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아무리 조화에 향수를 뿌려 본들 생화에서 나는 그 싱싱하고 자연스러운 향기와 같을 수는 없다.
강헌은 지금 조화에서 나는 인위적인 향기를 맡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공기에 뒤섞인 긴장감을 읽어 낸 그는 미간을 좁혔다.
부자연스러운 냄새는 두통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군.’
그런 강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문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요즘 회사는 어떤가?”
천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조전자 주식을 갖고 있다 보니 궁금해서 말이야. 허허.”
무진과 무호가 작게 웃었다. 그의 말을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으로 받아들인 강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운영하려 노력 중입니다.”
“실은 우리 큰아들이 회사에서 나와서 자기 사업을 하려고 하거든.”
“……예.”
“능력은 출중한데 아직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고민일세. 자네가 회사를 경영하는 것에 있어서는 선배니까 조언을 좀 구하려고.”
조언이라. 강헌이 얼굴을 굳혔다. 이건 대놓고 봐 달라는 뜻이 아닌가.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건데. 무진아, 네가 직접 설명해 봐라.”
그와 눈이 마주친 무진이 움찔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본부장님이 더 잘 아실 테니까…….”
“무진아, 본부장님이라니. 매제라고 해야지.”
강헌보다 두 살 위인 무진은 목을 가다듬고는 민망해하던 것에 비하면 아주 빠르게 말을 놓았다.
“그럼 매제, 내가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주기를 바라. 내가 제작할 어플은 이런 내용인데, 이게 기조전자에서 만드는 휴대폰에 기본 어플로 들어가면…….”
강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들 앞에서는 말이 없어진다는 무진은 달변가가 되어 있었다.
***
2층에 위치한 사빈의 방.
“이 서방 마음을 꽉 잡았더구나.”
문을 닫자마자 추연실이 꺼낸 말에 사빈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교정하려고 해도 근본은 바꿀 수가 없으니. 그간 헛고생을 한 게지.”
“…….”
“죽은 네 아빠도 네 엄마를 만나자마자 정신이 나가서는 헛된 짓거리를 하고 다녀서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녔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사빈은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던 도련님을 여행작가랍시고 집시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네 엄마가 망가뜨렸어.”
늘 들어 왔던 얘기지만 사빈은 처음 듣는 것처럼 경청하는 척을 해야 했다.
“그 여자만 만나지 않았어도 도련님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추연실이 자신의 부모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꼭 꺼내는 말이었다.
“김혜원, 그년만 아니었어도.”
엄마의 이름이 나오자 사빈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명문가에서 엘리트로 잘 자라 오던 진호 도련님을 타락시킨 게 김혜원, 네 어미야.”
엄마를 욕하는 말에도 사빈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대들었다가 어떤 꼴을 당했었는지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반항은 매를 늘릴 뿐이었다.
“…….”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빈을 보자 추연실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김혜원과 닮아 있는 저 얼굴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련님을 빼앗아 간 것으로도 모자라 죽인 여자. 그리고 그 여자와 꼭 닮아 있는 딸.
추연실은 천문호와 정략결혼을 했고, 상견례 자리에서 천문호의 동생인 천진호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집안의 이익과 미래를 포기할 수 없어서 추연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천문호와 결혼했다.
[형수님, 이리 주세요. 무거우니까 제가 들게요.]
차갑고 까다로운 천문호와는 다르게, 천진호는 맑고 바른 사람이었다.
추연실은 형수라는 이름 아래 제 감정을 숨기고 진호와 가깝게 지냈다. 진호도 자신을 아껴 주는 추연실을 누님처럼 따랐다.
그러나 김혜원을 만나자마자 진호는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제 아내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난 동서가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알려 주려고 한 건데.]
[벌레 보듯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비꼬지 않았습니까. 정말 실망입니다, 형수님.]
혜원의 어깨를 감싸고 집을 나간 진호는 연락을 끊어 버렸다.
그 후 몇 년 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김혜원의 제안으로 함께 해남 땅 끝 마을에 취재를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추연실이 사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하는 이유였다.
“네 안에 네 어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명심해. 남자 죽이는 팔자 갖고 태어난 여자의 피 말이야.”
“…….”
“대답 안 하니?”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사빈의 뺨이라도 때려야 속이 시원할 테지만, 강헌이 집에 와 있었다.
잡음이 생기면 곤란하다. 부어오른 볼을 무어라 설명할 것이며, 사빈이 제 남편의 애정을 믿고 덜컥 입이라도 열면 어쩌나.
감정이 때론 이득을 앞지른다는 것을 진호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추연실이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결혼했지만, 사빈에 대한 강헌의 감정이 깊어진다면 앞일은 장담할 수 없다.
천문호와 협력하여 얻는 이익 대신 사빈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네가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잘 지낸다면 네 부모의 제사를 지내게 해 줄 수도 있다.”
사빈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이세요?”
“자식이 부모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면 쓰겠니. 그러니 잘해라. 알겠지?”
“네, 네, 어머니. 잘할게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문호와 추연실은 사빈에게 그녀의 부모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것조차 사빈을 저희들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목줄로 삼았다.
“네 큰오빠가 사업을 할 계획인데, 이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네?”
“잘할 수 있지?”
사빈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 아직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어요. 벌써부터 그런 걸 요구하면…….”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그거야 네 재량껏 알아서 할 일이고.”
“하지만 어머니.”
“더 토 달지 마라. 이제 그만 나가자꾸나.”
추연실은 방문을 열었다. 아래층 거실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접실에서 나온 모양이구나. 어서 내려오렴.”
입술을 깨문 사빈이 먼저 등 돌려 내려가는 추연실의 뒤를 힘없이 따랐다.
“어머, 벌써들 나오셨네요?”
“이제 보내 주어야지. 신혼부부 오래 잡아 놓으면 못 써요.”
천문호가 인자하게 웃었다. 사빈은 소름이 끼치는 팔을 쓸어내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추연실이 사빈을 끌어안았다.
“우리 딸, 엄마 아빠한테 전화 자주자주 하고. 알았지?”
“……네, 어머니. 그럴게요.”
“어디, 아빠하고도 좀 안아 보자.”
사빈은 일그러지는 얼굴에 억지로 힘을 주며 팔을 벌린 천문호에게 안겼다.
“이 서방한테 잘해야 한다. 알겠지?”
“……네, 아버지.”
“엄마 아빠가 우리 딸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다정한 목소리에 묻어 있는 싸늘한 경고에 사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 등을 두드리는 천문호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운전 조심하고. 사돈어른들께 안부 전해 주게.”
“예.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인 강헌이 사빈의 손을 붙잡고 천문호의 집을 나섰다.
어쩐지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아서, 강헌은 사빈을 쳐다보았다.
“왜요?”
하얀 얼굴. 본래 피부색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희게 질려 보인다.
“아픈 건 괜찮습니까?”
“아픈 게 아니라 긴장한 거라고 했잖아요. 괜찮아요.”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흠칫한 사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강헌 씨랑 부부로서 인사드리니까 좀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본인이 저렇게 말한다면야.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린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탁. 문을 닫아 준 강헌이 운전석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이 사빈이 숨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박 여사님께 데이트하고 들어간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
“사빈 씨?”
“네? 아, 네. 데이트요. 해야죠.”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강헌은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어머님과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아뇨.”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술관에 가 보지 않겠습니까?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라 머리 식히기에도 좋을 겁니다.”
“네, 좋아요.”
미소 지으며 대답한 사빈은 곧 입술을 깨물었다.
강헌에게 무진의 사업에 관한 얘기를 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까.
그는 오너 일가지만 ‘낙하산’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남자다.
그런 사람에게 제 오빠의 뒤를 봐 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날 경멸하겠지. 그럼 함께 생활하는 내내 괴로울 텐데. 하아…….’
답답한 속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와중에 미술관에 도착했다.
천문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과연 강헌의 말대로 한적함을 넘어서 호젓하기까지 한 곳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꼭 섬 같아요.”
“길을 잘못 들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됐습니다.”
“행운이었네요.”
“그런 셈이죠.”
차에서 내리자마자 강헌이 사빈의 손을 붙잡았다.
“여, 여기에서는…….”
“미술관 직원이 보고 있으니까.”
무심히 대답한 강헌이 그녀의 손을 고쳐 쥐었다. 사빈도 발리에서부터 나름 적응한 터라 별말하지 않고 그를 따랐다.
입구에는 미술 전시 주제 포스터가 입간판으로 제작되어 서 있었다.
‘만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사빈은 속으로 포스터에 쓰인 주제를 가만히 읽어 보았다.
그들은 입구를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킨 직사각형의 건물은 현대적이고 심플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그런지 아늑함이 느껴졌다.
들어서자마자 비치되어 있는 팸플릿을 챙긴 사빈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시작점인 왼쪽 코너로 향했다.
“색깔이 과감하네요. 구성도 특이하고.”
그림에 집중하는 사빈의 옆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하는 그녀를 보던 강헌.
문득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희가 서 있었다.
“…….”
놀란 듯 크게 뜬 눈이 맞잡은 강헌과 사빈의 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