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사빈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떠 보아도 강헌은 여전히 제게 시선을 맞춘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망설이던 사빈이 수줍게 웃으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강헌의 손이 사빈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전 영화의 무도회장 장면처럼 자세를 잡은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가까이 밀착되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닿은 부위는 뜨겁게 느껴졌고, 숨결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깜빡거리는 눈, 들숨과 날숨 같은 것들이.
상대가 의식되기 시작하자 몸이 긴장되었다.
순간 스텝이 뒤엉켰고, 강헌은 비틀거리는 사빈을 제 품에 세게 당겨 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힘찼다.
격하게 움직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세차게 뛰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밀짚모자를 쓴 우쿨렐레 연주자는 강헌과 사빈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로맨틱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를 걷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왔다.
대개 커플들이었다.
그들은 사빈과 강헌처럼 서로에게 몸을 기대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타닥, 피어올랐다.
어느새 선율은 야릇하고 나른하게 바뀌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이곳저곳에서 키스하며 애정 표현을 하는 커플들에 감싸인 강헌과 사빈.
사빈은 민망하고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주위 스킨십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동떨어진 두 개의 섬처럼 보였다.
끌어안고 있는 손을 풀기도 어색하고, 더 가까이 당기는 것도 이상한 상황.
“들어갈까요?”
강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눈으로 답을 재촉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실전에 돌입해야 합니다.”
“실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빈의 모습이 귀여웠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발리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고용인들의 감시가 시작될 테니까.”
오늘, 강헌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빈과 닿고 싶었다.
“연습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은 오늘뿐인데.”
사빈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강헌은 말했었다.
고용인들의 눈을 완벽하게 속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관계는 아침에 나누는 설정으로 하죠. 고용인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그걸’ 지금 하자는 말인가?
이곳, 해변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고용인이라 생각하고 하자는 뜻인가요……?”
사빈이 머뭇머뭇 말을 꺼내자, 강헌이 그녀의 콧등을 톡!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 그게. 강헌 씨가 그랬잖아요. 그건 아침에 하는 거라고…….”
이젠 ‘강헌 씨’라고 제법 잘 부르는 것과, 빨개지는 그녀의 얼굴에 강헌의 심장이 뻐근해졌다.
“그건 돌아가서 연습하기로 하고.”
커다란 손이 사빈의 뺨을 쓸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겼다.
“그 전 단계는 어떻습니까.”
“그 전 단계라면, 어떤…….”
욕망이 뒤섞이기 시작한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키스부터 할까요.”
사빈의 심장이 튀어 나갈 듯 세차게 약동했다.
“여, 여기서요?”
“우린 주로 사람이 보거나 듣고 있을 때 스킨십을 나누어야 할 텐데. 연습 장소로 제격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실전에서 망치면 끝이다. 계약 결혼임을 알게 된다면, 천문호는 곧장 자신을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체벌이 이어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곧바로 수락하기는 어려웠다.
맨정신이지 않나.
술의 힘이라도 빌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빈 씨.”
허리를 옥죄는 팔에 힘이 가해졌다.
그의 단단한 몸과 더욱 밀착하니, 갑자기 무척이나 더워진다.
“연습, 하기 싫습니까?”
어쩐지 그의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도 같다.
아님, 내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리 느껴지는 것인지.
“……먼저는 못 하겠어요.”
도저히. 사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강헌은 그녀를 품에 폭 안았다.
“강헌 씨?”
“긴장하지 말아요. 억지로 하지 않으니까.”
포옹이 사람을 이렇게 안정시키는구나. 그의 너른 품에 안겨 있으니 굳어 있던 몸이 차차 풀렸다.
“완벽하게 속여야 합니다.”
“……네, 알아요.”
“그래야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
강헌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떨리는 속눈썹과 살짝 불안이 어린 눈동자, 움찔거리는 입술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가.
처음이다. 재희에게서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역시, 발리는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이스크림 좋아합니까?”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맛을?”
“바닐라.”
“그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핥는다고 생각해요.”
강헌은 고개를 숙였다.
촉. 살짝 맞닿은 입술이 잠깐 떨어졌다가 이윽고 다시 맞붙었다.
강헌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어 벌렸다.
그러자 사빈도 어색하게 그의 입술을 마주 물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맛보는 듯 연약하고 섬세한 움직임에, 그의 불씨가 당겨졌다.
“으음…….”
사빈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강헌은 그녀가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누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목을 감싸 받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입술을 완전히 포갰다.
그리고 벌어진 틈으로 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놀란 듯 움찔한 사빈의 등을 살살 문지르며, 강헌은 굳어 있는 그녀의 혀를 찾아 휘감았다.
축축하고 유연한 근육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사빈은 그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와의 키스는 감미로웠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계속 연주되고 있는 우쿨렐레의 선율은 들리지 않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도 잊었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 오로지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사빈의 서툰 움직임이 강헌을 더욱 흥분시켰다.
그녀가 자신의 혀를 휘감고 입술을 머금으며 더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속에서 분출되는 뜨거운 열기에 잠식될 것 같았다.
긴 키스가 끝나고.
“하아, 하…….”
“후…….”
두 사람은 가쁘게 호흡하며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끄러워진 사빈이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주위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부끄러워 미치겠어.’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우리를 봤을까? 혀가 오가는 것도…… 보였을까?
“사빈 씨.”
귓가에 훅 끼치는 더운 숨결에 사빈이 몸을 움찔 떨었다.
“주변을 봐 봐요.”
“……못 보겠어요.”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 말에 사빈은 용기를 내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과연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의 파트너에게 푹 빠져 있는 연인들은 곳곳에서 키스를 나누었다.
사빈과 강헌보다 더욱 진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적지 않았다.
옷 속으로 손이 들어간 커플도 있었다.
민망해진 사빈이 그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이, 이제 그만 호텔로 돌아가요!”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강헌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순순히 끌려왔다.
“그럼 전 먼저 잘게요. 내일 아침에 봐요.”
“사빈 씨.”
“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모습에 강헌의 눈이 짙어졌다.
“실험을 해 보지 않겠습니까.”
“실험이요?”
“우리가 같은 침대에 누울 수 있을지, 없을지.”
강헌은 재희와 함께 있을 땐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우리’라는 말을 내뱉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녀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낭패였다.
한때는 재희를 사랑해 보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 애가 원하는 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침대에 누워 보려고 했다.
머리로는 가능했다.
재희와 친하게 지냈고 그녀는 외모도 예쁘며, 무엇보다 자신을 간절히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몸이 맞닿는 순간.
몸이 자동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목 안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만약 사빈과도 그렇다면 큰일이다.
“오늘이 실험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니까.”
그의 말에 사빈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보통 때라면 거절을 했겠는데…….
“……알겠어요.”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이따가 봐요.”
마스터룸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온 사빈은 문을 쾅 닫고 등을 기댔다.
그리고 바닥으로 스르르 내려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맨정신에 뭘 한 거야.”
아직도 강헌의 입술이 닿아 있는 듯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다.
‘앞으로 이런 걸 해야 하는구나. 사람들 앞에서.’
잘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런데, 한국으로 돌아가 키스 이상의 행위를 하는 척, 고용인들을 속일 수 있을까.
강헌도 이런 마음이 들었나 보다. 그러니 그런 제안을 했겠지.
좀 부끄럽지만 허락하길 잘한 것 같다.
‘자유, 조금만 참으면 자유야.’
사빈은 애써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입술이 살짝 부르터 있다.
그걸 보니 또다시 부끄러워져서, 얼른 시선을 돌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강헌은 벌써 잊었겠지, 생각하며.
***
서브룸에 딸린 욕실에 들어온 강헌은 곧장 차가운 물줄기 아래 몸을 내맡겼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빈의 머리와, 목과, 어깨와, 허리를 안았던 감각이 여전히 선명했다.
품에 다 들어오는 체구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듯 여렸고,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재희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것처럼, 사빈과 한 침대를 쓰는 것 역시 곤혹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빈에게 각자 침대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잠결에 무심코 굴러온 사빈이 제 품에 안겨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쩌다 자신의 팔을 베고 자거나 끌어안는대도 말이다.
사람과 닿는 것이 두려웠는데.
이렇게 먼저 손을 뻗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