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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연인에게 (36)화 (36/90)

제36화

칼로 심장이 난도질당해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으리라.

“…….”

재희의 입술이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강헌이 저 아닌 다른 여자와 가까이에 서 있는 모습을 재희는 처음 보았다.

지금껏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곁을 허락하지 않았던 강헌이었는데.

자신과도 아주 잠깐 안고 있는 것도 힘겨워했던 강헌이었는데.

그런 그가 저 여자와는 손을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표정.

그림을 감상하는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헌의 표정을 본 재희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강헌의 새까만 두 눈에 똑똑히 쓰여 있었다.

사랑스럽다고. 눈을 뗄 수가 없다고.

재희의 호흡이 가빠 왔다.

‘오빠가 내게 이럴 수는 없어.’

그래, 그가 내게 이럴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

순간, 재희의 머릿속에 이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직업은 참 잘 선택했구나. 강헌이를 이용하는 주제에 겉으로는 선량한 피해자인 척. 연기력 하나는 타고났어.]

아냐, 난 오빠를 이용한 게 아냐.

사랑하니까, 옆에 있고 싶으니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그땐 나도 정말 힘들었어!’

그렇게 합리화를 해 보았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거짓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재희는 숨을 들이마셨다. 강헌을 잃을 수는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을 무용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오빠.”

한창 그림에 빠져 있던 사빈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재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또각또각. 구두 굽의 소리가 층고가 높은 공간을 크게 울렸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강헌에게 싱긋 웃어 보인 재희가 사빈을 보았다.

아차. 사빈은 뒤늦게 강헌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

그것을 지켜본 재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두 여자의 눈이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재희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빈은 그녀와 구면이었다.

강헌과 맞선을 볼 때 비상계단에서 그와 서 있던 재희를 본 후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와아. 정말 예쁘다.’

톱 배우라는 명성에 걸맞게 가까이에서 본 재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천사빈입니다.”

재희는 입술 살을 짓씹었다.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은 저와는 다르게, 사빈은 차분했고 어딘지 모르게 당당한 면모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리라.

사빈은 연예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재희가 그 속을 알 리가 없었다.

매일 걱정했다. 강헌이 아내가 된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하지만 아무리 걱정해도 그런 일이 현실로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절대로.

그래서 버틸 수 있었는데.

사빈을 가까이에서 본 순간, 재희의 확신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무해한 눈동자와 말간 얼굴.

저보다 작고 여린 체격.

단아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

힘 있는 국회의원의 딸이라는 배경을 제쳐 두더라도 사빈은 여자로서 매력적이었다.

‘우리 사이를 다 안다고 했지.’

재희는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아, 네.”

“감상하시는 동안 오빠랑 얘기 좀 나눌게요.”

재희의 말에 사빈은 그제야 깨달았다.

‘서재희 씨랑 만나려고 이곳에 온 거구나.’

그럼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강헌이 자신과 미술관에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늘, 강헌은 양가 부모님 앞에서 자신을 감싸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다해 주었다.

그래서 사빈은 자신도 자리를 피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기로 했다.

“강헌 씨, 전 그림 보고 있을게요. 얘기하세요.”

재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강헌 씨?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헌과 재희는 미술관 뒤뜰로 향했다.

나가기 전, 재희는 한 번 더 사빈을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신경 쓰는 것은 저뿐인 건가 싶어서 안심이 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재희는 휙 몸을 돌려 강헌의 뒤를 따랐다.

벤치가 제멋대로 널려 있는 것조차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는 뒤뜰에도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오빠.”

재희의 부름에 강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미안한 것일까. 아니면…….

“왜 여기에 온다고 말 안 했어?”

재희는 화가 났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여긴 우리 둘만의 장소잖아.”

강헌이 처음으로 맞선을 보게 되었다고 얘기하던 날.

재희는 그를 붙잡고 울부짖으면서 애원했다.

“오빠, 제발, 나 버리지 마, 응? 오빠가 어떻게 그래?”

“진정해. 앉아만 있다가 올 거야.”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바쁜 스케줄 속에서 간신히 만났는데 강헌은 야속한 말만 내뱉었다.

“어떻게 날 두고 맞선을 볼 수가 있어? 오빠가 어떻게!”

그들은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강헌이 재희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혼자 집에 있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는 얼마 전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찾아낸 미술관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는 그곳이라면 재희도 진정할 것 같아서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재희는 진정을 되찾았고, 그날 이후로 재희는 그곳을 둘만의 안식처로 삼았다.

그런 소중한 장소에 강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와 맞선을 보고 결혼까지 하게 된 여자를.

“오빠.”

한 걸음 다가간 재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불안해.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아.”

강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사빈의 집에서 느꼈던 인위적인 조화의 향기가 났다.

재희의 향기가 이렇게 진하고 탁했었나.

그녀에게서는 시원하고 맑은 향기가 풍겼는데.

‘……미쳤군.’

재희가 울면서 매달리는 이런 상황에서 사빈의 향기를 떠올리다니.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

‘양심도 없는 새끼.’

강헌은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안아 줘, 오빠. 응?”

그는 손을 들었지만 재희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그날이 떠올랐다.

이 회장이 보낸 남자가 발버둥 치는 재희를 끌어안고…….

“……하.”

강헌은 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재희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품에서 떼어 냈다.

“그만.”

“오빠.”

“미안하다.”

“오빠!”

손으로 이마를 짚은 강헌이 재희에게서 몸을 돌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나 봐 봐, 응?”

“제발!”

강헌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재희를 거칠게 뿌리쳤다.

“오, 오빠.”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도저히 재희와 더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언제? 오빠 결혼식 이후로 한 번도 나한테 연락 안 한 거 알아?”

결국 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 무서워, 오빠.”

[보고 싶다, 재희야.]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와 통화하던 날.

강헌은 여전히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면 불러 주었고, 보고 싶다고 말해 달라고 하면 보고 싶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재희의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답답하고 초조했다. 그러나 강헌을 보챌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내게 질리기라도 하면?

내게 질려서, 정말로 그 여자에게 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런 생각에 참고 또 참았는데.

사빈과 손을 붙잡고 그녀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강헌을 본 순간.

이성이 날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조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하게 애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재희에게 강헌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어.”

강헌이 움찔하는 것을 본 재희는 내심 안도했다.

그래, 그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영원히.

***

그림을 두 번째로 돌아볼 때까지도 그들은 뒤뜰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강헌을 기다리려던 사빈은 마음을 바꾸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지.’

얼마나 애틋한 재회를 하고 있을까.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정략결혼까지 감행한 강헌과, 그를 믿고 기다리는 재희는.

정문으로 나간 그녀는 얼마간 걷다가 택시를 잡았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강헌이 박 여사에게 데이트를 하면서 저녁도 먹고 들어갈 테니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돌아온다면 박 여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이 회장에게 보고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운신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빈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또렷하게 느껴졌다.

잠시 생각하던 사빈이 말했다.

“세인트마리아 호텔이요.”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장소였다. 강헌과 맞선을 본 장소이기도 하고,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다.

또, 술에 취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첫날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거기라면 혼자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누군가를 마주치게 된다면 강헌은 바쁜 일이 생겨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남편과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답하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우 선배는 여전히 일하고 있을까?’

혹시 그를 만나게 되면 미안하다고 인사해야겠다.

‘아. 사과의 선물을 주어야 하는데.’

사빈은 발리에서 진우에게 줄 기념품을 샀다.

너무 거창한 것은 피차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소소한 것으로 골랐다.

그래도 그는 웃으면서 받아 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빈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휙휙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인생도 저렇게 빠르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빨리 이 힘든 시기가 지나갔으면. 그래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으면.

‘둘이 참 잘 어울렸지.’

강헌과 재희가 나란히 서서 뒤뜰로 향하던 모습을 떠올린 사빈은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런 거 생각해서 뭐하나.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도착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사빈은 두 번째 만남 때 강헌이 말했던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갔다.

주말임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한산하니, 행운의 날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은 그녀가 메뉴판을 펼쳤다.

“와. 종류가 참 많구나.”

한참을 끙끙 고민하고 있을 때. 메뉴판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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