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27)화 (27/90)

제27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아…… 오, 오셨어요.”

“……예.”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그럼.”

저벅저벅 걸어간 강헌이 먼저 누웠고, 사빈은 침대 끄트머리에 매달리듯 최대한 그와 멀찍이 떨어져서 누웠다.

마스터룸의 침대는 무척이나 컸다. 강헌의 체격이 보통이 아닌데도 넉넉할 정도였다.

“사빈 씨.”

요 며칠 들었다고 ‘천사빈 씨’보다 제법 익숙해진 호칭에 그녀가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렇게 떨어져서 잘 겁니까?”

사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헌처럼 익숙한 사람이면 몰라도, 저처럼 이런 것에 면역이 없는 사람은 긴장이 되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전 강헌 씨 같은 프로가 아니라서요.”

“내일이면 둘 다 프로처럼 임해야 할 겁니다.”

잠깐의 침묵 후, 강헌은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보내는 고용인들은 무척이나 철두철미하죠. 조금이라도 어색했다간 눈치챌 거고.”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사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결혼이 무효화될 수도 있다.

‘아버지’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천문호의 얼굴을 떠올리니 명치가 답답해졌다.

‘1년만 버티면 돼. 1년만.’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쉰 사빈이 천천히 몸을 돌려 강헌과 마주 보았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강헌의 이마를 자연스럽게 가리며 내려와 있었다.

우뚝 솟은 콧대를 지나 단정히 다물린 입술까지 내려온 사빈은 다시 시선을 올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그곳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하네요.”

사빈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누군가와 같은 침대에 누워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까.”

깜빡. 그녀의 속눈썹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상한 것은 강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마주 보고 있는데도 불쾌감이나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재희와 있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인사는 내일모레 드리러 가면 되죠?”

“예.”

“그림을 준비했는데. 강헌 씨 부모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강헌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이 회장과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것은 같았다.

명예. 권위. 명성. 권력. 명망. 권세.

대개 비슷비슷한 것들이었다.

“사빈 씨가 집에 오는 것을 가장 좋아하실 겁니다.”

천문호 의원 집안과 연을 맺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더더욱 커지게 되었으니.

“……그런 거 말고요. 파스텔 톤의 추상화를 준비했는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군요.”

하긴,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니까 그림 취향 같은 건 모를 수도 있겠다.

고민하던 사빈을 바라보던 강헌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보고 논의하죠.”

이 회장 부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사빈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

“그럼 고맙고요.”

사빈은 한시름 놓았다.

아무래도 아들이 같이 봐 주는 게 낫겠지. 말을 꺼내는 것도 그렇고.

“내일 저녁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귀국하자마자 저녁에 곧바로 외출하려면 아무래도 힘들 터였다.

“아니면 비서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적당한 것으로 사다 놓으라고.”

“아뇨. 그래도 결혼 후에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건데 선물은 직접 골라야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노라니 강헌과 자신도 제법 부부 태가 나는 듯하다.

그런 생각에 픽 웃자, 강헌이 눈썹을 순간 들어 올렸다.

“왜 웃습니까?”

“침대에 누워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정말 부부 같아서요.”

“정말 부부 맞습니다.”

강헌의 눈빛이 짙어졌다.

“사빈 씨와 나는 결혼을 했고. 이젠 서로가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그의 입으로 정의를 내리니 새삼스럽게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

사실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사빈이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손이 뻗어 왔다.

“왜 피합니까.”

강헌이 그녀의 뺨을 감싸 저를 바라보도록 고정시켰다.

“이제 피하면 안 됩니다.”

그 무엇도.

낮게 덧붙여지는 말에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 통에 제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편했다. 아니, 설렜다.

저녁의 키스가 떠오른 사빈은 문득 이런 달콤한 순간에 익숙해져 버릴 스스로가 두려웠다.

이 남자와는 끝이 정해져 있는 사이다.

마음을 다잡은 사빈이 입을 열었다.

“우리 1년 후에 이혼하는 거죠?”

강헌 역시 그 무엇도 피해서는 안 됐다.

“……노력해 보죠.”

첫날밤, 침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부부는 이혼을 약속했다.

***

발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사빈과 강헌은 내내 잠들어 있었다.

간밤, 서로를 의식하느라 제대로 숙면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빈이 먼저 잠들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강헌 역시 태블릿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강헌은 처음으로 기내 안에서 업무 대신 휴식을 취했다.

한국에 도착한 비행기.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손수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강헌의 비서실에서 제안한 이미지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비서, 운전기사 등 보좌진을 거느린 모습이 아니라, 그들도 여느 신혼부부와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발리에서 둘만 오붓하게 움직인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는 것을 느꼈지만, 사빈과 강헌은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차에 짐을 실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신혼집은 수안구 희락동에 위치한 고급 단독주택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주택은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너무 크고 넓었지만, 이마저도 양가 부모님을 겨우 설득한 것이었다.

[주변 토지를 매입해서 집을 새로 짓는 것이 어떠냐.]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기조그룹의 모토와 맞지 않습니다. 지역에 맞지 않게 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면, 다들 눈속임이라고 할 겁니다.]

그나마 강헌이 강하게 나갔기에 이 정도에 그친 것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집을 새로 지을 뻔했다.

지금 와서는 참 다행이지 싶다.

겨우 1년밖에 되지 않는 결혼 생활을 위해 집을 새로 짓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가 준비한 집이었으므로 인테리어도 그에게 맡겼다.

그래야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도 편하게 사용할 테니.

“와아…….”

차고에서 내려 정원으로 향한 사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그들도 신혼집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각자 결혼 준비에 전념하는 동안, 집은 치장을 마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리으리하네요.”

기조그룹의 이미지 때문에 비교적 심플하고 검소하게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 주택과 비교하면 역시 웅장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강헌은 도어록의 숫자를 눌렀다.

철컥, 하고 커다란 문이 열렸다.

사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국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가 정말 우리가 살 집인가요?”

우리…….

강헌은 어쩐지 듣기 좋은 말을 곱씹으며 놀란 눈으로 집 안을 살펴보는 사빈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엽군.’

그러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사빈은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명 디자이너의 조형물 앞으로 다가갔다.

석고로 만든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표현한 유명한 작품으로, 추연실이 무척이나 탐을 내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빈의 눈에는 그저 주먹으로 때려서 엉망이 되어 버린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천문호와 추연실에 의해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자신의 마음 상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예술 작품인 건가, 싶기도 했지만.

중형차 한 대 값에 맞먹는 가격을 떠올리면 역시 이해가 안 된다.

강헌은 어떨까.

이 남자는 예술에 관심이 있을까?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여길까?

‘낙하산이긴 하지만 명색이 갤러리에서 근무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강헌은 조금 어둡게 가라앉는 사빈의 표정에 말을 걸었다.

“사빈 씨.”

생각에 잠겨 있던 사빈은 그가 제 어깨를 감싸며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미안합니다. 놀랐습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사빈은 손으로 가슴께를 짚으며 놀란 속을 진정시켰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려던 강헌은 멈칫하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곳은 발리가 아니다.

마법은 풀렸고, 지금 그들은 현실에 있다.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거실을 살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 좋아요.”

그들은 집 안을 마저 둘러보았다.

왼쪽 벽면에 자리한 벽난로는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세련되면서도 아늑한 인테리어는 사빈의 마음에 쏙 들었다.

대리석 바닥은 반짝반짝했고,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소파, 테이블, 조명 등 모든 게 고급스러웠다.

벽마다 공간에 맞는 그림이 걸려 있어서 꼭 갤러리에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깔끔한 원목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긴?”

“사빈 씨 서재예요.”

“제…… 서재요?”

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봐요.”

사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벽은 밝은 베이지색이었고 가구들은 전부 티크 나무로 만들어졌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메인이 되는 책상은 크고 넓었고 최신식 일체형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양쪽에 놓인 책장은 아직 곳곳이 비어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 넣으리라 생각하니 무척이나 들떴다.

구석에는 일을 하다가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짙은 녹색의 러그 위에 놓인 주황색 계열의 패브릭 소파가 무척 경쾌한 느낌을 주어서 방 안의 포인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파 앞에는 역시 나무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차를 마시거나 화병을 놓으면 아주 예쁠 듯했다.

“마음에 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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