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24)화 (24/90)

제24화

발리의 날씨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특히 더 딱딱하게 굳은 강헌의 표정은 쉬이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화가 나는 동시에 그런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빈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들이 함께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확률이 높았다.

주위를 의식하여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일은 많겠지만 기껏해야 행사장에 모습을 비치는 것뿐일 테다.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여 따로 여행을 갈 일은 없겠지.

머리로는 잘 받아들일 수 있는데, 왜 기분은 이렇게도 가라앉는 것인지 모르겠다.

“앞일은 모르는 겁니다.”

툭 내뱉은 말에 사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우리가 결혼한 것처럼.”

사빈이 하는 말마다 왜 이리도 거슬리는지.

“강헌 씨는 나중에 와서 더 맛있게 만들어 먹으면 되겠네요.”

“…….”

“서…… 그 사람이랑.”

그때 사장이 기념품을 나누어 준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저거 받고 올게요.”

사빈이 자리를 떴다.

그녀의 말이 다 맞다. 맞는데…….

기분이 왜 이런 걸까.

‘나보다 재희를 더 자주 떠올리는군.’

아무래도 사빈의 머릿속엔 자신과 재희가 세트로 붙어 있는 모양이다.

그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하다.

우리가 결혼한 이유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재희의 존재니까.

그래도 사빈의 입에서 재희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는데도.

“마그네틱이에요. 귀엽죠.”

커플에게는 ‘Bali’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든 신랑, 신부 마그네틱을 주었고, 가족 단위의 사람들에게는 훌라춤을 추고 있는 캐릭터 마그네틱이 사은품으로 주어졌다.

“강헌 씨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

“둘 다 내가 가질게요.”

“누가 싫어한다고 했습니까?”

“네?”

“나도 음식 만드는 데 일조했으니 보상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빈은 당황했다. 강헌이 이 자그마한 마그네틱을 받겠다고 저리 정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혹시 피규어 같은 거 좋아하나?

만약 그렇다면, 좀 귀여울지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것만 선호할 것 같은데 의외로 이런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는 취향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일리 있는 말이에요. 자, 여기요.”

사빈이 신랑 모양의 마그네틱을 건넸다.

“이거 말고.”

강헌이 턱짓으로 사빈의 손에 들린 것을 가리켰다.

“저걸로.”

“왜요? 이강, 아니, 강헌 씨는 얘인데?”

“그게 좋습니다.”

취향 참…… 의외네.

강헌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것으로 붙박였다. 사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것을 내주었다.

“자요.”

신부 모양의 마그네틱을 받아 든 강헌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그런 거 좋아해요?”

“기념이니까.”

“흐음. 의외네요.”

그럼 난 얘로 하지, 뭐. 사빈은 신랑 모양의 마그네틱을 내려다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딱딱하고 차가운 게 꼭 강헌을 닮았다.

“그런데 얘, 어딘가 강헌 씨 닮았어요.”

“얘도 어딘가 사빈 씨를 닮았습니다.”

“그게요? 어디 봐 봐요.”

신부 인형은 눈이 지나치게 엎어 놓은 반달 모양처럼 그려져 있어서 인위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이상해요?”

강헌은 신부 마그네틱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심한 낯으로 담담하게 읊조렸다.

“사빈 씨와 많이 닮았습니다. 꼭 어제 잘못 찍은 사진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똑같다는 거예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

사빈의 입술이 불툭 튀어나왔다. 그가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눈이랑 코가 닮았습니다. 튀어나온 입술도.”

사빈이 제 손에 들린 것을 그의 눈앞으로 척 내밀었다.

“얘도 강헌 씨랑 엄청 똑같거든요? 차갑고 딱딱하고 정 없어 보이는 게.”

진지한 척하던 강헌은 진짜로 진지해졌다.

남들에게선 늘 듣던 말이다.

물론 앞에서 대놓고 말을 하는 간 큰 사람은 없었으나 그도 자신의 평판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재희가 말을 하기도 했다.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이따금 오빠가 너무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사빈도 그렇게 느낀다 생각하니 신경이 조금 쓰였다.

“일단 우리 얼른 나가요.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입에 담긴 ‘우리’라는 말이 듣기에 좋았다.

강헌은 일단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럽시다.”

들어올 때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섰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구경을 할 때도, 현지인들이 애용하는 시장에서 과일을 살 때도,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도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신혼집으로 가는 거죠?”

강헌이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럴 예정인데. 집에 다녀오고 싶습니까?”

“아니요!”

저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나와 버린 반응에 사빈이 애써 수습했다.

“빠,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결혼까지 했는데 계속 기대기만 할 수는 없죠.”

“전부터 느꼈는데, 독립심이 강하군요. 부모님과의 사이도 좋은 듯한데.”

“그렇게…… 보였어요?”

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자주 안아 주었다면서요. 어릴 땐 발이 땅에 닿은 적이 없다면서. 하도 안겨 다닌 탓에.”

사빈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그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예쁘다, 사랑한다, 소중하다, 매일매일 속삭여 주었다면서.”

“그, 그걸 어떻게…….”

“크레파스로 선만 그어도 화가가 될 거라고, 연필로 한 글자만 써도 소설가가 될 거라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부끄럽다고 한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빈 씨는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사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빈 씨?”

“내가…… 내, 내가 또 뭐라고 했어요?”

“왜 그래요?”

“내가 뭐라고 했냐고요!”

사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혹여 천문호와 추연실이 자신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까지 술김에 말해 버렸을까 봐 미친 듯이 불안했다.

[만약 외부에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각오해야 할 거다. 너뿐만이 아니라 네 부모까지 두 번 죽는 격이 될 거야. ‘집안의 수치였던 아들,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택하다’는 기사 타이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차가운 목소리로 분명하게 내뱉던 천문호를 떠올리자 사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 말고 또 뭐라고 했어요? 내 부모님에 대해서?”

붙잡고 있는 사빈의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하얗게 질린 얼굴, 떨리는 입술과 목소리, 눈동자.

실수를 했을까 봐 걱정되어 보이는 반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과했다.

“실수했을까 봐 이러는 겁니까?”

“빨리 말해 주세요, 제가 또 뭐라고 했나요?”

“수영장에서 발장구 한 번 쳤다고 수영 선수로 키워야겠다고 해서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헌이 뜸을 들이자 사빈은 숨통이 더욱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뭐요?”

“……내 냄새가 좋다고 했습니다. 꼭 아빠 냄새 같다면서. 시원하고 포근하고 단단하다고.”

안 돼, 제발…….

“안겨 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서운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지금은 아빠가 안아 주지 못한다고도.”

사빈이 휘청거렸다.

놀란 강헌은 얼른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며 제게로 당겼다.

“사빈……!”

강헌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사빈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밖으로 툭, 떨어졌다.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미간을 좁힌 강헌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난 말을 지어낼 줄 모릅니다.”

그의 말이 맞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전부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있던 일화들이니까.

“사빈 씨. 왜 우는 겁니까.”

“…….”

“난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얘기도 아니고. 오히려 듣기에 좋았습니다. 내가 지나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얘기였으니까.”

담담히 말하며 강헌은 연신 그녀의 눈가와 뺨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이 다정하게 느껴져서 더욱 눈물이 나왔다.

사빈이 그의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강헌이 그녀의 뺨을 감싸 올려 다시 저와 눈을 맞추게 했다.

“뭐가 두려운 겁니까?”

나와는 다르게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지나왔던 당신이, 대체 왜 이렇게 불안에 떠는 것일까.

그녀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내가 부모님에 대해 말한 게…… 더 있나요?”

떨리는 동공과 목소리가 애달팠다.

‘제발 더 실수한 게 없기를.’

강헌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빈은 온몸의 피가 죄다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없습니다.”

하아. 사빈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부모님이 많이 엄한 편입니까?”

“……아무래도 정치를 하시니까요. 작은 말과 행동도 크게 부풀려지니까.”

“그렇다면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술버릇이네요. 다정하고 화목했던 가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니.”

사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아버지, 어머니께 도움이 되는 술버릇이라 다행이네요.”

자신의 모든 것은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쓸모 있는 도구다.

1년 후에는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완전한 자유 속에서 살아가리라.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는데 강헌의 손가락이 눈가를 부드럽게 훑었다.

“이제 다 울었습니까?”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눈물방울을 닦아 낸 그가 사빈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픽 웃었다.

“공주님은 공주님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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