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한편, 드레스룸이 있는 곳으로 들어온 사빈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서로에게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미묘한 동료애가 싹텄다.
그러다 재희의 이름을 보는 순간, 괜히 이상한 죄책감이 생겼다.
꼭……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다가 걸린 기분이었다.
침실을 힐끗 본 그녀는 드레스룸 옆의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우리는 비즈니스 파트너야. 계약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과 감정은 절대로 안 돼.”
욕실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자신의 옷이 걸린 옷장 앞에 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잠옷을 놓고 왔어!’
사빈은 오늘 아침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발리에서 강헌과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난 아침.
캐리어 위에 속옷을 올려놓은 것이 생각나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얼른 캐리어를 정리했었다.
갈아입고 난 잠옷은 욕실 선반 위에 벗어 둔 채였다.
어쩐지, 아까 이 집에 도착해서 캐리어를 정리할 때도 잠옷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빨리 서재를 구경해야겠다는 생각에 급급한 나머지 잠옷은 깜빡 잊고 있었다.
‘어쩌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사빈은 옷장을 열어 보았다.
잠옷으로 삼을 만한 옷이 한 벌쯤은 있겠지.
두 번째 옷장을 연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마셨다.
몸에 딱 달라붙는 실크 네글리제가 걸려 있었다.
흰색 세 벌, 연분홍색 두 벌.
문제는, 디자인이 너무 야했다.
죄다 끊어질 것 같은 가냘픈 어깨끈에, 가슴 부분은 푹 파였고, 척 보아도 몸에 딱 달라붙을 것 같은 사이즈였다.
‘이, 이런 걸 어떻게 입어!’
그녀는 얼른 서랍을 뒤져 보았다. 저걸 입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티셔츠 같은 것은 없었고, 전부 셔츠나 블라우스, 원피스 등의 옷만 걸려 있었다.
발리에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으려니 세탁을 하지 않아서 찝찝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한꺼번에 빨래를 맡기려고 했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이야!
또한 한 침대를 쓰는 강헌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셔츠를 입고 나갈 수는…….
“…….”
사빈은 맞은편에 있는 강헌의 옷장을 보았다.
거기도 재킷과 셔츠만 잔뜩 걸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이즈가 크니 저 야한 네글리제보다는 나을 듯했다.
‘입어도 될까?’
민망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방법밖엔 없었다.
한숨을 내쉰 사빈은 그가 통화를 끝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침실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나도.”
낮고 진한 강헌의 음성에 순간 사빈은 멈칫했다.
“보고 싶다, 재희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해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헌은 마무리 인사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말을 걸어도 될까?
망설이던 사빈은 강헌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황량한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한없이 쓸쓸하고 공허했다.
재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건 자신의 권한 밖이니까.
“아, 그게.”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잠옷으로 강헌 씨 옷 좀 빌려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말에 강헌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사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죄송해요, 잠옷을 발리에 두고 오는 바람에.”
“…….”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토, 통화가 끝난 것 같아서…….”
방해. 강헌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둡게 내려앉았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사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치 보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속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옷장 안에 종류별로 빠짐없이 채워 넣으라고 지시했는데. 없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그게…….”
말보다는 설명이 낫겠지.
사빈은 새빨개진 얼굴로 네글리제를 가져와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옷들이라서요. 입고 자기에는 조금, 음…….”
확실히 강헌도 무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말이 없어진 것을 보면.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오는 강헌과 스쳐 지날 때, 발리의 호텔에서 맡았던 디퓨저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이러니까 꼭 여전히 발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거나 주면 됩니까?”
“네? 네.”
강헌은 평상복으로 입던 티셔츠를 꺼내 주었다.
눈대중으로 살피니 사빈의 허벅지까지는 가려 줄 듯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티셔츠를 입은 사빈을 상상하자 피가 한곳으로 몰렸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바지는 이걸로.”
운동할 때 입는 트레이닝복을 찾아 던지듯 내어 준 그는 서둘러 드레스룸에서 빠져나갔다.
‘휴우, 다행이다.’
하마터면 저 요상한 옷을 입고 잘 뻔했다.
그러나 강헌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빈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저 요상한 옷이 나을까?’
그의 옷이 커도 너무 컸다.
티셔츠는 원피스처럼 보여서 그나마 봐 줄 만한데…….
문제는 바지였다.
허리를 아무리 조여도 스르르 흘러내렸다.
야한 꼴인가, 웃긴 꼴인가.
최악의 기로에 놓인 사빈은 일단 허리춤을 부여잡고 나가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어기적거리며 침대로 향한 사빈은 최대한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피했다.
“이, 이제 불 끄고 잘까요?”
역시 최대한 그녀를 보지 않으려던 강헌은 어쩌다 고개를 들어 사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재희와 통화를 끝낸 후,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바, 방금 비웃은 거죠!”
사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이상하지.
좀처럼 헤치고 나올 수 없던 어둠 속에서, 사빈은 순식간에 자신을 빛 아래로 끌고 나온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그저 얼굴을 붉히거나 미소를 짓는 등의 작은 행동만으로도 사빈은 너무나도 쉽게 강헌을 뒤흔들었다.
“강헌 씨 옷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 것 같군요.”
“……보지 마세요.”
얼굴이 새빨개진 사빈.
얼른 이불을 들추어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눕고 스탠드를 껐다.
‘누구는 이렇게 입고 싶어서 입은 줄 아나?’
“이강헌 씨도 제 옷을 입으면 웃길 거예요.”
작게 내뱉은 뾰로통한 사빈의 말에 강헌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들어가지도 않을 겁니다.”
“……어쨌든요.”
커다란 자신의 옷에 휘감긴 듯한 사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제게서 돌아누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숨을 낮게 들이켰다.
한쪽으로 쏠려 몸에 달라붙은 옷은 쏙 들어간 잘록한 허리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거기에 목덜미가 헐렁하여 어깨 부분이 휑하게 드러나 있었다.
저 여리고 가는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녀를 안아 들었을 때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강헌은 얼른 스탠드를 끄고 자신도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한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있었다.
“고용인은 6시쯤 올 겁니다.”
“……네.”
“그 전에 일어나서 관계를 갖는 척하죠.”
관계, 라는 말에 사빈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직 해 본 적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베개를 꼭 쥐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하세요?”
“다음 주부터.”
“그럼……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나요?”
“아마도.”
잠시 침묵.
“고용인들에게 우리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을 보여 줄 기횝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어디까지 하나요?”
“계속 닿아 있어야 하고, 입맞춤 정도는 해야겠지. 누가 보지 않는 줄 알고 몰래 스킨십을 하다 들키면 좋을 듯한데.”
마치 사업계획서를 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강헌의 음성에 사빈은 조금 안도했다.
그가 잘 이끌어 주리라는 확신이 생겨서다.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수위를 잘 조절해서 이성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관계를 들키지 않고 완벽히 속이는 것. 그리하여 1년 후에는 각자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것.
목표를 다시 한번 상기한 사빈은 눈을 감았다.
어젯밤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
강헌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온 신경은 등 뒤에 누운 사빈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녀가 작게 뒤척이기만 해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고, 얕은 숨소리는 커다랗게 들렸다.
사빈은 자신과 같이 누워 있어도 괜찮은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강헌은 어쩐지 심사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른 숨을 내쉬는 사빈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오르내렸다.
코끝에 은은히 밀려오는 향기를 맡는 순간.
강헌은 착각에 빠지고 싶어졌다.
그들이 여전히 발리에 있다고.
하나 재희와의 통화를 떠올린 그는 사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돌아누웠다.
재희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 애는 너무 연약하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저밖에 없다.
사빈은 다르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끔찍이 생각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으음.”
사빈이 뒤척이는 소리에 강헌은 다시 돌아눕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참았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내일 사빈에게 말해야겠다.
1년 후에 반드시 헤어져 주겠노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희에게 또 크게 상처를 주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