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그러죠.”
강헌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
또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아서 사빈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재료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
“칼질할 줄 압니까?”
“그럼요.”
추연실은 사빈에게 요리를 가르쳤다. 물론 직접은 아니고 가사일을 도와주던 남원댁에게 가르치도록 시켰다.
[남자 마음 잡는 데는 요리만 한 게 없다. 보잘것없는 네가 버림받지 않으려면 음식 솜씨라도 좋아야 할 거다.]
다행히 요리는 사빈의 적성과 잘 맞았다.
집안의 이미지를 깎지 않기 위해서, 혹은 남자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빈은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요리를 배웠다.
다양한 재료들이 어우러져 깊은 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견뎌 내다 보면 희망이 생겼다.
천문호의 집에 살면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이 언젠가 제게 다가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위한 자양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슬픔, 고독, 절망, 좌절, 그리움 등 부정적인 감정 일색일지라도 그것들이 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희망이라는 그릇 안에 담기면 아주 다른 맛과 향을 지닌 요리가 될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위한 요리를 만들 시간은 없었다.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꼭 나 자신을 위한 요리를 만들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꿈이 이루어졌다. 어쨌든 이 남자 덕분이다.
“강헌 씨는 요리할 줄 모르세요?”
그저 단순한 궁금증이었는데 그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강헌에게 음식이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시절, 혈기 왕성한 아이들에게 배정된 음식은 너무나도 적었고, 그렇다고 음식을 더 사 먹을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회가 생기면 되도록 많이 먹어 놓아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조그룹에 입적된 후에도 음식에 대한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때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므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사빈과 함께라는 사실에 은근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럼 이번이 처음이에요?”
“예.”
“하긴 그럴 시간조차 없었겠네요.”
강헌이 긍정한다는 듯 침묵했다.
“한 번 해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내가 먹을 음식, 내 손으로 만들었단 사실이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재료 다질 테니까 여기 레시피 보면서 냄비 안에 넣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강헌은 진지한 얼굴로 사빈이 다져 놓은 재료들을 냄비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하도 조심스러워서 웃음이 다 났다.
다이아몬드를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저렇게 크고 딱딱한 남자를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사빈은 처음 알았다.
[거의 다 만들어 가고 있지요? 데코레이션은 파트너와 손을 붙잡고 함께 합니다. 특히 허니문을 온 신혼부부들은 남편이 아내를 뒤에서 안아 주세요!]
사장의 쾌활한 말에 모두들 가볍게 환호했다. 여기저기서 백허그를 하는 커플들이 늘어났다.
‘어, 어쩌지? 못 들은 척할까?’
그런 사빈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사장님이 그들을 가리켰다.
[헤이, 거기! 달콤한 허니문을 즐기는 신혼부부께서도 어서 백허그를 해 주세요. 아까처럼 붙어 있으면 돼요!]
‘으으, 부끄러워.’
사빈의 볼이 다시 달아올랐을 때.
등에 단단한 것이 닿으며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덮었다.
“사빈 씨.”
귓가에서 바로 속삭이는 낮은 음성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뭐부터 넣을까요.”
그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한 탓에 입술이 하얀 목덜미에 살짝 스쳤다.
“읏…….”
사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자 제 허리를 감싼 강헌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곳이 뜨겁게 느껴졌다.
‘발리의 태양이 워낙 뜨거우니까. 그래서 이렇게 느끼는 거야.’
사빈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강헌은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혼자서만 전전긍긍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코, 코코넛 워터 좀 집어 주세요.”
“……저것 말입니까?”
어쩐지 강헌의 음성이 아까보다 탁하게 들렸다. 사빈은 기분 탓이겠거니 여겼다.
코코넛 워터는 테이블 끝에 놓여 있어 강헌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 했다.
두 사람의 몸이 더 가깝게 밀착되었다.
사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애썼지만 심장 박동은 더욱 거세졌다.
“이렇게 넣으면 됩니까?”
그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닿아서 귓가가 간지러웠다.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당신의 숨결이 닿아서 몸이 자꾸만 움찔거려요.’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그 정도면 됐어요.”
사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기대되는군요. 첫 요리를 발리에서 해 보다니.”
은근한 기대감이 어린 그의 목소리 끝에는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사장이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손봐 주었다.
사빈과 강헌에게 다가온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신청해 주었죠?]
[맞습니다.]
[사이좋은 부부를 두고 뭐라고 표현하던데. 뭐였더라, 그게? 워놩, 원항, 월낭…….]
강헌과 사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앙?]
[아, 맞아요! 그런 발음이었어요. 조금 어렵네요. 두 사람이 그렇게 보여요. 아주 잘 살겠어요.]
사장의 말에 사빈의 볼이 또다시 달아올랐다. 이러다 얼굴이 익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잘 살아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요. 나중에 아이 낳으면 기념으로 또 와요. 와서 한국의 워낭이라고 말해 주면 특별 서비스 드릴게요.]
사장이 호쾌하게 웃었고 강헌도 옅은 미소를 띠었다.
오직 사빈만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라니. 상견례 할 때도 그렇고, 이강헌 씨는 저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저런 게 바로 어른일까?
물론 사빈도 나이로 따지면 어른이다. 스물여섯이니.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빈이 생각하는 어른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준이라면 자신은 아직도 어린 아이였다.
쉽게 당황하고 쉽게 흔들리며 내 인생을 마음대로 펼쳐 본 적 없는 어린아이.
그에 비하면 강헌은 당황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위해서 곧게 걸어 나간다.
[예. 아이 낳으면 함께 오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말조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여상하게 말하다니.
아무래도 저보다 감정을 꾸며 내는 데 훨씬 더 능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와 척을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멘탈이 강한 사람을 어떻게 이길까.
‘최대한 협조하자. 부딪치지 말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사빈이었다.
***
“어때요?”
“꽤 괜찮군요.”
각종 야채와 과일 등을 다져서 볶고 무친 것을 스푼으로 조금 떠서 시식을 해 보았다.
제 손으로 만든 음식은 꽤 맛있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 맛만은 혀끝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 강헌은 확신했다.
“그렇죠?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에선 이런 맛이 안 날 거예요. 이곳에서 직접 기른 것들로만 만든 거니까.”
“다음에.”
시식을 하느라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한 사빈이 ‘네?’ 하고 반문했다.
“미안해요, 못 들었어요.”
“다음에 또 오죠.”
순간 사빈의 말문이 막혔다.
우리에게 다음이랄 게 있을까?
아마 둘만의 여행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은데.
이것도 그저 ‘어른’의 인사치레일까.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자, 각자 만든 음식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오늘 쿠킹 클래스를 함께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도록 하죠!]
“어, 우, 우리도 먹으러 가요.”
사빈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접시를 가지러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헌은 사빈의 뒤에 커다란 남자가 서는 것을 보고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뷔페처럼 음식을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 와 먹는 방식은 아주 좋았다.
덕분에 강헌과 어색해지려 할 때마다 사빈은 음식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강헌이 바로 옆에 따라붙어서 탈출 시도가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음식이 맛있어서 다행이었다. 카레 맛이 나는 닭고기 수프와 땅콩 소스를 곁들인 전병 비슷한 디저트, 각종 꼬치 등 입안에 넣는 것들 모두 무척이나 맛있었다.
“이것도 참 맛있네요. 한국에 가서도 생각날 것 같아요.”
“돌아가서도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런 맛은 안 날 거예요.”
사빈이 접시와 포크를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 날씨와 온도, 습도, 바람의 세기, 사람들의 즐거운 말소리가 모두 적당히 뒤섞여 있어서 이렇게 맛있는 거니까요.”
“…….”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강헌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하는 여행도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