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31)화 (31/90)

제31화

삑삑삑삑. 스르륵, 탁.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사빈은 시계를 보았다.

5시 50분.

고용인이 출근한 모양이다.

새벽은 너무나도 고요해서 아주 자그마한 기척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을 듯했다.

안으로 들어온 고용인이 침실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강헌이 씻는 소리는 고용인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침실에 딸린 드레스룸과 욕실로 향하는 미닫이문은 닫혀 있고, 강헌 또한 욕실 문을 닫고 있을 테니까.

“…….”

침실 앞에서 얼마간 숨을 죽이고 서 있던 고용인이 저벅저벅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의 구조는 현관을 들어오면 문 오른쪽 바로 옆이 게스트용 화장실이었고, 정면으로는 너른 거실이 펼쳐져 있다.

거실로 들어와 곧장 오른쪽으로 향하면 다이닝룸이 있다. 굳이 반대편에 있는 침실에 들를 필요는 없단 얘기다.

고용인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하나.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

깨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안에서 일어난 기척이 들리면 다시 문 앞으로 다가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강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차가운 눈빛. 덜 잠긴 단추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근육이 그가 자기 관리에 얼마나 뛰어난지 말해 준다.

아직 출근 준비를 하기 전인데도 그에게선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저 남자가 편하게 풀어질 때도 있을까?’

사빈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마 그 모습은 재희만이 볼 수 있으리라.

“강헌 씨.”

사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보낸 분이 출근하셨어요.”

그녀는 문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침실 앞에 몇 초간 서 있다가 다이닝룸으로 가셨어요.”

강헌의 눈빛이 짙어졌다.

어쩐지 어제오늘 그의 눈 밑이 평소보다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하죠.”

“지, 지금요?”

“깨어 있다는 티를 내면 다시 와서 들을 겁니다.”

그는 여전히 어두운 색깔의 실크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앞서 샤워를 마친 사빈 또한 어젯밤 강헌의 옷을 빌려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 그대로였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바지의 허리춤을 붙잡고 문 앞에서 어색하게 서서 그를 보았다.

“어……떻게 시작하면 돼요?”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강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사빈의 두 손을 붙잡아 제 목을 두르게 했다.

골반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강헌의 바지가 그녀의 다리를 타고 힘없이 흘러내렸다.

“앗, 잠깐.”

그가 사빈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발목에 걸렸던 바지는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

간신히 큰 소리를 참아 낸 사빈이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강헌은 침대 위에 사빈을 살포시 내려놓은 뒤 자신도 옆에 앉았다.

“올라와요.”

그의 무감정한 얼굴에 사빈은 제가 잘못 들은 것인지 의심했다.

“내 위로 올라와 앉아요. 얼른.”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강헌은 지금 자신의 다리 위로 올라와 마주 앉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빈이 망설이자, 강헌은 그녀와는 다르게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앗……!”

이번에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노, 놀랐잖아요.”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사빈.

맞닿은 모든 곳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너무나도 민망했다.

무척이나 단단하고 뜨거운 남자의 몸은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방금 전에 낸 소리는 바깥에 들렸을 겁니다.”

과연 고용인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용조용하긴 했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저렇게 티를 내면서 오나요?”

“회장님 지시입니다. 당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늘 잊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혐오가 스쳤다.

“연극이든 뭐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라는 의미지.”

사빈은 어제저녁, 이서훈 회장의 상냥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며느리라는 위치 때문에 대접을 해 주는 것이지, 그가 제게 원하는 것은 천문호와 같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라는 점이.

‘나는 누군가의 도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걸까.’

사빈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지금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반드시 벗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헌과 계약을 한 것이 아닌가.

“뭐 합니까?”

“아뇨, 생각을 좀.”

“끝났습니까?”

강헌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키스부터 하려고 하는데.”

“아…….”

“눈, 안 감아도 되겠어?”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오싹.

사빈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묘한 감각에 눈을 꽉 감았다.

잘게 떨리는 긴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던 강헌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다, 생각을 바꾸어 곧장 입술을 겹쳤다.

그런 배려는 연인에게나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흡……!”

그녀가 강헌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맞닿아 비벼지는 입술이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져서, 사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물렸다.

하나 강헌은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다.

손으로 사빈의 머리를 감싼 그는 다시 입술을 포개며 곧장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움찔하는 그녀의 허리를 커다란 손이 느른하게 쓸어내렸다.

“으응…….”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사빈.

긴장으로 단단히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강헌의 허리를 압박하듯 달라붙었다.

이번에 움찔한 것은 그였다.

거대하고 단단한 몸이 순식간에 열기에 휩싸였다.

질척이는 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자극했고, 그들은 더욱 흥분했다.

사빈은 문 앞에 서 있는 고용인이 신경 쓰였으나, 강헌이 주는 강한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의 입술이 긴 목을 타고 쪽쪽, 아래로 내려갔다.

“강헌 씨, 잠깐만요…….”

“멈추면 눈치챌 거야.”

휑하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강헌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살결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하으…….”

“소리는 참지 말고 최대한 들리게.”

척추를 훑던 손이 위로 더욱 올라가 속옷 끈에 다다랐다.

‘서, 설마 풀려고?’

그녀가 강헌의 팔을 붙잡았다.

“가, 강헌 씨,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회장님이 보낸 사람은 철저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툭.

서로에게 얽혀 있던 작은 쇠 걸쇠가 풀렸다.

“잠깐, 잠깐요! 저, 정말로…….”

만지려는 거예요?

사빈은 차마 이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하나 강헌은 알아들은 눈빛이었다.

“그럼 오늘은.”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올라간 손이 그녀의 뒷목에 닿았다.

“이렇게만 하죠.”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커다란 손이 맨살 위를 위아래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뜨거운 손길에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고 자극이 단단하게 뭉쳤다.

쇄골 위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이내 강하게 빨아들이며 붉은 자국을 남겼다.

“아…… 읏…….”

그녀의 신음에 강헌의 목에서도 거칠게 긁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 녹아 버릴 것만 같다.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 몸이 서로를 흠뻑 적시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사빈의 입술을 베어 문 강헌은 느리게 혀를 섞었다.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더운 숨결 한 조각도 놓치지 않았다.

닿으면 뜨거운 여자.

거부감이 들지 않는 사람.

계속해서 안고 싶고,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이상한 천사빈.

동시에 재희를 향한 죄책감이 강헌의 가슴을 지독히 짓눌렀다.

강헌은 사빈의 어깨를 붙잡고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하…….”

달뜬 얼굴로 숨을 가쁘게 내쉬는 사빈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의 가슴과 어깨처럼, 강헌의 감정도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사빈을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강헌은 표정을 굳히며 그녀를 옆으로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문에 가까이 다가간 그는 열기를 완벽히 지워 낸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슬슬 외출 준비 해야겠습니다.”

주춤. 문 맞은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 했다간 오늘 일정을 맞추지 못할 것 같으니.”

저벅저벅. 고용인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강헌은 미닫이문을 열고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갔다.

탁. 그가 문을 닫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빈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직까지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거웠어…….’

차가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이대로 타 버려 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녀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더듬었다.

“진짜 키스는 이런 거구나.”

사빈의 첫 키스 상대는 중학교 3학년 때,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했던 한 남자애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애와 키스를 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천문호를 향한 작은 복수였다.

[그 누구의 손도 타면 안 된다. 순결하고 깨끗해야 가치가 높은 법이다.]

[……네, 아버지.]

[난 너에게 투자를 했고, 넌 내게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자와는 절대 닿지 말고, 되도록 눈도 마주치지 마라.]

제게 늘 그렇게 주지시키며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만들었던 천문호다.

그런 그의 눈을 피해 남자와 키스를 한 날, 사빈은 희미한 고양감에 들떴다.

여전히 자신이 ‘순결하고 깨끗하다’고 믿는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진짜 키스를 했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짜릿하고 야릇한 키스를.

첫 키스는 밍밍했다. 입술과 혀가 살짝 닿은 정도였다.

어린 학생이었으니 상대도, 자신도 무지했다. ‘제대로 된 키스’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키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 지금이야말로 첫 키스의 순간이 아닐까.

“난 준비 끝났습니다. 사빈 씨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헌은 자신의 티셔츠만 입은 채 침대에 누워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며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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