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오빠가 옆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거야, 나.”
이 얘기만 나오면 강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자격이 제게는 없었으므로.
열여덟 살, 기조그룹에 입적되자마자 강헌은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외국어, 역사, 컴퓨터, 경영, 경제에 관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와 과제들이 매일 그에게 주어졌고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다.
스물셋이 되던 해.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강헌은 잠적해 버렸다.
해외로는 갈 수 없었다. 비행기 표 구입과 호텔 예약 등 흔적이 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의 땅 끝이라 불리는 해남으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자신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멍청한 생각이었다.
해남에 도착한 지 딱 5일째 되던 날, 이 회장이 보낸 사람이 자신을 찾아냈다.
남자는 다짜고짜 제게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고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복면을 쓴 남자가 재희를 억지로 짓누르는 장면이었다.
[회장님께서 전하셨습니다. 네가 나약하고 어리석은 탓에 벌어진 일이다, 라고.]
다급히 해남을 떠난 강헌은 곧바로 재희를 찾았다.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에서 퇴소를 해야 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재희는 그녀가 고3 여름방학 때 스스로 마련한 어둡고 작은 반지하 자취방에 누워 있었다.
고작 반 년 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영혼이 갈가리 찢어졌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그 텅 빈 눈빛을, 강헌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감히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재희는 말했다.
[내 곁에 있어 줘. 앞으로도 계속.]
그날 이후로 강헌은 재희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내 연인이 되어 줘, 오빠.]
[재희야, 난 널…….]
[알아. 이름뿐이어도 좋아. 그러니까 연인으로 내 옆에 있어 줘. 그거면 돼.]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재희가 스무 살, 강헌이 스물세 살 때였다.
비록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포옹조차 제대로 나눈 적 없었지만.
오직 재희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그들은 연인이었다.
“오빠.”
언제부터였을까.
“나 혼자 두지 마.”
자신을 부르는 재희의 목소리에 숨이 갑갑하게 막혀 왔던 것은.
“오빠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재희와 마주 보고 있기만 해도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어. 오빠가 내 전부인 거, 잘 알잖아.”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 여자, 좋아하게 된 거야?”
그 여자, 천사빈.
그녀의 은은한 미소와 술에 취해 뚝뚝 눈물을 흘리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아니.”
“거짓말.”
재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기조그룹 후계자한테 어울리는 여자라서 좋았어? 나와는 다르게 깨끗해서?”
“서재희!”
강헌의 외침에 움찔한 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차가운 목소리에 온기라고는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얘기하자.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사랑해.”
우뚝. 뒤뜰을 벗어나던 강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랑해, 오빠.”
“…….”
“그 여자한테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선영 씨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조심히 들어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강헌의 뒷모습을 보며 재희가 울면서 소리쳤다.
“회장님이 그 여잘 가만히 놔두실 것 같아?”
강헌이 굳은 표정으로 뒤돌았다.
“……뭐?”
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강헌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애원에서 사빈의 이름으로.
“그 여자가 우리 사이 알면서도 묵인하고 결혼한 이유, 자기가 원하는 게 있어서잖아.”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재희는 강헌을 힘껏 노려보았다.
“회장님은 이 사실 모르시고, 그저 그 여자가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결혼까지 추진한 것으로 아시지.”
재희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회장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게 까막눈 취급이라는 거, 오빠가 가장 잘 알 거야.”
강헌을 잃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왔는데, 내가 어떻게 버티며 견뎌 왔는데.
“그런데 그 여자한테 속았다는 거 알면, 가만히 계실까?”
절대로 무너질 수 없어.
“그 여자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를 박살 낼 거야. 흔적도 남기지 않고.”
“…….”
강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도무지 그의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게 마음을 열어 준 적 없었지, 오빠는.
그걸 알면서도 강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재희는 괴롭고 또 괴로웠다.
“많은 거 바라지 않아.”
강헌을 바라보며 재희는 애원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만 해 주면 돼.”
제발, 제발.
“그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조용히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강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할 일 없어.”
자신의 일탈에 대한 후회와 재희에 대한 죄책감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것을 빼면 강헌의 인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조심히 들어가.”
“오빠!”
“나중에 연락할게.”
지금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재희와 더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재희에게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이미 자신으로 인해 아픈 흉터를 지닌 아이다. 거기에 또 생채기를 낼 수는 없었다.
미련 없이 뒤돌아선 강헌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왜 강하게 부정하지 못했나. 사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속이 답답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런 와중에도 사빈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잠깐이라도 숨을 쉬고 싶었다.
굳은 표정으로 미술관을 한 바퀴 둘러본 그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사빈이 없었다.
그는 다소 조급한 손길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설마…….’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사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다행히 평소와 같았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한 강헌이 마른세수를 했다.
“어디에 있습니까?”
- 세인트마리아 호텔이에요.
강헌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호텔?”
- 네.
“왜 거기에 있습니까?”
- 두 사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방해되지 않으려고…….
그때 사빈의 옆에서 ‘천사, 쿠키 나왔다.’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누가 있습니까.”
- 아, 진우 선배요.
멈칫.
- 여기에 와서 만나게 되었어요. 진우 선배가 그날 죄송했다고 강헌 씨한테 전해 달…….
“지금 갈 테니 기다려요.”
- 네? 강헌 씨!
통화를 종료한 강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결혼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신부가 다른 남자와 호텔에 있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럼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래저래 귀찮아진다.
이 회장은 압박을 가해 올 것이고, 천문호도 귀하디귀한 막내딸을 소홀히 대한다는 빌미로 이것저것 요구해 올 테지.
사빈이 진우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그렇게 되뇌며 강헌은 빠르게 세인트마리아 호텔로 향했다.
직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긴 그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사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헌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로비에 있는 카페를 눈으로 훑었다.
사빈은 그곳에도 없었다.
미간을 구긴 그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장 먼저 상견례 자리가 끝나고 둘이서 왔던 호텔 베이커리 카페로 향한 강헌은 보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사빈을.
쿵. 심장이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아주 더럽고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강헌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전 지금까지 남천 선배님이 틀린 줄 알았는데, 선배가 틀린 거였구나.”
“하하, 아직까지도 억울해서 미치려는 이남천 볼 때마다 웃겨 죽겠어.”
“그러겠어요. 당시에 남천 선배님 엄청 욕먹었잖아요.”
“자업자득이지, 뭐. 그 새, 아니, 그 자식이 너한테 고백했다가 까이고 나서 이상한 소문 내고 다녔잖아.”
아. 말하고 나니 조금 부끄럽네. 진우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넌 선배 잘 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근데 남편은 언제 오신대?”
“잘 모르겠어요. 전화 끊자마자 지금 온다고는 했는데…….”
“사빈 씨.”
낮은 음성에 사빈과 진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마저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헌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우가 강헌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진우입니다. 지난번에는 실례 많았습니다.”
발리에서, 술에 취해 일본인 관광객을 진우로 착각한 사빈이 뭐라고 했더라.
[완전 비슷한데…… 키 크고 팔다리 길고 머리통 작은 게.]
[웃는 게 이온 음료 광고 모델 같은 것도 완전 똑같은데?]
체격은 모델 같은데 말간 얼굴은 여전히 소년 같은 진우를 보며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저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사빈은 이런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
강헌이 대꾸 없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진우가 객쩍게 웃었다.
“강헌 씨.”
사빈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강헌은 여전히 진우의 눈을 빤히 응시한 채 말했다.
“저도 결례가 많았습니다. 아내를 챙겨 주신 것도 모르고 오해를 했군요.”
아내……. 진우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사빈이는 제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한데요. 당연히 챙겨야죠.”
강헌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당연히 챙기다니? 누가 누구를.
넥타이를 한 것도 아닌데 목이 졸리는 듯 답답하다.
“선배, 강헌 씨 왔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볼까 봐요.”
“응? 아, 그래. 더 챙겨 줄 테니까 집에 가서 먹어.”
“아니에요, 결혼 선물까지 주셨는데 그럴 수는…….”
“천사빈이니까 쏜다, 내가. 잠깐만 기다려.”
싱긋 웃으며 카운터로 향하는 진우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사빈이 강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얘기는 잘 끝났나요?”
“…….”
“강헌 씨?”
사빈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결혼 선물은 뭡니까.”
“네? 아, 그거요. 여기 스파가 굉장히 좋다고 했더니, 선배가 언제 어느 때든 이용할 수 있도록 말해 놓는다고 하셨어요.”
즐거운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속이 뒤틀린다.
그까짓 스파가 뭐라고. 기조그룹 며느리가 그딴 걸로 저토록 좋아할 일인가.
“그런 게 필요했으면 나한테 말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격 떨어지는 짓 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