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사빈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서재라니. 나만의 공간이라니!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스탠드를 켜지 않았는데도 빛이 가득 들이치는 기분이었다.
강헌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곳은 발리도 아닌데, 왜 사빈은 여전히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가.
“강헌 씨 서재도 봐도 되나요?”
강헌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사빈의 서재보다 두 평 정도 더 큰 그의 서재는 그녀의 공간과는 다르게 묵직하고 웅장한 분위기였다.
밝은 색깔은 없고 온통 무채색이었다.
공간만 보아도 주인이 지닌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색깔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의 옷과 소지품 대부분은 무채색이었고 그중에서도 검정색과 짙은 회색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익숙합니다.”
어두운 것은 보이고 싶지 않은 일면을 모두 가려 준다.
어둠을 어둠으로 가리는 방식은 보육원에서 생활했을 때부터 익숙했다.
“책도 참 많네요. 아, 죄송해요. 손대면 안 되겠죠?”
“봐도 됩니다. 미리 말만 해 준다면.”
“그럼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서재를 살펴본 그들은 1층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어쩐지 기분이 묘해진다.
남자와 같은 침대를 쓰다니.
함께 잠들고, 눈 뜨면 옆에 이 남자가 있다니.
사빈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왜 그럽니까?”
“아, 아뇨. 갑자기 목이 잠겨서.”
침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늑했다. 킹사이즈의 커다란 침대 양옆으로 각자의 협탁과 스탠드가 있었고, 들어오자마자 왼쪽에 나 있는 미닫이문을 열면 드레스룸과 욕실이 나왔다.
새하얀 침대의 시트를 보니 발리에서 묵었던 호텔이 떠올랐다.
“혹시 호텔에서 맡았던 디퓨저 향기 기억나세요?”
“어렴풋이.”
“향이 좋아서 사 왔는데…… 침실에 놔도 될까요?”
사빈이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과 맞추어 가야 한다.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사빈은 강헌과의 마찰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와의 결혼 생활 동안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있고 싶었다.
“좋습니다.”
자신의 대답에 사빈의 얼굴이 환해지자, 강헌은 또다시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씻고 나면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제 공간이라니까 빨리 가 보고 싶은 거 있죠.”
그녀의 말에 강헌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귀엽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미소한 사빈은 트렁크의 짐을 풀어서 여기저기 가져다 놓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강헌은 그녀가 침실 협탁 위에 꺼내 둔 디퓨저와 신랑 인형 마그네틱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집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다.
일전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사빈은 너무 넓은 집보다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곳을 선호하는 듯했다.
그도 공간의 크기는 상관없었다.
넓어 봤자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휑할 뿐이다. 어차피 출근을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니.
그리고 집안 어른들의 기준에서만 초라하지, 이곳도 꽤 넓은 편이었다.
1층에는 거실과 다이닝룸, 침실인 마스터룸, 게스트룸이 하나.
2층에는 침실과 각자의 서재, 그리고 알파룸이 두 개.
지하는 아직 사용처를 정하지 않았다. 그곳은 자신보다 집에서 더 오래 머물 사빈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갤러리에서 근무하니 이것저것 놓으려면 공간이 더 필요하겠지.
정원은 반은 나무 데크를 깔고 반만 조경수를 심었다.
사빈이 원한다면 나무나 꽃을 심을 공간은 충분했다.
그녀는 꽃을 좋아할까?
어떤 꽃을 좋아하려나.
강헌은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기 시작한 자신을 인지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저 계약서를 나눠 가진 사업적 파트너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집을 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뻐근해질 이유도 없었다.
이런 기분은 마치…….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마치 그에게 어서 꿈에서 깨고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이.
[오빠. 지금쯤 한국에 왔겠지? 보고 싶다.]
재희의 메시지를 본 강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희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이토록 기분이 가라앉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늘 관성처럼, 습관처럼 그저 당연하다 여기던 것이었는데.
어쩐지…… 방해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흠칫한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자신이 신경 쓰고 궁금해야 할 사람은 재희다.
이제 막 자신의 아내가 된 사빈이 아니라.
샤워를 끝낸 사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강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음, 향기 좋다.”
숨을 들이마신 사빈은 배시시 웃었다. 꼭 여전히 발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강헌 씨는 서재에 있나?
“아니지. 이제 강헌 씨라고 불러야지.”
내일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실수하면 안 된다.
자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린 사빈은 서재로 향했다.
‘내 서재라니.’
행복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본가에서도 자신의 방은 있었지만, 온전히 그녀의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추연실의 취향으로 꾸며진 새하얀 프로방스풍의 가구와 침구, 소품들로 가득한 그곳에선 언제나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통화를 할 수도 없고,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도 없으며, 온전히 쉴 수도 없는 그곳에 비해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엄마가 방을 꾸며 주었다면 이런 분위기였을까.’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방은 사빈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그녀는 크림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로 향했다.
그들이 살게 될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전망도 좋네.”
사빈은 의자에도 앉아 보았다가 소파에도 누워 본 다음, 책장으로 향했다.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강헌이 골랐을까?
그리 생각하니 낯선 책들의 제목이 조금은 편하게 느껴진다.
손으로 그것들을 가만히 쓸어 본 사빈은 구석에 꽂힌 오렌지색의 노트를 꺼냈다.
“내가 써도 되는 건가?”
내 서재에 있는 거니까 괜찮겠지.
사빈은 스테인리스 소재의 원형 통에서 연필을 꺼냈다.
균일하게 잘 깎인 그것을 보니, 엄마와 아빠가 연필을 깎아 준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사빈이, 이걸로 엄마 그려 주세요.”
“아빠가 깎아 줄게, 아빠가 깎아 준 연필로 아빠 그려 줘.”
“으음, 그럼 가위바위보 해. 이긴 사람부터 그려 줄게.”
사빈의 말에 엄마 아빠는 소리 내어 웃으며 가위바위보를 했고, 사빈은 아빠를 먼저 그렸다.
“연필 쥐는 거, 참 오랜만이네.”
늘 펜이나 이따금 샤프만 쓰다가 연필을 쥐니 그리운 기억이 왈칵왈칵 솟았다.
연필이 빈 노트 위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엄마, 아빠.
쓰고 나니 갑자기 눈앞이 뿌예졌다.
보고 싶어.
툭, 투둑. 눈물이 노트 위로 떨어졌다.
“흑…….”
연필을 내려놓은 사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줄곧 이런 공간이 필요했다.
마음껏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고 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지금껏 잘 참아 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행여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사빈은 버릇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혹여 강헌이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엄마 아빠는 자신의 결혼식을 봤을까.
그날, 사빈은 혼주석에 부모님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며 버텼다.
뒤에서 날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눈물이 한차례 더 쏟아졌다.
손등으로 연신 눈가를 닦아 내며 그리움을 토해 내고 있을 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사빈 씨. 들어가도 됩니까?
놀란 사빈은 얼른 눈가를 닦아 냈지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빈 씨."
문밖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어쩌지, 어떡하지?
일단 목을 가다듬은 사빈은 최대한 평소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양가 어른들께 전화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맞다, 전화!
사빈의 심장이 쿵, 쿵,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발리에서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 또 언제 올까 싶어서 열심히 돌아다닌 탓도 있고, 강헌이 신경 쓰인 탓도 있다.
한국을 떠난 순간부터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인사드리러 갔을 때 처벌을 받게 되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강헌이 함께 있을 테니까 평소처럼은 힘들겠지만.
천문호는 어떻게 해서든 틈을 만들어 낼 위인이었다.
“제, 제가 뭘 좀 하고 있어서요. 곧 나갈게요.”
- 알겠습니다. 침실에 있겠습니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사빈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가 집안 사정을 의심하는 순간, 천문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대로 1년 동안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다가 도망가면 된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할 곳으로.
그렇게 몇 분 더 스스로를 진정시킨 사빈은 서재를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강헌이 있는 침실로 가기 전, 게스트용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붉은 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다행히, 눈을 비벼서 그렇다고 말하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여덟 살부터 지금까지 줄곧 들키지 않았다.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찢겨진 영혼이 너덜너덜해졌어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어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발리에서 강헌과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함부로 마음을 털어놓았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타인에게 도움을 청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천문호의 잔혹한 처벌뿐이었기에.
심호흡을 한 그녀는 화장실을 나와 침실의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뭐 좀 하느라고.”
침대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던 그가 안경을 벗어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안경을 쓰는구나. 잘 어울리네.’
와중에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사빈은 입꼬리에 힘을 주어 대외용 미소를 장착했다.
고개를 돌린 강헌이 그런 사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강헌 씨 본가에 먼저 전화를 걸어야겠죠?”
“아뇨, 사빈 씨 본가에 먼저 합시다.”
멈칫한 그녀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헌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험한 말은 하지 않겠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심장이 쾅쾅, 부서질 듯 뛰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이윽고 천문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