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29)화 (29/90)

제29화

“아버지, 한국에 도착했어요. 잘 다녀왔다고 연락드리려고 전화했어요.”

- 발리에서는 한국으로 전화를 걸 수 없던 모양이로구나.

차분하고 스산한 음성에 사빈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 많이 편했던 모양이지? 그새 정신머리가 풀린 걸 보니.

사빈의 귀에 천문호가 허리띠를 풀어내는 환청이 들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 옆에 이강헌이 있나?

“……네, 아버지.”

- 그런데 그리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 어쩌니. 아무 말 하지 말고 몇 초 기다려라. 내 얘기를 듣는 것처럼.

“…….”

- 이제 웃어라.

사빈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엎어 놓은 반달처럼 접힌 눈꼬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공주님’이라는 별명을 지닌 천문호의 막내딸다운 얼굴이었다.

- 소리 내어 웃어라. 그리고 이강헌이 바꿔.

“……하하, 네, 아버지. 잠시만요.”

사빈이 눈을 접은 채 강헌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강헌 씨와 통화하고 싶으시다는데.”

“그러죠.”

강헌이 사빈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가족과 통화하니 좋은 모양이다. 아닌 척해도 내심 그리웠던 모양이지.

강헌은 그녀의 붉은 눈가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예, 의원님.”

- 허허, 섭섭한 호칭일세.

“……아버님.”

- 그래, 이 서방. 많이 고단하지?

“괜찮습니다. 제가 사빈 씨를 붙잡고 있느라 전화드리는 걸 깜박했습니다. 너무 탓하진 말아 주십시오.”

멈칫. 사빈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잠깐의 대화만 듣고도 유추해 내다니.

‘방심하면 안 되겠어, 절대로.’

- ……우리 딸이 몸이 약해서 말이야.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오래 떨어진 적이 없었거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 내 이 서방만 믿네. 아주 든든하이.

“내일 찾아뵈려고 하는데, 언제가 편하십니까?”

- 사돈댁에 먼저 다녀오게. 우리는 오후가 편할 듯싶네.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사빈이 마음을 놓던 그때.

“아. 사빈 씨 바꿔 드릴까요?”

- 그럼세.

강헌은 사빈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한껏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화목한 가정이군.’

그렇게 독립을 하고 싶었다면서, 부모님과 통화를 하니 좋은 모양이다.

사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기에 참 좋았다.

친정에 자주 보내 주어야겠다.

그럼 저 미소를 계속해서 볼 수 있을 테니까.

- 아이는 생길 것 같으냐?

하마터면 동요할 뻔한 사빈은 능숙하게 속을 감추었다.

“아이는 조금 이른 듯해요, 아버지.”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자신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천문호였다.

하지만 강헌이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그냥 넘어가 주었다.

- 그래, 그리 반응해야 새색시답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아이 갖도록 해라. 발리에서 만들어졌다면 좋으련만.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

- 이강헌이가 피곤하다고 넘기려 해도 어떻게 해서든 잠자리 가져라. 아이를 낳아야 기조그룹과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 네 쓰임을 잊지 말거라. 난 언제든 널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좋아. 이제 웃으면서 인사하고 끊어라.

사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툭. 천문호가 먼저 전화를 끊고 몇 초 후에 사빈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라 부르는 걸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네?”

“말끝마다 ‘아버지’를 붙이는 게 습관인 듯해서.”

순간 사빈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대답 끝에는 꼭 ‘아버지’나 ‘어머니’를 붙이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잖니.]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뺨을 맞았다. 그렇게 형성된 습관이었다.

천문호의 커다란 손의 크기와 후려칠 때의 강한 힘이 떠오르자 그녀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사빈 씨.”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빈은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불러 드리면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하셔서요.”

기뻐 보이는 얼굴. 강헌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꽃들이 저희들끼리 수런거리는 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들뜨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묘한 기분.

“부모님을 정말 사랑하는군요. 술버릇도 그렇고.”

네, 전 제 부모님을 사랑해요.

‘진짜 부모님’을 말이에요.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는 사빈은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강헌 씨는 안 그런가요?”

그의 눈동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부모라.

“사빈 씨가 유독 부모님과 친한 듯합니다. 대부분 성장하면 어색해지기 마련이니까.”

강헌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성장하기 전에는 어색하지 않았는지 어쩐지 강헌은 알지 못한다.

지금의 부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색했으니까.

보육원에서 기조그룹 이서훈 회장의 아들로 입적되었을 때,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성장한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나이.

“……그런가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그녀에게 미약한 질투심이 일다가도.

저 미소를 보니 다행이지 싶다.

사빈에게는 어두운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그림은 언제 옵니까?”

“아, 내일 아침에 올 거예요.”

“그럼 검토 후에 오전에 한남동에 들르고 오후에 서초동으로 가죠.”

“……네, 좋아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이제 한남동에 전화드려야겠네요.”

강헌은 말없이 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래.

“회장님,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 지금 도착한 것은 아닐 텐데.

“…….”

- 사빈 양은 잘 있고?

“예. 문제없이 지내고 잘 도착했습니다. 내일 찾아뵐까 합니다.”

- 아이가 들어설 기미는?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이릅니다.”

- 하루빨리 갖도록 해라. 후계가 든든해야 그룹에 이롭다.

자신과 사빈을 꼭 가축 취급하는 듯한 말에 강헌의 눈빛은 혐오감으로 짙게 물들었다.

이 사람에게 과연 인간적인 면모가 있기는 할까.

그러던 강헌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도 이 남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 사빈 양 바꿔 봐라.

강헌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꼭 저와 이 회장의 통화 내용을 듣기라도 한 듯, 사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 한차례 겪고 난 후라서 빨리 알아차린 듯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너무 오래 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강헌이 휴대폰을 사빈에게 넘겨주었다.

- 아가. 잘 다녀왔니?

“네…… 아버님.”

이 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 듣기에 참 좋구나. 힘들지는 않았고?

“네. 강헌 씨가 잘 챙겨 주어서 편했어요.”

- 다행이구나. 녀석이 벌써부터 제 안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 날 구박하는구나.

사빈은 그저 낮게 웃었다.

- 그래, 힘들 텐데 얼른 쉬거라.

“네, 내일 뵐게요. 아버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 오냐. 빨리 놔줘야 내가 손주를 볼 수 있겠지.

순간 사빈의 동공이 흔들렸다.

- 아이는 빨리 가질수록 좋다. 하루라도 젊을 때 낳아야 사빈이도 편하고 우리도 좋지.

“아…….”

- 그럼 쉬고 내일 보자꾸나. 며느리를 맞았으니, 이제 손주 맞을 준비도 하고 싶구나.

사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럼 잘 자렴.

“……네, 아버님. 편히 주무세요.”

강헌이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아이 얘기를 한 겁니까?”

그녀의 표정이 답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합니다.”

“아뇨, 저희 아버지도 다르지 않은걸요.”

저쪽도 전화로 채근했군.

짐작한 강헌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래도 천 의원은 자신에게 언급하지는 않았는데.

본의 아니게 사빈에게 부담을 지워 주고 말았다.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빈이 강헌에게 막 휴대폰을 건네주려 할 때.

벨이 울렸다.

화면에 발신인의 이름이 떴다.

[재희]

“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편하게 통화하세요.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사빈은 그를 배려하여 얼른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강헌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오빠.

“응.”

- 잘 도착했어?

“그래.”

침묵이 흘렀다.

지금껏 재희와 통화를 하면서 이토록 어색한 적은 또 없었던 것 같다.

- 전화 기다렸어. 한국 오자마자 연락해 줄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회장님께도 방금 연락드린 참이야.”

- 어쩐지 결혼한 사람이랑 사이가 좋다는 걸로 들리네. 둘이서 할 일이 많았었나 봐.

강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사빈과 함께 있는 동안 재희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심지어 각자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때도 말이다.

- ……미안해, 순간 감정이 격해졌나 봐. 이해해 줄 거지?

“저녁은?”

- 간단하게 먹었어.

“잘 챙겨 먹으라니까.”

- 이제부터 오빠가 잘 챙겨 줘. 오빠가 옆에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거 있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

어쩐지 강헌은 드레스룸 쪽을 쳐다보게 되었다.

혹여 재희의 목소리가 저쪽까지 들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 발리에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연락해 줄 줄 알았어.

“……미안.”

- 역시, 그건 좀 그런가?

오늘따라 재희와의 통화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 지금 뭐 하고 있어?

“업무보고서 살펴보고 있었어.”

- 보고 싶어, 오빠.

“…….”

- 혼자 있으면 자꾸만 그때가 떠올라.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안 돼. 너무 힘들어.

순간 강헌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날의 악몽이 또다시 강헌을 집어삼켰다.

그래, 자신이 재희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재희는 아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존재다.

감히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빨리 전화를 끊고 싶다는, 이런 생각 따위는.

- 오빠, 너무 보고 싶어. 오빠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럼 안 무서울 것 같아.

“…….”

- 오빠는 어때?

“……그래, 나도.”

- 나 보고 싶다고 내 이름 부르면서 말해 줘.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