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직접 고른 건가?”
강헌이 그녀의 배 앞에서 손깍지를 끼고 몸을 더욱 밀착했다.
“아, 네, 네에.”
“사빈 씨 안목이 좋네요.”
그가 사빈의 어깨에 촉, 작게 입을 맞추었다.
사빈은 경직되어 굳었고, 숙희는 목을 작게 가다듬었다.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아뇨, 내가 직접 운전합니다. 준비하고 나오죠.”
강헌이 사빈의 손을 붙잡아 침실로 이끌었다.
타악.
“박숙희 여사님은 일개미 중 고참입니다. 회장님이 신임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죠.”
그리고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그녀의 손을 놓았다.
“잘 속여야 했습니다.”
“……이해했어요.”
“회장님께서는 아침을 일찍 시작하시는 분이라, 지금쯤이면 정원에서 두 번째로 우려낸 차를 마시고 계실 겁니다.”
사빈은 드레스룸에서 핸드백을 챙겨 나왔다.
“갑시다.”
강헌이 손을 내밀었다.
고용인의 시선이 따라다니는 곳에서는 계속해서 스킨십을 해야 한다.
망설이던 사빈은 그의 손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그가 꽉 붙잡아 왔다.
‘……곤란한데.’
이러다가 습관이 될 것 같다. 아니, 습관이 되어야 하긴 한데.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사빈은 강헌과 손을 붙잡은 채 밖으로 나섰다.
숙희가 막 그림 포장을 끝낸 후였다.
“저녁 식사는 준비할 필요 없습니다. 양가 인사드리고 난 후에 데이트를 할 거라서.”
사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 차가운 표정으로 데이트라는 달콤한 단어를 말할 줄은 몰랐다.
“바로 퇴근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숙희가 고개를 숙였다.
사빈은 차에 탈 때가 되어서야 강헌과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강헌은 손수 조수석의 문을 열어 준 뒤, 그녀의 머리가 차 천장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을 받쳐 주었다.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사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들은 숙희의 배웅을 받으며 서서히 자택을 벗어났다.
사이드미러로 살피니 숙희는 여전히 공수 자세로 이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을 모양인 듯했다.
“박 여사님, 정말 철저하신 분 같아요. 조용히, 빠르게 일하셔서 감탄했어요.”
“보고도 철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저희, 들키지 않았을까요?”
“글쎄. 도착해서 회장님 반응을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사빈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당장 보고를 드리고 있는 거예요?”
“아마도.”
“참 빠르네요.”
숙희의 눈에 그들은 어떻게 보였을까.
“박 여사님은 서재희 씨에 대해 아시나요?”
순간 강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알고 있을 테고, 아니라면 모를 테고.”
“저, 그런데…… 회사 밖에서도 회장님이라고 부르시나요?”
오늘따라 사빈은 거슬리는 말만 한다. 재희도, 이 회장도, 모두 그녀의 입에 담기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이었다.
“회장님이시니까.”
“그래도 지금은 회장님이 아니라 가족으로서 만나러 가는 건데…….”
“집안의 가풍이 모두 같을 수는 없는 겁니다. 호칭이든 뭐든 각자의 질서가 있는 법이니까요.”
차갑게 내려앉은 강헌의 목소리에 사빈은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저 궁금한 것뿐이었어요. 이제 운전 방해 안 할게요.”
입을 다문 사빈은 아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방금 전, 가라앉은 강헌의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빛이 꼭 천문호 같아서.
갑자기 떠맡게 된 귀찮은 짐을 대하는 듯한 분위기를, 사빈은 누구보다도 잘 감지할 수 있었다.
새삼 그들의 계약이 동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강헌이 마음을 바꾸어 당장 자신과 이혼하고 재희와 살겠다고 하면, 사빈은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천문호의 집으로 들어가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지옥이 펼쳐질 것이고, 평생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강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했다.
‘발리에서 아주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또 깜빡했나 보다, 바보 같은 나는.
한남동에 가는 내내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사빈과 강헌.
그러나 도착한 순간부터는 또다시 다정한 부부인 척 연기를 해야 했다.
“……가죠.”
오른손에 그림을 든 강헌이 왼손을 내밀었고, 사빈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꽤나 곤혹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문을 넘어서자 사빈의 입가엔 자연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천문호의 막내 공주님다운 사랑스러운 미소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서훈 회장과 유정희 여사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회장 내외는 맞잡은 강헌과 사빈의 손을 흘깃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견례 때부터 느꼈지만 둘이 참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여보?”
유 여사의 말에 이 회장이 미소로 긍정했다.
“사빈 씨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강헌이 들고 있던 것을 유 여사에게 내밀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서 실장?”
유 여사의 부름에 다이닝룸에서 안경을 쓴 늘씬한 여자가 조용하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
“네, 사모님.”
“우리 며느리가 준비한 선물이라네.”
강헌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은 서 실장이 포장을 풀어냈다.
드러난 그림에 서 실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몇 초간 그림을 살핀 서 실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유 여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괜찮은 작품이라는 감정이 내려진 것이다.
“어디에 배치할까요?”
“우선 1층 복도에 걸어 놓을까?”
“알겠습니다.”
“지금은 말고, 이따가.”
고개를 숙인 서 실장이 그림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거실에 조금만 앉아 있을래? 식사 준비 마무리 중이었거든.”
“아, 저도 도울…….”
“며느리도 귀한 손님인데, 인사 온 첫날부터 일을 시킬 수는 없지.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그래, 우리 며느리는 나랑 편하게 있자꾸나.”
마침 서 실장이 지하에서 올라왔고, 유 여사는 그녀와 함께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이 회장과 강헌 그리고 사빈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 회장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신혼여행은 재미있었고?”
“예, 회장님.”
“사빈이는 어땠니?”
“저도 재밌었어요. 강헌 씨가 잘 챙겨 주어서 편하게 잘 다녔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것을 보니 아주 든든하고 행복하구나. 손주도 빨리 볼 수 있겠어.”
이 회장이 허허, 웃으며 말하자 당황한 사빈은 고개를 숙였다.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 아직 너무 이른 얘깁니다.”
“이르긴. 부부 사이가 이렇게 돈독한데 금방이지.”
“저희 이제 막 식 올린 신혼입니다. 당분간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입니다.”
“아이 낳아도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돌봐 줄 사람은 많아.”
강헌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사빈 씨가 아이를 낳기 위해 시집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회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왜곡하지 마라. 자식이 결혼을 하면 손주를 기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서둘러서 그르치느니 늦춰서 꼼꼼히 살피는 게 더 낫다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강헌이 그녀의 허벅지 위에 놓인 하얀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 급하게 보채지 마십시오. 사빈 씨의 마음이 편한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강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나서 주고 감싸 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늘 혼자였기 때문에 감동은 더했다.
문득 진우가 떠올랐다.
대학 시절, 그는 늘 사빈을 놀렸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천사빈이 속을 알 수 없는 음침한 애라고? 너처럼 함부로 남 평가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얘가 돈을 훔친 것도 아니고, 성실하게 공부해서 정당하게 장학금 탄 건데 그게 뭐가 문제야? 왜, 대가리는 안 굴러가는데 장학금은 받고 싶어? 그래서 질투해?]
[사빈이가 국회의원 딸이라고 자기 입으로 먼저 말한 적 있어? 대우받기를 원한 적 있냐고. 찌질한 네 고백 안 받아 주니까 이젠 그런 식으로 몰아가겠다?]
대개 사빈이 없는 자리에서 진우는 늘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다.
동아리 방에 들어가려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문 너머에서 진우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고.
혹은, 누군가가 말해 주기도 했다.
진우 선배가 널 엄청 감싸 준다고. 둘이 정말 사귀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사빈도 마음을 열고 진우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새삼 고맙네. 쉬운 일이 아닌데.’
결혼식 날도 그렇고, 진우와 만나서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그건 그렇구나. 엄마의 심신이 편해야 아이도 잘 들어서지.”
이 회장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사빈.
어, 엄마라니.
당황한 그녀가 흠칫 굳자, 강헌이 손을 더 꽉 잡아 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이강헌 씨는 내 편이니까, 아이 얘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줄 거야.’
때마침 유 여사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며 그들을 불렀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많이 배고팠지?”
“박 여사님께서 간단히 차려 주셔서 요기만 했습니다.”
“그랬구나. 박 여사가 그런 양 조절은 잘하지. 자, 어서 들자.”
사빈은 제 앞에 있는 반찬을 입에 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도 맛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입맛은 강헌의 집안 쪽과 맞는 듯했다.
잘 먹는 사빈을 보며 이 회장과 유 여사가 미소를 지었다.
“잘 먹어서 너무 예쁘네.”
“아…… 참 맛있네요.”
“어머나, 우리 가사팀 인센티브 넉넉히 줘야겠다.”
강헌도 안 보는 척하며 맛있게 먹는 사빈을 힐끔 보았다.
……다람쥐 같았다. 음식을 품어서 통통하게 차오른 볼이 무척 귀여웠다.
잔뜩 날이 서 있던 강헌의 분위기가 조금씩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그것을 눈치챈 이 회장 부부는 서로 흡족한 눈빛을 교환했다.
식사를 끝낸 후, 그들은 정원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이윽고 서 실장이 차를 내왔다.
“내가 우리 아들, 며느리 저녁을 사 주려고 하는데, 다음 주에 시간 어떠니?”
이 회장의 말에 강헌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제안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사람을 자신이 운영하는 장기의 말처럼 다루었다.
제게 유리하도록, 그리하여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사빈을 끌어들여 무엇을 취하려 하는가.
“내가 자주 가는 한정식집이 있는데, 우리 며느리도 데려가고 싶어서.”
강헌의 얼굴이 굳었다.
이 회장이 자주 가는 한정식집이라면, 결혼식 날 재희와 이 회장이 만났던 바로 그 집이었다.
이 회장이 재희를 이용해 늘 자신을 불러내는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