
“영상을 하나 찍자. 그 영상으로 너도, 나도 강헌이를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다.”
이 회장의 말은 달콤했다.
그가 재벌 회장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보육원에서 짐을 뺐을 때, 재희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교차점이 없는 세상에 속하게 된 그를 더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강헌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니.
“어, 어떻게요?”
파들파들 떨면서도 묻는 재희를 보며 이 회장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이 강헌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응했다.
이 회장의 비서는 재희가 겁탈당하는 영상을 찍어서 그것을 강헌에게 보냈다.
강헌은 이 회장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죄책감에 강헌은 곁에 있어 달라는 재희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고, 혹여 이 회장이 재희에게 또 해코지를 할까 봐 후계자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그것이 그녀 생애 최초 카메라 앞에서 펼친 연기였다.
재희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여기저기 거칠게 끌려다니느라 생채기가 났고, 몇 번이고 다시 찍었다.
그래서 망가진 모습에 강헌은 그녀가 정말로 당한 것이라 오해하며 재희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내 곁에 있어 줘. 앞으로도 계속.”
“……그래, 그럴게.”
“내 연인이 되어 줘, 오빠.”
“재희야, 난 널…….”
“알아. 이름뿐이어도 좋아. 그러니까 연인으로 내 옆에 있어 줘. 그거면 돼.”
그렇게 강헌과 연인이 되었다.
재희는 자신이 있었다.
보육원에서 강헌과 가까이 지냈기에 서로를 잘 알았고, 또 주위에서 연예인을 하라고 할 정도로 예쁜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재능도 없지 않았다.
700:1의 경쟁률을 뚫고 드라마 여주인공에 합격한 재희는 데뷔하자마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 회장의 원조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연기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이루어 내지 못했을 성과였다.
재희는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애를 썼다. 강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강헌이 자신을 마음에 담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빈이 나타났다.
강헌은 맞선을 아주 많이 보았다. 그중 한 명과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도 재희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헌은 결국 제게로 돌아올 것이고, 결혼하게 될 여자와는 허울뿐인 관계를 유지하게 될 거라고.
그랬는데…….
“선영아, 나 어떡해? 응?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불안해하는 재희를 달래는 건 선영의 몫이었다.
선영과는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알게 되었다. 다른 신인 배우의 신출내기 스타일리스트였던 그녀는 짧은 계약이 끝난 뒤, 재희의 러브콜에 응했다.
재희는 선영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선영은 그런 재희를 친구처럼, 때론 동생처럼 보살폈다. 말이 스타일리스트지 기실 매니저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저 여자한테 저런 표정을 지어 줄 수 있는 거야? 나랑은 닿는 것도 싫어했는데……. 오빠가 저 여자한테 넘어가면 어떡해?”
선영은 눈물로 인해 화장이 죄다 얼룩진 재희의 어깨를 감싸 달랬다.
“재희야. 본부장님은 너 절대 못 떠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양심이 있다면.”
재희는 가슴이 콕콕 쑤셨다. 진실을 모르는 선영은 강헌을 자신에게 평생 사죄해야 할 죄인으로 취급했다.
“걱정하지 마. 눈속임을 철저하게 해야 안 들키니까 일부러 저렇게 사진 찍은 거야.”
“……정말 그럴까.”
“그럼! 저 각도 봐 봐. 저건 카메라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포즈야. 의식하고 찍힌 거라고.”
선영이 깨진 태블릿을 조심히 들어서 재희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자, 봐 봐. 사진이 다 깨끗하지? 꼭 어서 찍어요, 하는 것처럼. 몰래 찍힌 사진 느낌이 아니야.”
선영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사빈을 바라보는 강헌의 눈빛은 진짜였다.
“그래도 오빠 표정은 진짜야.”
“재희야, 너 재벌가 사람들도 연기력 장난 아닌 거 잘 알잖아. 뒤에서 구린 짓 다 하고 다녀도 위엄 있는 척, 혹은 인자한 척 얼마나 해 대니. 당장 이 회장님만 해도 엄청나게 무서운 분이지만 기자들 앞에서는 그렇게 선한 미소를 지으시잖아.”
재희는 선영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정말 그럴까?”
“그러엄! 그리고 본부장님이 널 얼마나 아끼고 소중히 대하시니. 아직도 나 볼 때마다 재희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는데. 너 잘못될까 봐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강헌과 사빈의 사진으로 인해 찢어졌던 심장의 출혈이 조금씩, 조금씩 멎어지고 있었다.
“자, 화장 손 좀 보자. 오늘 시사회에서 찍힌 우리 재희 사진 보고 본부장님도 좋아하실 거야.”
“선영아……!”
재희가 품에 꼭 안기자 선영이 오구오구, 하면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서재희 이길 여자는 아무도 없어.”
그 여자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머릿속에서 애써 두 사람의 사진을 밀어낸 재희는 선영의 말에 따라 눈을 감고 수정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래, 오빠와 나는 이렇게 쉽게 끊어질 인연이 아니야.
우리가 얼마나 견고하게 맺어져 있는데.
그 동영상을 본 이상, 오빠는 절대로 날 떠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