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그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철가면을 쓴 사나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별명이 생겨날 정도로 무감정한 눈빛에 감정의 불길이 치솟았다.
강헌에 대한 평가는 대개가 겨울과 관련이 있었다.
차갑다. 시리다. 싸늘하다. 얼음. 칼바람. 색채가 없는. 메마른.
그는 누구에게도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재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강헌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었지만 그의 벽을 깰 수는 없었다.
[오빠랑 같이 있어도 난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오빠와 연인인 척, 서로 사랑하는 척.]
[……왜 그런 말을 해.]
[오빠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내 옆에 없다는 건 확실하니까.]
재희는 늘 그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고, 저를 봐 달라며 투정을 부리거나 애원했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으로는 재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었지만, 그의 속은 여전히 빙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재희도 녹일 수 없던 강헌의 세계가 사빈이라는 작은 불길 앞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미간에 힘을 준 강헌은 고개를 홱 돌리고 부러 차갑게 내뱉었다.
“준비 빨리 끝내죠. 일정 늦춰지면 곤란하니.”
그의 말에 사빈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림은 언제 오는 겁니까.”
“8시쯤 온다고 했어요.”
그녀가 대답하며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녀를 스쳐 지날 때.
디퓨저의 향기와 사빈의 체취가 뒤섞여 달큰한 향이 났다.
돌아 버릴 정도로 달아서 꼭 취할 것만 같았다.
강헌이 입가에 힘을 주던 찰나.
“참, 먼저 식사하세요. 전 화장하고 옷 갈아입어야 해서요.”
멈춰 선 사빈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강헌 씨?”
“……그러죠.”
짧게 대꾸한 그는 그대로 침실을 나가 버렸다.
사빈은 눈을 깜빡거렸다.
‘침대 위에서 빈둥거린다고 생각해서 화났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까 저어되는 모양이다.
냉랭한 그의 눈빛을 떠올린 그녀는 준비를 서둘렀다.
***
“안녕하십니까, 박숙희라고 합니다. 한남동에서 15년 동안 일했고, 오늘부터 본부장님과 사모님을 도와 드리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숙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50대 초반으로, 적당한 몸집에 허리가 꼿꼿했다.
공손하지만 힘 있는 눈빛을 보건대 빈틈없이 일 처리를 하는 신중하고 야무진 성격을 지닌 듯했다.
‘이 사람이 방금 전 침실 문 앞에 숨죽이고 서서 저와 강헌을 살피던 사람이구나.’
그러나 숙희의 표정과 태도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강헌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닮았나 보다.
냉정하고 무감정한 면이.
“천사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아직은 어색한 호칭에 사빈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저는 주로 음식을 담당하고, 오후에 다른 가사일을 거들어 줄 사람이 한 명 더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오늘은 본가 다녀오시고 피곤하실 테니, 내일 인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사빈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한 사람분의 음식을 보고 숙희에게 물었다.
“강헌 씨는요?”
“본부장님께서는 앞서 식사를 마치고 서재로 올라가셨습니다.”
“참, 7시 반쯤에 한남동에 보낼 그림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숙희는 사빈이 부르면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적당한 거리에 공수 자세로 서 있었다.
감시당하는 것에 익숙한 사빈이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천문호의 집에서 생활할 때보다는 편히 있고 싶었다.
“여사님.”
“네, 사모님.”
“저 먹을 동안 편히 쉬셔도 돼요.”
“불편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다행히 숙희는 괜찮으니 서 있겠다고 하지 않고 다이닝룸에 딸린 곁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사빈은 좀 더 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천문호와 그의 가족은 음식의 간이 센 것을 좋아했는데, 사빈에게는 너무 강했다.
그래서 조금밖에 먹지 못했고, 늘 물을 달고 살았다.
물론 물도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셨다. 안 그럼 ‘얹혀사는 주제에 음식까지 따진다’며 체벌을 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나 숙희의 음식은 간이 적당해서 아주 맛있었다.
감시하는 시선도 없으니 소화도 잘 되는 기분이었다.
간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사빈은 숙희에게 맛있었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서재에 올라가 있을게요. 그림 오면 알려 주시겠어요?”
“네, 사모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에 사빈이 작게 미소를 짓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강헌의 서재와 그녀의 서재는 복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었다.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겠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사빈은 이내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으음, 시원해.”
아침의 냄새가 몸속을 신선하게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봐도 좋구나, 내 서재.”
미소를 지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색 노트를 펼쳤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어제 적은 글귀를 보니 마음이 찡- 울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사빈은 그 밑에다가 부모님과 대화하듯 적어 내려갔다.
오랜만에 맛있는 밥을 먹었어.
엄마가 해 준 미역국이랑 아빠가 만들어 준 주먹밥 먹고 싶다.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잘할 수 있을까? 긴장돼!
내 서재가 생겨서 좋아.
잠시 멈칫하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내 남편 어때?
사빈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내 남편’이라는 글자를 보니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치 강헌이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사빈은 노트를 덮었다.
‘누가 보면 안 되는데.’
사빈은 책상에 딸린 서랍을 당겼으나 열리지 않았다.
열쇠 구멍이 딸린 것을 본 사빈은 책상 오른쪽에 놓인 스테인리스 재질의 펜 트레이에 조용히 누워 있는 열쇠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그것은 서랍 열쇠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열쇠를 복사해 놨으면 어쩌지?’
천문호의 집에서는 일기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추연실이나 가사 도우미가 이따금 정리를 해 준다는 명목하에 방을 뒤졌기 때문이다.
혹여 남자와 접촉을 하지는 않았을까, 유익하지 않은 정보를 접하지는 않았을까 감시하기 위해서다.
어릴 적, 기자 몇 명이 사빈의 등하굣길에 천문호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다고 기다렸던 일이 있고 나서부터 쭉 그래 왔다.
잠깐 생각하던 사빈은 노트의 가장 뒷장을 조금 찢어 냈다.
서랍 안에 노트를 넣고 닫은 사빈은 틈 사이에 종이를 끼우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고 종이가 끼인 모양을 잘 기억해 두었다.
누군가 열었다면 티가 나리라.
자리에서 일어난 사빈은 소파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곳에 몸을 던졌다.
“이래도 뭐라는 사람 하나 없구나. 너무 좋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서재에서 즐겁게 빈둥거리던 사빈은 그림이 도착했다는 말에 방에서 나왔다.
“강헌 씨는요?”
“여전히 서재에 계십니다.”
“제가 말할게요.”
“네, 그럼 포장 해체하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작게 숙인 숙희가 1층으로 내려갔다.
숨을 들이마신 사빈은 강헌의 서재 문을 똑똑 두드렸다.
-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아, 그림이 도착해서요. 방해한 거라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달칵 열렸다.
놀란 사빈은 한 걸음 물러났다.
“……부딪쳤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도 강헌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빈을 훑어 내렸다.
“방해하지 않고 저 혼자 내려가서 본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무언가 말하려던 강헌은 입을 한 번 꾹 닫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같이 보죠. 그러기로 했으니.”
꼭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다. 말을 꺼냈으니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듯.
“강헌 씨가 바쁜 거 잘 알고 있어요.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전 그림도 그렇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럼, 하고 살짝 웃은 사빈이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갔다.
“…….”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뒤, 그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자신이 없는 편이 더욱 편할 것이다.
뭐든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니까.
어쩐지 기분이 더욱 가라앉는다.
마른세수를 한 그는 다시 어두운 공간에 홀로 앉아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림을 봐 달라던 사빈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서재를 나와 1층으로 향했다.
“여사님 보시기에는 어때요? 아버님, 어머님 취향에 맞을까요?”
“괜찮으실 듯합니다. 얼마 전에 화사한 그림에 눈이 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한남동 자택 분위기와도 맞을까요?”
사빈은 숙희와 그림을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저보다 이 회장과 유 여사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숙희가 있으니 자신은 필요 없을 듯했다.
하지만 강헌은 그림과 숙희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사빈의 옆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야무지게 다물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으로 인해 붉게 부푼 모양새가 야릇하다.
“본부장님.”
그를 발견한 숙희의 말에 사빈이 고개를 돌렸다.
“어? 언제 내려왔어요, 강헌 씨?”
“……방금.”
강헌은 다시 위로 올라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녀에게 향했다.
숙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그는 사빈의 옆에 와서 섰다.
“어때요? 한남동에 어울릴까요?”
“음, 글쎄.”
그가 사빈의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바싹 당겼다.
당황한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지만, 강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박 여사님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1층 복도나 2층 거실과 잘 어우러질 것 같습니다.”
뒤에 서 있는 숙희가 신경 쓰인 사빈은 몸을 조금 비틀며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헌은 그녀가 빠져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
사빈의 허리를 더욱 당겨 아예 뒤에서 끌어안아 버린 강헌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본가에 있는 내 방에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움찔.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귀를 감싸자 사빈은 등줄기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