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꾹.
강헌이 주먹을 쥐었다.
설마 재희를 불러낼 생각인가. 사빈과 함께 있는 자리에.
“어떠니?”
사빈이 강헌을 보며 눈으로 의견을 구했다.
“강헌 씨, 그럴까요?”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이 회장이 재희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므로.
또한…… 사빈에게도.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실장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마.”
몇 차례 형식적인 대화와 웃음을 나눈 후, 사빈과 강헌은 서초동으로 향했다.
한남동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차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속은 들끓고 있었다.
강헌은 이 회장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사빈은 천문호와 그의 가족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본가에 가까워질수록 사빈의 안색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쿵. 쿵. 얼어붙은 몸과는 다르게 심장은 불안하게 날뛰었다.
천문호의 집으로 향할 때면 늘 이랬다.
눈앞이 새까맣게 흐려지고,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
가고 싶지 않다.
이대로 차를 돌리고 싶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검은 세단은 천문호의 자택 앞에서 매끄럽게 멈춰 섰다.
“다 왔…….”
서초동에 도착한 강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사빈 씨.”
그의 손이 어깨에 닿자 흠칫 놀란 사빈이 저도 모르게 그를 뿌리쳤다.
“미, 미안해요. 놀라서…….”
“괜찮습니까?”
사빈은 늘 괜찮아야 했다.
상대방이 의심할 만한 거리는 만들지 말아야 했다.
숨을 작게 들이마신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아픈 거 아닙니까?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사빈은 당황했지만 금방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그녀의 특기였다.
괜찮아 보이는 것. 그리하여 자신과 집안에 그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몸에 힘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사실, 방금 강헌 씨 본가에서 엄청 긴장했었거든요.”
아, 그랬지. 그녀의 아버지가 사빈은 몸이 약하다고 했었지, 참.
상견례 자리에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약한 몸을 빌미로 이것저것 귀찮게 요구하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기우였다. 사빈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알리려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강헌은 그 사실이 어쩐지 조금 거슬렸다.
“조금 진정된 후에 들어가도 될까요?”
사빈의 말에 강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동시에 미약한 의문이 들었다.
막내딸을 그리 애지중지하는 부모님과 함께 있는 편이 더욱 안심되지 않나?
‘그룹과 얽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무래도 비즈니스 개념이 강한 결혼이다 보니, 혹여 시댁인 기조그룹과 트러블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의문을 해소한 강헌은 사빈이 진정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고마워요.”
침묵을 깨뜨린 사빈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제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
그녀를 살피던 강헌이 무심히 내뱉었다.
“회장님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앞으로 아이 얘기 나와도 무시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사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천문호도 강헌에게 같은 말을 할 텐데 자신은 막아 줄 수가 없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거예요.”
작아지는 그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강헌은 선명하고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합니다.”
먼저 차에서 내린 강헌이 보닛 앞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갑시다.”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사빈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그러자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보호하듯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사빈은 그의 손을 붙잡고 내려 벨을 눌렀다.
철컥, 대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조경이 잘 정비되어 있는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들 오너라.”
천문호와 추연실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았다.
부부의 뒤에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서 있었다. 저희보다 먼저 결혼한 막내 여동생을 맞이하는 오빠들이라기엔 지나치게 무심한 표정이었다.
“길 막혀서 고생했지?”
“평소보다 그리 심하진 않았습니다.”
강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추연실이 사빈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우리 딸, 얼굴 좋아 보인다?”
흠칫. 어깨를 잘게 떤 사빈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강헌 씨와 시댁에서 잘 챙겨 주셔서요. 아버지, 어머니께도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어쩜, 감사해라. 자자, 안으로 들어가자.”
응접실로 향한 그들은 어색하게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식사하고 온대서 디저트 준비했는데.”
“예, 감사합니다.”
강헌이 차를 들었다.
“신혼여행은 재미있었고?”
“예.”
“우리 사빈이가 몸도 약하고 놀 줄도 몰라서 걱정이 되더라고. 이 서방 심심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고.”
추연실의 말에 강헌이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말했다.
“사빈 씨와 함께 지내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그의 시선에 사빈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다행이야. 두 사람이 천생연분인가 봐. 그렇죠, 여보?”
“음. 아주 잘 어울리네. 내가 사위 하나는 잘 얻었어.”
천문호와 추연실은 계속 강헌의 칭찬을 했다. 사빈의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결혼식 끝나고 모임에 갔는데, 글쎄, 사람들이 내내 이 서방 얘기만 하지 뭐야? 인물 훤칠하지, 체격 좋지, 능력 뛰어나, 다들 나더러 전생에 나라를 두 번 구했느냐고 하지 뭐야.”
추연실이 호호, 하며 다소 높은 소리로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소리에 사빈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감추려 찻잔을 들었다.
“그래, 이제 나도 곧 할아버지 소리 들을 수 있는 건가?”
천문호의 말에 사빈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올 게 왔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좋으니 기대가 되네.”
“그러게요, 여보. 친구가 손주 데리고 다니던 게 어찌나 부럽던지.”
“아, 아버지, 어머니, 아직 너무 이른…….”
천문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빈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뱀처럼 서늘했다.
“이르긴. 대학 졸업하고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은 동기들도 수두룩하잖니.”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에 사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침을 삼켰다.
“…….”
그 모습을 강헌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돈어른들께서도 손주 많이 기다리시지?”
천문호가 화살을 강헌에게 돌렸다. 아무래도 사빈을 압박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모양새가 더 나을 듯해서다.
사빈을 압박하다가는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을 강헌에게 보이게 될 수도 있으니까.
“사빈 씨의 마음이 안정되는 게 우선이라고 하셨습니다. 조급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고 하시면서요.”
어쩐지 강헌의 말에 뼈가 있는 듯 느껴져서 천문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강헌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죽은 남동생이 남기고 간 짐 덩어리에게 투자한 만큼 뽑아먹을 수 있으니까.
“……허허. 사돈어른께서 우리 사빈이를 많이 아껴 주시는 모양이야.”
“예, 아주 많이 예뻐하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요.”
강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저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사빈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재희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그의 연기력도 굉장한 편이다.
“어쩐지 우리가 빠져 주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호호. 신혼은 신혼이네요.”
천문호와 추연실은 제법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나 사빈은 그들의 눈빛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잘도 홀렸구나. 제 어미를 닮아서.’
사빈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그들이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형님들께서는 사빈 씨나 제게 궁금한 점 없으십니까?”
강헌이 갑자기 말을 걸자, 무진과 무호는 어어, 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상견례 때도 그렇고 한 마디도 안 하셔서.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까?”
강헌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눈빛과 낮은 음성은 위압적이었다.
“아, 아니, 그런 건…….”
“허허, 아들들이 워낙 과묵해서.”
“그리고 우리 사위가 워낙 유명한 분이셔야 말이지. 우리도 이 서방이랑 마주 앉아서 대화하고 있는 게 아직도 신기한데. 그렇죠, 여보?”
“응, 그렇지. 이제 막 가족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차차 나아질 걸세.”
강헌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무진과 무호를 응시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사빈의 오빠들은 여동생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어색하기 때문이라기에는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지만 남매지간은 우애가 그리 깊지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빈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들이 우리끼리 있을 땐 잘해 주는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쑥스러워서 그런지 말이 없어지는 편이에요.”
그녀의 은은한 미소에 강헌은 완전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의 가풍이 모두 같을 수는 없는 거고, 각자의 질서가 있는 법이라고 말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이들에게도 이들만의 가풍과 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막 가족 구성원이 된 강헌이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군요.”
“이렇게 자주 만나서 안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서히 익숙해질 걸세.”
천문호의 말에 추연실이 동조하며 거들었고 무진과 무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보탰다.
그 이후는 한남동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대화와 웃음이 오갔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 추연실이 사빈을 불렀다.
“우린 여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팔짱을 끼고 응접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
그러나 강헌은 희미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빈은 들어온 직후부터 내내 보기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천문호와 추연실도 내내 상냥하고 즐겁게 대화했으며, 남들 앞에서는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는 오빠들도 강헌의 말 이후로는 대화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평범하게 화목한 집안이다.
그러나 이 이질감은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