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그의 말에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제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아빠와의 추억에 눈물이 나왔고.
동시에 천문호가 친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들켰을까 봐, 그리하여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서 눈물이 나왔다.
하나 ‘공주님’이라는 말에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갔다. 천문호와 추연실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부르던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공주님, 공주님.
참으로 듣기 싫은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다.
나는 공주가 아니라 인질이라고.
천문호와 추연실의 이미지 격상을 위한 소품일 뿐이라고.
당신들이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내 위치를 새삼 자각하며 절망에 빠지고.
나를 정말로 공주님처럼 대해 주던 부모님이 생각나서 심장이 쥐어뜯기는 기분이라고.
하지만 사빈의 입술은 언제나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려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속에 가득 담은 채.
사빈은 제 눈가를 닦는 강헌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는 앞서 걸었다.
“사빈 씨.”
그러나 금세 강헌에게 붙잡혔다.
“화났습니까?”
유치한 화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사빈은 좀처럼 뒤엉킨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하게도.
“이 정도면 사진도 많이 찍혔을 듯해요.”
사빈은 또다시 강헌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니 이제 각자 다녀요.”
그녀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걸으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서, 울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마음껏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해변을 걷던 사빈은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이대로 끝없이 걸어가면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쉬고 싶어.’
한국으로 돌아가서 시달릴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니 속이 갑갑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아도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다시 쿠킹 클래스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걷던 사빈은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줄 알았다.
단단한 무언가가 뒤에서 허리를 휘감아 왔다.
“조심.”
귓가에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빨리 걷다간 넘어집니다.”
강헌이었다.
그는 사빈을 바로 세워 준 다음 다친 곳이 없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 내렸다.
“발목이 아프지는 않습니까?”
“…….”
“다쳤습니까?”
강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좀 더 빨리 붙잡았어야 했나.
뒤에서 사빈을 따라오는 내내 눈을 떼지 않기는 했지만, 혹여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강헌이 그녀의 앞에서 몸을 낮추고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사빈은 너른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업히지도 못하겠어요?”
“이강헌 씨.”
다시 ‘이강헌 씨’로 되돌아간 호칭에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반쯤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약속해 주세요.”
“뭘 말입니까?”
“오늘부터 정확히 1년 후에 이혼하기로.”
앉아서 올려다보는 강헌과 서서 내려다보는 사빈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만 흐르는 냉기였다.
“그 이상은 제가 못 버틸 것 같아서요.”
“……무엇을 말입니까.”
“행사에 얼굴 비치고. 억지로 행복한 척 웃고. 고용인들이 있을 때마다 연기하는 거. 그거 딱 1년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후엔 떠나리라.
어디든,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는 곳으로.
다시 이 발리로 돌아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행이든 머무는 것이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약속해 주면, 잘할게요. 결혼 기간 동안은 최선을 다할게요.”
간절한 사빈의 눈빛에, 어쩐지 강헌은 속이 긁히는 듯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주먹을 꽉 쥐게 된다.
사빈의 입을 막고 싶다.
더는 저런 말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사정이 어떨지 모르니.”
그의 말에 사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나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사빈 씨의 의견을 들어줄 수 있도록.”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는 것을 보며 강헌은 웃어야 할지, 여전히 얼굴을 굳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 업히죠.”
“안 다쳤어요. 다리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다는데도 왜 기분이 도통 풀리지 않는 것인지, 강헌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저도 모르게 말투가 불퉁해진다.
“또 뭡니까.”
흠칫하며 움츠러든 사빈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헌은 맥이 탁 풀렸다.
“그 말, 진짜 싫거든요.”
마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는데, 불퉁한 표정으로 볼이 살짝 부푼 사빈을 보니 입가에선 힘이 빠진다.
인정하긴 싫지만…… 귀엽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면이 있는 여자다, 사빈은.
“그러죠.”
이번엔 흔쾌히 나온 대답에 그녀의 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작은 변화까지 선명히 눈에 들어와서 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발리는 이상한 곳이다.
사람을 이전과는 다르게 만든다.
괜히 장소 탓을 하며, 강헌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
사빈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내민 손을 살짝 흔들었다.
“신혼부부가 잠깐 다투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이들도 인간적이다.’라는 기사가 나갈 것 같은데.”
강헌이 내민 화해의 손길임을 모르지 않았다.
멋대로 울고, 토라져서 뒤돌아선 건 나인데.
먼저 잘못한 자신에게 먼저 손을 건네는 사람은 부모님 이후로 강헌이 처음이었다.
사빈은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발리의 해변에서, 속으로 울고 있던 제게 손을 내밀어 준 강헌의 모습이.
사빈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
그가 손깍지를 깊이 끼어 왔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듯이.
“제대로 화해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요?”
“이렇게.”
강헌이 사빈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놀라서 커다래진 눈을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쿠킹 클래스에서 받았던 마그네틱이랑 똑같은 표정이네.”
“이강헌 씨!”
발끈한 사빈이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셔터 소리가 작게 울렸다.
***
해변을 걷고 난 그들은 근처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구아바 주스는 아주 신선하고 맛있었고, 요리도 훌륭했다.
아쉬운 얼굴로 빈 접시를 보는 사빈에게 강헌이 말을 건넸다.
“한국에도 이 음식점이 있다는군요.”
강헌의 말에 사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돌아가면 가 봐야겠어요! 발리랑 맛이 똑같을까요?”
그렇다고, 이 레스토랑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리 본점의 맛과 똑같다고 얘기하려던 강헌은 다른 말을 했다.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게 정확하겠네요.”
다음 혼밥은 그곳으로 정했다!
사빈이 레스토랑의 이름을 속으로 발음하던 와중이었다.
“귀국한 주 주말에 어떻습니까.”
“네?”
“레스토랑 말입니다.”
사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강헌 씨도 같이 가시게요?”
“……안 됩니까?”
“아, 아뇨. 같이 가는 건 생각도 못 해서요.”
그 말이 거슬린다. 강헌은 사빈의 말 대신 더욱 거슬리는 것을 지적했다.
“호칭.”
“앗.”
“돌아가서도 주의해야 할 겁니다.”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 앞에서도 이렇게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는 ‘강헌 씨’라고 불러야 하는구나.
“이제부터는 진짜로 강헌 씨라고 부를게요.”
“틀리면?”
“네? 음, 그럼…….”
“벌칙을 받는 것으로 하죠.”
벌칙? 사빈이 눈을 고쳐 떴다.
“어떤…… 벌칙이요……?”
“안 가르쳐 줄 겁니다.”
강헌이 씩 웃었다.
“그때그때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그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꼭 처음인 것처럼 어색하고, 마음이 떨렸다.
다이아몬드를 보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잘생긴 사람이 웃으니 떨리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아마 재희가 제게 웃어 주었더라도 떨렸을 것이라고, 사빈은 생각했다.
“어디 때리시게요?”
사빈이 겁먹은 표정으로 묻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짧게 내뱉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강헌이 그럴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벌이라는 말에 천문호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그녀가 두 손을 꾹 쥐는 것을 보자, 강헌은 머쓱해졌다.
정말로 자신이 어디라도 때릴 줄 알았나 보다.
“아프게 하는 일 없을 겁니다. 절대로.”
거짓말.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약속할게요.”
약속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부모님은 지금 세상에 없다.
그 정도로 부질없는 것이 약속이고 맹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헌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 덧없는 약속과 온기에 기대어, 마음을 놓고 싶었다.
“약속이에요.”
“손가락이라도 걸겠습니까?”
망설이던 사빈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시각화를 해 놓으면 그의 기억에도 잘 남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하는 건.”
어린 날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손가락을 걸었던 이후로 처음이다.
사빈의 작은 손이 자신의 커다란 손에 얌전히 휘감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야릇한 만족감이 드는 것인지 강헌은 알 수 없었다.
“저도 오랜만이에요. 어릴 적 이후로는 이래 본 적 없는데.”
어쩐지 속이 간질거려서 두 사람은 얼른 손을 놓았다.
“호텔로 돌아갈까요?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그러죠.”
자리에서 일어난 강헌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고, 사빈은 제법 익숙하게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낀 두 사람은 각자의 심장 박동을 서로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호텔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
일주일의 신혼여행 동안, 두 사람은 제법 가까워졌다.
밖에서 다닐 땐 항상 손을 붙잡았고, 이따금 보란 듯이 강헌이 사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파파라치의 시선을 의식하던 것도 잠시.
그들은 발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지나가다 마음이 끌리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거나 사원을 둘러보았다.
돌아가기 전날인 오늘은 함께 서핑을 즐겼다.
사빈은 여전히 물을 무서워했지만 강헌이 든든하게 잡아 주어서 마지막엔 그의 손을 붙잡고 보드 위에서 제법 중심도 잘 잡았다.
그렇게 잘 놀고 난 뒤, 두 사람은 노을이 지는 해변가를 걸으며 호텔로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내일 돌아가네요.”
사빈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더 있고 싶은데. 아직 못 해 본 게 너무 많아요.”
마침 해변가엔 모닥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우쿨렐레 반주에 맞추어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재밌겠다.”
사빈이 중얼거린 말에 강헌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헌 씨?”
그가 손을 내밀었다.
“춤……추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