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두 번이나 술에 취해 덮치고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은 조금 덜 존중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그건……!”
사빈의 볼이 연하게 물들었다.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호오. 그렇습니까.”
“……미안해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반성하고 있어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이강헌 씨가 그런 말을 지어낼 리도 없고.”
“미안하면 오늘 잘해요. 완벽하게 속여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
“그건 걱정 말아요! 정말 잘해 볼게요.”
조금만 참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뭔들 못 할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사빈은 강헌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손깍지를 꼈다.
순간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빠도 좀 참아요. 그래야 이강헌 씨 말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이강헌 씨, 많이 힘들어요? 빨리 들어가요. 그래야 손을 놓을 수 있어요.”
“일개미들은 한국인도 있고 현지인도 있습니다.”
“네?”
“이강헌 씨라고 부르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그가 몇 미터 떨어진 커다란 나무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햇빛에 반사되어 렌즈가 번쩍이고 있었다.
“저쪽에 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빈이 돌아보려 하자, 그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며 부드럽게 막았다.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도록 놔두는 게 좋겠습니다. 자기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행동한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헌 씨.”
그저 성만 떼고 불렀을 뿐인데. 강헌은 제 심장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부르면 되겠죠?”
“……아마도.”
“저기, 아까처럼 저한테 고개 좀 숙여 주세요. 아주 잠깐만요. 그럼 저쪽에서는 애정 표현을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전장에라도 나가는 듯 결연한 사빈.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헌이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3초 정도만 있다가…….”
입술이 포개져서 사빈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놀라서 벌어진 틈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온 혀가 그녀의 입안을 가볍게 훑고 나갔다. 커다래진 사빈의 눈과 짙게 가라앉은 강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다시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버드키스였다.
쪽. 쪽. 야릇한 마찰음이 어쩐지 크게 들렸다.
“제대로 한다면서.”
아침에 볼 때부터 머금고 싶었던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에 고삐가 풀리고 말았다.
“역시 말뿐이었어?”
사빈의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파르르 떨렸다. 강헌이 엄지로 방금 전 혀로 맛보았던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어젯밤에 당신은 이것보다 더 진하게 키스했는데.”
그의 위험한 눈빛은 사빈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이강헌 씨, 잠깐, 잠깐만요.”
“또 잘못 불렀잖아.”
강헌은 사빈의 목덜미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자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이러고 잘도 나왔군.”
흰 목덜미에는 꽃잎 한 장이 연하게 녹아든 듯 흔적이 붉게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강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에 강헌의 입꼬리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무슨 말이에요?”
달아오른 볼 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구한 사빈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맑은 그녀와는 다르게 제 속에서는 탁한 욕구가 불툭 솟아올랐다.
“정말 순진한 건지, 아님 그런 척인지.”
한껏 심사가 비틀린 강헌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목으로 내려온 그의 엄지가 제가 남긴 흔적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사빈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너, 너무 만지지는 마세요.”
“왜. 제대로 못 하겠습니까?”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조금만 천천히 해 주세요. 익숙하지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치고는 과감하던데.”
“제가 먼저 하는 건 괜찮은데…… 이강, 아니, 강헌 씨가 먼저 다가오면 조금 당황스러워서…….”
부끄러운 듯 땅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이는 사빈의 모습을 보니 피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강헌은 부러 삐딱하게 말했다.
“그건 약속해 줄 수 없겠는데.”
“뭐, 뭐라고요?”
커다란 손이 사빈의 손을 붙잡았다.
“들어갑시다. 계속 이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니.”
얼결에 그에게 이끌린 사빈은 손을 붙잡은 채 쿠킹 클래스가 열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넓은 안쪽은 다양한 좌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클래스를 신청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각각의 무리들과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꽤 있군.”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래요.”
온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커플 혹은 가족이었다.
“여길 혼자 오려고 했던 겁니까?”
“네. 안 되나요?”
이 다정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섞여 있었을 사빈을 상상하니 강헌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록 정략적일지라도, 허울뿐일지라도 어쨌든 남편은 남편이었다.
그는 부여잡은 사빈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작고 여린 손의 온기가 선명히 와 닿았다.
“이강헌 씨?”
사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호칭.”
“아, 강헌 씨. 여기에는 일개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밖에 나온 순간부터 우린 부부입니다. 방심하지 말고, 너무 의식하지도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합시다.”
그때 안쪽에서 흰옷을 입은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나와 손뼉을 치고 영어로 외쳤다.
[쿠킹 클래스를 신청하신 분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카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사빈과 강헌도 손을 맞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저희는 오늘 저희 카페에서 직접 기른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 겁니다.]
사장은 긴 우드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다채로운 색깔의 재료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잘 들어야 하는데 신경이 온통 맞잡은 두 손에 가 있었다. 사빈은 억지로 사장님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자, 바구니를 나눠 드릴 테니 원하는 재료를 담아서 가져오시면 됩니다.]
다들 재잘거리며 바구니를 들고 재료가 펼쳐진 테이블로 향했다.
강헌이 사장이 나누어 주는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우리도 고르죠.”
“저기, 손을 놔주셔야…….”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슬쩍 내린 강헌은 무심히 말했다.
“내가 바구니를 들고 있을 테니까 사빈 씨는 재료를 담아요.”
그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
‘사빈 씨라고 불렀어, 나를.’
그저 성을 떼고 부른 것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인지,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이끌고 테이블로 향했다.
‘정말 이대로 재료를 담으라고요?’라는 시선을 담아 쳐다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흐뭇한 표정을 지은 사장이 웃으며 그들에게 외쳤다.
[신혼여행이죠? 갈라놓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오세요. 파트너는 그대로랍니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손을 꼭 붙잡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 꽤나 유난스러운 커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진 사빈은 더 주목받기 전에 일단 그를 이끌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재료를 골랐다.
“잘 들고 있으세요, 떨어뜨리지 말고.”
민망한 마음에 툭 내뱉었는데 강헌이 강하게 받아쳤다.
“걱정 말아요. 밤새 사빈 씨를 안아 들고 있어도 끄떡없었으니.”
그가 짓궂게 덧붙였다.
“조금 무겁긴 했지만.”
사빈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런……!”
“농담입니다.”
강헌이 씩 웃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그의 소년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맑고 환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태양처럼.
놀림 당했다는 생각조차 잊을 만큼 강헌의 웃는 모습은 강렬했다.
사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남자가 웃는 게 뭐라고 가슴이 이렇게 뛰기 시작하는 것인지.
“가벼웠습니다. 생각보다는.”
어쩐지 강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녀는 홱 몸을 돌려 재료를 고르는 데만 열중하는 척했다.
“화났습니까?”
“바구니, 더 가까이 대 주세요.”
볼이 조금 나온 뾰로통한 모습을 보니 강헌은 더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사빈이 정말로 토라져서 저와는 말 한 마디 섞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건 싫었다. 사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금껏 강헌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명령했고, 재희는 일방적으로 애원했으며, 다른 직원들은 그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기다렸다.
말과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것임을 사빈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아니, 강헌 씨도 담고 싶은 재료 있어요?”
사빈이 재료들을 빤히 내려다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말해요. 담을 테니까.”
“사빈 씨가 원하는 거면 나도 좋습니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려서 사빈은 되레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 가도록 해요. 난 다 골랐으니까.”
“그럽시다.”
“정말 안 골라도 돼요? 하나도?”
“사빈 씨가 좋으면 나도 좋아요.”
사빈은 그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속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남자는 일개미들을 속이기 위한 연극을 하고 있는 것뿐인데,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진정해, 천사빈. 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남들 보라고 그러는 거니까 설레지 마.’
사빈은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음식을 만들기 위한 테이블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강헌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테이블 위에는 각자 요리할 수 있도록 도마와 칼, 앞치마, 그리고 영어로 작성된 레시피가 놓여 있었다.
“이제 정말 놔주셔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