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꼭 잠옷을 사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미술관과 호텔을 거치며 잠옷에 대한 생각은 아예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아. 어쩌지.”
강헌의 옷을 또 입어야 하나.
사빈은 한숨을 쉬며 아침에 곱게 접어 놓은 옷을 펼쳐 들었다.
이런 기분으로 그의 옷을 입고 싶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헐렁한 강헌의 옷을 걸치고 나온 사빈.
먼저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리고 눈을 감으려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침 침실을 들어오는 강헌과 딱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어색한 눈 맞춤.
먼저 시선을 피한 사빈은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붙잡고 침대로 향했다.
“먼저 잘게요.”
이불을 젖히고 몸을 눕힌 사빈이 스탠드의 불을 끄려던 찰나였다.
“사빈 씨.”
“……네.”
“아까는 말이 심했습니다.”
순간 사빈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뇨, 맞는 말인데요. 앞으로 기조그룹 이미지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스탠드를 끈 사빈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헌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2층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했기에 옷만 갈아입으면 되었다.
사빈이 바른 로션의 향기가 드레스룸 안에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들숨에 그녀의 향기가 딸려 들어왔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강헌은 침대로 향했다.
바스락.
사빈이 침대 끄트머리로 더욱 붙으며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러다 떨어지겠습니다.”
“……침대가 워낙 커서요.”
“한 번만 뒤척여도 추락할 겁니다.”
사빈은 자조했다. 꼭 우리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네.
단 한 번만 삐끗해도 아래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사이.
완전히 떨어질 수도, 가까이 붙을 수도 없는 이상한 부부 관계.
“새벽에 박 여사가 오면.”
“알아요. 그러는 척해야 한다는 거.”
아무래도 사빈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을 모양이다.
강헌은 난감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재희야 늘 그를 붙잡으려 안달이었고, 혹 토라졌다 싶다가도 얼마 못 가 먼저 다가왔다.
이 회장과 유 여사, 회사의 임원들도 강헌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풀어 주고 달래 주는 일 따위, 강헌은 해 본 적 없었다.
“걱정 마세요. 계약 조건은 지킬 테니까.”
“걱정이 됐습니다.”
“……제대로 한다니까요.”
“사빈 씨는 그 남자를 잘 알지 몰라도, 내게는 당신을 술에 취하게 만든 호텔 직원이었으니까.”
사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느껴졌다.
“그 남자가 어떤 마음을 품고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진우 선배는 그럴 사람 아니에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은 5분 전과 후가 다릅니다.”
“늘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사람이에요. 5년 전에도, 지금도.”
강헌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사빈이 그 남자를 감싸 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터무니없는 소문이 났을 때도 늘 내 편에 서서 날 감싸 준 분이에요.”
진우는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진우 선배는.”
강헌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기분이 나쁘다.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사빈의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차갑게 내뱉고 말았다.
“그 얘긴 이제 그만하죠. 내일 아침에 조건 제대로 이행하리라 믿겠습니다.”
강헌이 자신 쪽의 스탠드를 끄고 눈을 감았다.
‘뭐, 뭐야?’
갑자기 차갑게 말을 끝낸 강헌이 어이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려던 사빈은 입술을 꾹 닫고는 이불을 목 아래까지 푹 눌러 덮었다.
‘나도 더 대화 이어 갈 생각 없거든요?’
그녀는 속으로 바랐다.
부디 새벽이 오지 않기를.
***
그러나 사빈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새벽은 와 버렸다.
“후우…….”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어슴푸레한 하늘을 보며 그녀는 옅은 숨을 내뱉었다.
씻고 나온 사빈은 침실 벽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의 윈도시트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제법 차분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강헌이 욕실에서 나오면 그들은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
아주 야릇하고 은밀한 연극을.
이런 기분으로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
강헌의 얼굴을 보면 천문호가 겹쳐 보일 것만 같은데, 잘 해낼 수 있을까.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은 사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창고에 갇혔을 때면 늘 이런 자세로 스스로를 감싸곤 했다.
타인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면 자신의 온기로라도 몸을 덥히고 싶어서.
또한 자신의 안에는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것이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그렇게 다짐하던 와중, 욕실과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미닫이문이 열렸다.
고개를 드니 물기를 완전히 말리지 않아 머리카락이 조금 젖은 강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윈도우시트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사빈을 본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 춥습니까?”
“……괜찮아요.”
“곧 6시입니다.”
박 여사가 출근할 시간이니 슬슬 준비를 하자는 뜻이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사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잘해야 하는데.’
흠칫. 강헌이 손을 뻗기만 했을 뿐인데 움찔한 사빈은 뒤로 물러났다.
그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아차.’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그녀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 후.
“……이강헌 씨, 오늘은 안 하는 게 어때요?”
자신의 말에 강헌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는 것을 사빈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매일 하는 것도 좀 이상할…….”
“호칭.”
“네?”
“호칭이 틀렸습니다.”
아. 사빈은 조금 힘이 빠진 소리를 냈다. 그것을 지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혼이니까 매일 해야 하는 겁니다.”
붉게 물드는 그녀의 뺨.
저도 모르게 뻗어 가려던 손을 간신히 자제한 강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말했다.
“어제 같은 일, 최대한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강헌과 잘 지내야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지금 와서 다른 남자를 찾아 결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막 붙잡지 말아 주세요.”
그의 동공이 순간 크게 열렸다.
어제 호텔에서 예고 없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일으켰던 스스로의 행동이 떠올랐다.
“아팠습니까?”
“아팠다기보단…… 놀랐어요.”
그녀가 작게 덧붙였다.
“……무서웠고요.”
강헌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접촉이 얼마나 불쾌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재희가 와락 안기거나 손을 잡아 올 때면 거칠게 뿌리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은 정말로 뿌리친 적도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강한 힘으로 손을 쳐 냈을 때, 재희가 놀라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모습이 생생했다.
사빈이 제게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쩍쩍 마르는 기분이었다.
“약속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그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긴장으로 굳어 있던 사빈의 몸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재희 씨와 만나기로 했을 땐 미리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만나면 당황스러워서요.”
“그것도 미안합니다. 어제는 나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서재희 씨와 만나려고 미술관에 간 거 아니었나요?”
사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강헌이 즉시 부정했다.
“아닙니다.”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하긴, 사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강헌 역시 재희가 그곳에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알았다면 사빈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구나. 어쨌든, 앞으로 부탁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저 나름대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준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시간을 보낼 방법 같은 거요.”
어제 연진우를 만난 것처럼 말인가?
갈구하듯 그녀를 바라보던 진우의 눈빛을 떠올리자 강헌은 입가에 힘을 꾹 주었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사빈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자신은 관여할 권리가 없다.
“내게도 미리 얘기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래, 제게 그럴 권한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계약과 회사의 이미지를 지켜 낼 의무가 있다.
또한 사빈이 말한 대로, 서로의 일정을 미리 알고 있어야 대처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사빈 씨의 일정을.”
“네, 그럴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보다는 훨씬 나아진 안색에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럼 화해한 겁니까? 우리.”
강헌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기대감이 어려 있다고 표현해야 할까?
자신의 대답을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잘못한 아이가 어렵게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낸 뒤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강헌은 나름 귀여운 면이 있었다.
가뭄에 싹 나듯 아주, 매우 드물게 그런 면면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천문호와는 다른 사람.
그런 판단이 내려지자 사빈은 한결 안정을 되찾았다.
“네, 화해해요, 우리.”
강헌이 안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들어갔던 미간이 조금 펴지고 입가에는 힘을 꾹 주었다.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한 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으니 다 보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 여사가 출근한 것이다.
문 쪽으로 동시에 돌아간 두 사람의 고개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만져도 되겠습니까?”
사빈은 자신의 얼굴에 열감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제 입술을 내려다보는 뜨거운 눈빛과는 다르게 더없이 정중한 말투가 어쩐지 야하게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강헌은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계약 때문에. 박 여사를 속여야 하니까.
이런 같잖은 이유를 억지로 끌어오면서.
“……네.”
몇 초간의 침묵 후 사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헌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희고 말랑한 볼이 커다란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오고도 남았다.
“…….”
긴장한 사빈이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엄지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읏…….”
부드럽지만 강한 접촉에 사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흘렸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강헌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촉.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 붙었다 떨어졌다.
그와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긴장한 사빈은 허벅지에 힘을 주며 숨을 들이마셨다.
“입을 벌려 주면.”
“…….”
“더 부드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