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38)화 (38/90)

제38화

강헌이 짓씹듯 말했다.

“천사빈 씨가 하는 모든 행동에 기조그룹의 위신이 달려 있다는 것, 앞으로는 절대 잊지 말라는 소리야.”

사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강헌의 모습 위로 천문호가 겹쳐 보였다.

[격 떨어뜨리는 짓 하지 마라. 네 아비로도 모자라 너마저 내 평판을 떨어뜨리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가시덩굴에 온몸이 칭칭 얽힌 채 커다란 뱀 앞에 선 기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굳은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어나요.”

진우가 다가오는 것을 본 강헌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어깨를 감쌌다.

“죄송합니다, 포장에 시간이 좀 걸렸네요.”

미안하다는 듯 말하며 진우가 호텔 베이커리 로고가 프린트된 종이 백을 건넸다.

“고맙군요.”

그것을 건네받은 강헌이 사빈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흠칫. 움찔한 사빈이 입꼬리를 억지로 밀어 올렸다.

“……고마워요, 선배.”

“아, 응. 그런데 어디 아파?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것 같아.”

“아내가 몸이 약해서. 빈혈이 온 것 같군요.”

사빈이 몸이 약했던가?

‘그런 느낌은 한 번도 못 받은 것 같은데.’

얼굴이 희고 몸이 여리여리하긴 하지만…….

어쨌든 아프다는 말에 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사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 신경이 제 어깨를 감싼 강헌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뜨겁고 무거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천문호와 똑같은 눈빛을 지닌 그가.

얼른 이곳을 벗어나서 그와 떨어지고 싶었다.

“이만 가 볼게요, 선배.”

“……그래, 조심히 들어가.”

진우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가슴이 아팠다.

“가요.”

그러나 사빈의 말에도 강헌은 요지부동이었다.

“……강헌 씨.”

“이대로 차에 탔다간 두통에 시달릴 겁니다.”

강헌이 진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비었습니까? 스위트룸.”

“아침에 확인한 바로는 공실이 있었습니다만.”

“그럼 하루 자고 가죠.”

진우의 눈이 커졌다. 사빈도 마찬가지였다.

“가, 강헌 씨.”

그러나 강헌은 미동도 없었다.

“그냥 집에 가요. 저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습니다.”

진우에게서 눈을 뗀 강헌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감쌌던 손으로 사빈의 뺨을 감쌌다.

“자고 가는 게 내키지 않으면 조금 쉬다 가죠.”

엄지로 사빈의 뺨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강헌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당신이 아픈 건 견딜 수 없으니까.”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저 차가운 남자는 아내를 볼 때면 눈빛이 뜨거워졌고, 사빈은 그런 남자에게 몸을 기댔다.

진우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더는 사빈과 그녀의 남편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하는 수 없이 사빈은 강헌의 품에 안기다시피 감싸여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두통약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헌은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내가 어떻게 하면 괜찮아지는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주한 두 남자의 눈빛에서 뜨거운 전류가 흘렀다.

그러나 진우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남편이 생겨 버린 여자에게, 그저 대학 선배일 뿐인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퇴장해 주는 수밖에.

“바쁜데 이만 가 보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힘없이 대답한 진우가 문을 닫았다.

탁. 넓은 공간 안에 사빈과 강헌, 둘만이 남았다.

사빈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그가 놔주지 않았다.

“왜 이러세요?”

“몰라서 묻습니까?”

강헌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호텔에 남자와 단둘이서 있으면 어떤 소문이 퍼질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겁니까?”

“개방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거예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강헌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와서 사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아까 그러셨죠, 제가 하는 모든 행동에 기조그룹의 위신이 달려 있다고.”

무섭다. 두렵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이 대학 선배와 말 한 마디 자유롭게 섞지도 못하는 제 모습을 본다면 기조그룹의 위신이 그리 높아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천문호의 집에서 숨죽여 지냈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인적 드문 미술관에서 서재희 씨와 단둘이 만난 건 괜찮고, 사람 많은 호텔에서 우연히 대학 선배와 만난 건 안 되는 건가요?”

강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 위로 천문호가 겹쳐 보여서 사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맞게 될까. 아니면 머리채를 잡히게 될까.

그도 아니면 목이 졸리려나.

숨이 멎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다가 눈에 흰자위만 보이게 될 때쯤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며 차갑게 내려다보려나, 이 남자도.

차가운 곳에서 밥을 굶는 것보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

금방 끝나니까.

홀로 어두운 곳에 갇힌 채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는 그때는 1초가 1시간처럼 흘러갔다.

영원히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식할 것만 같던 그때를 떠올린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힘을 준 눈과는 다르게 사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본 강헌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을 보는 사빈의 눈빛은 열여덟 살의 그가 이 회장을 바라보던 그것이었다.

그가 천천히 사빈의 팔을 놓았다.

“……앞으로 조심합시다. 서로.”

“…….”

“두어 시간 후에 나가도록 하죠. 그래야 이상한 소문이 나도 잠재울 수 있을 테니.”

몸을 돌린 그는 서브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얼마간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빈은 천천히 숨을 토해 냈다.

‘……지나갔다.’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뜬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며 마스터룸으로 향했다.

문을 닫으며 들어온 뒤, 사빈은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 손을 펼치자 배어난 땀으로 축축했다.

슬펐다.

강헌 역시 천문호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기대 따윈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실망스러운 것을 보면.

“난 어딜 가나 이미지 격상을 위한 도구인가 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쓰임새라도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응? 엄마, 아빠.”

그대로 뒤로 쓰러진 사빈의 눈에서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언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오늘 하루 내내 그랬지만 지금까지의 적막을 합친 것보다 더 무거운 고요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강헌은 앞만 주시했고 사빈은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박 여사는 퇴근한 후라서 억지로 손을 붙잡고 다정한 척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빈은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강헌은 조용히 2층으로 향했다.

서재로 들어온 그는 스탠드를 켠 뒤 재킷을 벗고 책상에 앉았다.

본부장이라는 위치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익숙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업무를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태블릿으로 온기라고는 없는 문장들과 숫자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대조하며 자료를 살피던 그의 손이 뚝 멎었다.

“……후.”

목부터 셔츠의 단추를 차례로 풀어 내린 강헌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빈의 말이 맞다.

재희와 단둘이 만난 자신이 사빈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마따나 호텔 내 카페라는 개방적인 장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인적 드문 미술관 뒤뜰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벽에 커다랗게 나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사빈이 진우를 향해 웃는 순간.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나만의 것을 빼앗긴 것처럼.

……나의 것.

그 순간 강헌은 사빈에 대한 제 감정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이건 계약관계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있어야 재희를 보호할 수 있다는 명목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빈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떠날 사람이다. 이미 1년 뒤에 이혼을 하겠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그래야 사빈이 행복하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자신도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딱 1년만이라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강헌은 벽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손을 뻗어도 닿지 않겠지.

‘……왜 이런 실없는 생각을.’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았다. 사빈은 다 씻고 나왔을까.

내일 아침, 출근한 박 여사에게 그들이 신혼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그녀가 응해 줄까.

이제는 자신과 닿는 것조차 싫어하는 듯한데.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린 강헌은 잠시 생각하다 재킷을 들고 서재를 나섰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빈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꾹꾹 눌러 짜냈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서 기분이 좋았는데, 한순간에 망쳤다.

“……이강헌 씨 때문이야.”

‘강헌 씨’에서 다시 ‘이강헌 씨’로 호칭이 되돌아왔다. 그만큼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꼈다.

재희와 시간을 보내라고 자리를 피해 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술관에서 강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면 그도, 재희도 자신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각자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 말.

[호텔에 남자와 단둘이서 있으면 어떤 소문이 퍼질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진우와 룸에라도 들어간 줄 알지 않겠나.

수건을 내려놓은 사빈은 화장대에 앉아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위잉-거리며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거울로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사빈은 문득 제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내일 아침에 박 여사님이 출근하시면…… 그런 척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와 끌어안고 키스하며 부부 관계를 갖는 척할 수 있겠는가.

“하아.”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위기에 봉착했다.

이대로 그와 1년간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는데.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어를 정리한 사빈.

이내 한 가지 깨달은 사실에 입이 벌어졌다.

‘잠옷……!’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