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사빈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어, 그게……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아서요.”
그녀가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랑 같이 밥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여긴 감시하는 일개미들도 없고.”
“일개미가 왜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사빈의 얼굴을 보던 그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붉게 부르튼 입술.
어제 자신이 물고 핥으며 놔주지 않은 흔적이었다.
‘……젠장.’
순간 속에서 욕망이 솟구치는 감각에 그가 휙, 몸을 돌렸다.
욕실로 걸어가려던 그는 사빈의 중얼거림에 멈칫했다.
“아아, 그래서 어제 칵테일 마시러 간 거구나.”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알아서 시킬게요!”
그 말에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빈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라서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결혼하면 이런 생활이겠지?
일개미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만 붙어 있고, 둘만 있을 땐 각자 볼일 보고.
“나쁘지 않네. 자유 시간도 많고.”
사빈은 룸서비스를 시킨 뒤 휴대폰을 꺼내어 지도 어플을 켰다. 발리에서 가고 싶던 곳을 표시한 깃발 아이콘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결혼 준비로 추연실이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어서 세세한 코스를 짜지는 못했다.
카누를 타고 바다를 구경해 볼까? 음, 이 해산물 레스토랑도 가고 싶었는데. 그럼 루트를 어떻게 짜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케이터링 카트에서 테이블로 식사를 나르는 직원이 인사를 건네어 사빈은 영어로 가볍게 몇 마디 나누었다.
“Have a good day!”
테이블 세팅을 마친 직원이 나간 후.
“와아, 너무 예쁘다.”
꽃잎으로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는 케이크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씻고 나온 강헌이 다가왔다.
“딱 맞게 나오셨네요.”
“머리는 안 아픕니까?”
“머리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숙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인트마리아 호텔에서는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 주제에 너무 빠르게 마셔서 숙취가 강했나 보다.
지금은 머리가 맑고 개운하다.
어제, 첫 잔이었던 블루하와이를 홀랑 마셔 버린 후, 강헌이 칵테일의 이름과 유래, 즐기는 법을 알려 주며 천천히 마시게 한 덕분인 듯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사빈이 싱긋 웃었다.
“이강헌 씨 덕분이에요. 이것저것 알려 주면서 천천히 마시게 했잖아요.”
“…….”
“고마워요.”
강헌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황한 사빈이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뭐 묻었나요?”
“천사빈 씨는 어제 기억 안 납니까?”
그녀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러자 강헌은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요? 제가 또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요?”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습니까?”
“혹시 또 안아 달라고 했나요?”
사빈이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그 새벽에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동이 트도록 잠들지 못했는데, 그녀는 기억을 못 한다.
그 뜨거웠던 키스를 말이다.
어쩐지 강헌은 무척 억울했고, 또 사빈이 얄밉게 느껴졌다.
남의 속을 다 뒤집어 놓고선 혼자만 저리 맑은 얼굴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어제 비행기에서처럼 숙취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걱정…….
강헌은 얼굴을 구겼다.
걱정이라니. 누가 누구를?
제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죄송해요, 제가 또 그랬나 봐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정말로.”
사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먹읍시다.”
그런 그녀를 지나친 강헌이 먼저 테이블에 착석했다.
망설이던 사빈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크게 실수했나?’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가운 그의 표정에 사빈은 자신이 어제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입을 열면 큰일이 날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합석한 것처럼 아무런 대화 없이 꾸역꾸역 음식만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빈이 식기를 내려놓자 강헌이 고개를 들어 식사 도중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전 다 먹어서요.”
“…….”
“그럼 먼저 나가 볼게요.”
“어딜 갑니까?”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해요. 오늘은 귀찮게 안 할 거니까 이강헌 씨는 여기에서 업무 보세요. 그럼.”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사빈은 마스터룸으로 향했다.
가방을 가지고 다시 나가려는데 강헌이 입구를 막아선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왜 이러지?
“아까 내 말 못 들었습니까?”
“어떤 말이요?”
“일개미가 이곳에도 있다는 말.”
아, 그랬지. 사빈이 난감한 얼굴을 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에 있는 동안 우리는 완벽히 부부여야 할 겁니다.”
강헌이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키와 체격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사빈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순간.
뻗어 오는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휙 잡아당겼다.
“그건 계속 이렇게 붙어 다녀야 한다는 말이고.”
더운 숨결이 가까워진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뒤섞였다.
“나한테서 한 걸음도 멀어지면 안 된다는 소리지.”
“이, 이강헌 씨, 너무 가깝…….”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기 직전.
“어젯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놀라서 그대로 굳은 사빈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강헌이 사빈의 손을 붙잡아 제 목에 가져다 댔다.
“내 옷깃을 이렇게 붙잡고.”
그가 말할 때마다 더운 숨이 입술을 적셨다.
“내 입술을 몇 번이고 물었는데.”
커다란 손이 닿은 등줄기가 짜릿짜릿해서 사빈은 입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또 기억이 안 납니까?”
그렇다고 말하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 나는 걸 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보다도…….
어떤 말이라도 꺼내려 입술을 조금만 움직여도 그대로 닿을 것만 같아서 사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에 얽매여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일개미들의 눈을 속일 자신이 있다면서.”
“…….”
“밖에서도 이렇게 얼어 있을 건가?”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말뿐이었나.”
명백한 도발이었다.
“두 번이나 술 때문이었다는 변명에 숨을 겁니까?”
발끈한 사빈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보아 봤자 뭘 어쩔 수 있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밖에 나가면.”
사빈은 최대한 입술이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밖에 나가면 잘할 수 있어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잘도 그러겠군.”
“이따가 놀라서 굳어 있지나 마요.”
자신의 허리를 감싼 강헌의 손을 붙잡아 휙 뿌리친 사빈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하.”
짧은 숨을 내뱉은 강헌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 손길이 퍽 신경질적이었다.
방금 전, 사빈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겹치고 혀로 그 뜨거운 안쪽을 헤집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시비를 걸듯 말해 버렸다.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사빈의 말대로 각자 알아서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지워 버렸다.
그녀를 혼자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일개미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는 어제 레스토랑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던 시선들을 떠올리며 애써 합리화했다.
‘결혼하자마자 불화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
강헌은 빠르게 사빈의 뒤를 따라나섰다.
“나오는 순간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거 모릅니까? 그렇게 혼자 앞서가다 불화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불화설이라는 말에 사빈이 멈칫했다.
그런 게 나면 안 된다. 그랬다간 귀국하자마자 그 집에 불려 가게 되는 수가 있다.
어쩌면 천문호는 갖은 수를 다 써서 신혼집을 자신의 집 주변으로 옮기고는, 매 순간 참견하려 들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순간 칼날이 목에 드리워진 듯 사빈의 온몸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말 발리에도 일개미들이 있어요?”
“어제 우리가 호텔을 나왔을 때부터 따라붙었습니다. 일부러 이쪽에서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자기들의 존재를 신경 쓰라는 듯이 말이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사빈이 얼굴이 어두워진 것도 잠시.
“……!”
강헌이 드물게 놀란 마음을 겉으로 드러냈다.
“가요.”
그의 시선이 사빈의 하얀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에 붙박였다.
제 것에 비해 너무나도 작고 가는 그녀의 손이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어?”
그녀의 손가락을 벌려 그 사이 사이로 제 긴 손가락을 밀어 넣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해야 신혼부부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
손깍지를 끼고 호텔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우붓으로 이동했다.
원래 사빈은 아침 해변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일개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또 강헌과 내내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해서 포기했다.
택시에 타자마자 사빈은 그의 손을 놓았다. 몇 초가량 뒤에 강헌도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휑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내 붙잡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강헌 씨. 혹시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해요? 쿠킹 같은 거.”
“안 해 봤는데.”
“하기 싫음 근처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요. 난 쿠킹 클래스 들을 거니까.”
“싫다고는 안 했는데.”
휴대폰으로 열심히 검색하고 있던 사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강헌 씨, 어제…….”
‘어제’라는 말에 그의 눈빛에 날이 서자, 사빈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 어제 말인데요. 혹시 우리 서로 말을 놓기로 했나요?”
‘우리’라는 말에 흉흉했던 강헌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묘하게 저한테 말을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혹시 이것도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사빈이 입술을 안으로 만 채로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린다.
민망할 때면 사빈은 저리 행동하는 모양이다.
그 발견이 어쩐지 기쁘고, 또 귀엽게 느껴져서 강헌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저도 모르게 웃고 있을 것만 같아서.